금대암에서 압축파일을 풀다 / 정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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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627회 작성일 18-08-29 10:24본문
금대암에서 압축파일을 풀다
정태화
(1)
높은 단壇 위에 앉아 계시니 심심도 하시겠다.
그 사실 대책도 없이 물어서 오래 출출하신 당신을 찾아오신 대추벌 한 마리 불경스럽게 흐흐 그대 입술에 내려앉아 계시니
금동불상金銅佛像 당신의 입술이 야단스럽게 부으셨다
지리산 옆구리 깊숙이 좌정하고 계시는 당신이 대웅전 높은 단壇 입술 위에서 한참을 두리번거리던 참에
청상靑孀 어머니 오체투지五體投止의 절, 오호라 달게 받아 드시면서 아랫배 방긋 부풀고 있는 중인데
대리석 섬돌에서 심심하신 고무신 한 켤레 나른한 하품 졸고 계신다.
그 가슴 왈칵 실리는 햇살, 낮잠 한 번 길게 주무시는 섬돌을 찾아오신 바람이 처마 끝 매달린 풍경을 댕그랑 댕그랑 흔들고 계신다.
이곳 금대암 오늘의 처지가 이와 같으니
이쯤에서 당신의 입술이 무슨 말이든 한 말씀하셔야 하겠다.
(2)
천년 세월 비바람 비빔밥 비벼서 달게 잡수신 적송赤松 한그루, 어깨를 늘어뜨려 내려놓으신 팔다리 가지를 떠나오신 산비둘기 한 마리
또르르 굴러 떨어진 풍경의 말씀 한마디 부리에 물고 푸드득 날아오르다가, 금대암 사찰寺刹 앞마당 바람 많은 허공을 빙빙 돌다가
천년바위 바람 터진 잔등 뿌리 내리신 전나무, 그 놈 참 튼실하게 자라 싱그럽구나, 중얼거리면서
우듬지 휘날리는 머리칼 하산하는 당신이 있다.
…………,
지리산 산자락 이름도 그럴듯한 다래원多來園 식탁에 앉아 삼계탕 한 그릇 뚝딱 해치우고 계시는 사내
감출 수 없는 포만감飽滿感 졸음에 몰리는 동자승童子僧 동행同行의 아이를
그윽한 눈빛 지켜보고 계신다.
(3)
그때부터 수 천 년 세월이 흘러 지리산 옆구리 금대암 찾아오시는 사내가
수선화 같은 아내 한 분 모시고 와서
오체투지五體投止의 절, 108배拜를 달게 받아 드시다가
금동불상金銅佛像 하산下山하시다가
늙은 잣나무 그늘 드리우고 계신다.
그러니 그대는,
날 저문 뒤 차려지는 아내의 저녁 밥상에 여분의 수저 한 벌 올려야 하겠다.사람의 뇌경색腦梗塞이 모시고온 실어증失語症을 만나야 하겠다.
높은 단壇허공에 계시는 입술에 오늘도 불경스럽게 대추벌 한 마리 날아드셨으니, 그 입술 야단스럽게 부풀어 오르신 사내를 위하여
아랫목 구들장을 장작불 뜨끈뜨끈 지피는 것도 모자라, 뜨거운 숯불 화로火爐를 당신의 머리맡 신주단지로 모셔들여야 하겠다.
- 정태화 시집『내 사랑 물먹는 하마』(시산맥사, 2015)중에서
본명 정경화. 1958년 경남 함양 출생
1994년 계간 《시와 시인》 신인상 수상
2007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집으로 『선인장꽃은 가시를 내밀고 있다』 『내 사랑 물먹는 하마』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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