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국가 건설기 1 / 박춘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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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1건 조회 3,543회 작성일 16-03-08 10:45본문
어떤 국가 건설기 1
박춘석
어느 시기가 되면 일제히 흩어지기로 약속하고 봄은 한 국가를 건설했다 햇살은 삶을 잡아 이끄는 힘이 있어 국가는 충만해져갔다 나와 가족도 대열을 따라 봄으로 갔다 삶이 자라거나 청춘이 시드는 때까지 야위고 왜소한 몸을 부풀리기 위해 수만 킬로의 봄을 건넜지만 우리 삶에는 꽃이 오지 않았다 백 번 천 번 그 이상 문 앞에서 봄을 두드렸다
하늘의 해는 평등했고 나와 가족들은 겨우 남은 해로 길을 비추며 걸었다 해가 부족해서인지 우리는 반쪽짜리 몸을 키운 탓에 제때 다른 계절로 건너가지 못했다 체류자라고 불리지는 않았지만 게으른 듯 덜 산 듯 같은 곳을 살았다 늘 시작점에 섰던 걸 돌이켜 보면 봄을 살았다고는 하지만 나와 가족들은 씨앗의 왜소한 몸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겨우 씨앗이 고지였던가 활짝 핀 꽃이나 무성한 숲 번영한 사람들을 보면 나와 가족들 속에는 진실이라는 뼈대가 없었던 건 아닐까 회의했다
왜소한 씨앗이 발아하면서 함께 자라야 하는 진실 우리의 뼈대 없는 국가는 봄의 식민지에 들었다가 나온 후 나와 가족들은 어느 해 어느 봄에도 살았었다는 기록이 없고 후세에 전해줄 꽃이 없었다 우리가 어떤 꽃인지 어떤 빛깔인지 어떤 향기가 나는지 알지 못했다 우리의 몸에 봄에 대한 여행기만 여백 없이 기록되었다
경북안동 출생
2002년 《시안》등단
2013년 요산문학상 수상
시집『나는 누구십니까?』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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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이깊으면멋님의 댓글
맛이깊으면멋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봄이라는 국가에 대한 자조와 한탄
처음 읽어나가며 나에 대한 지적이라 생각되어 여러 번 읽게 되었다.
햇살을 잡아 이끄는 힘이 있어 충만해지는 나라, 나와 가족은 봄으로 따라갔다.
씨앗의 몸을 부풀리기 위해 수만 킬로의 봄을 건너 백 번, 천 번 그 이상 문 앞에서 봄을 두드렸으나 씨앗을 부풀리지 못한 채 다른 계절로 건너가지 못했다.
왜소한 씨앗이 발아하면서 함께 자라야 하는 진실이라는 뼈대 없는 국가는 봄이라는 식민지에 들어섰지만 그 어느 해 봄에도 살았었다는 기록이 없고 이렇다 할 꽃도 피우지 못했으므로 후대에 전해줄 아무것도 지니지 못했다.
봄을 제대로 살아 훌륭하게 활짝 꽃을 피워 무성한 숲을 이룬 번영한 사람들을 보면 그러지 못한 나와 가족을 비탄해 한다.
조세희의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을 보는 듯도 하다.
어찌 보면, 빈부의 격차는 물론 사회적이나 제도적으로나 평등함을 보장해 주는 국가의 기본 질서가 제대로 작동, 가동되어야 한다는 진실이 구현되지 못하고 있다는 사회 비판일 수도 있으나, 이것이 비난으로만 들리는 건 나의 오해 탓인가, 다소 조심스러운 우려를 갖게도 한다.
이 시에서의 봄이라는 것이, 재물적 성공이라는 개념으로만 여겨지는 것은 나의 편협한 속물성에 기인하는 것은 아닌지 이해를 구한다.
2020.05.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