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하루를 만난 오늘 하루 / 김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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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960회 작성일 18-08-31 14:20본문
그날의 하루를 만난 오늘 하루
김길녀
폭염주의보 내려진 대서에 떠난 강원도행
늦은 점심에 나온 다슬기탕을 쉼 없이 먹습니다
식당 화단에 무더기로 핀 노랑다알리아는 한여름
땡볕에 공갈빵처럼 맘껏 부풀어 오릅니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낯선 자리
실없는 농담과 자욱한 담배연기 속에서 떠도는 웃음소리
해가 긴 계절 안에서 또 하루가 저물어갑니다
긴 여행 마지막 날, 이국 여자가 건네주던
눈 큰 인형과 유리 펜 한 자루와 한국어로
짧게 쓴 그림엽서 한 장
더 이상 어제를 기억할 수 없는 어느 순간에도
호명하게 될 당신이란 따뜻한 이름
줄 수 있는 게 가난한 마음뿐이라는 노래 들으며
마음조차 헐렁한 나는 빈 술잔만 만지작 거립니다
모든 신들을 모셔 놓은 검은 숲 숨겨진 사원
퇴고를 미루는 습작의 문장처럼
비밀상자에 넣어 두었던 상처의 봉인
조심스럽게 풀어내어, 말없이 당신 손
잡은 채 별무늬 석상에게 짧은 기도를 바칩니다
낡은 슬리퍼를 끌고 나온 익숙한 골목길
반쯤 열린 하얀 대문 안 외딴 방
녹슨 자물통을 어렵게 열었습니다
기울어진 이젤 위, 그리다만 당신의 뒷모습에
지워진 노래와 경건한 작별식
못 다한 이야기를 정성껏 그려 넣습니다
백야의 길고 긴 그 시절의 하루, 오늘
만난 늦은 하루와 함께 오랫동안 기억하겠습니다
- 《시인광장》 (2016년 8월호)
강원도 삼척 출생
1990년 《시와 비평》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키 작은 나무의 변명』 『바다에게 의탁하다』 『푸른 징조』 등
제13회 한국해양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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