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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이 / 저녁의 감촉 외 9편

페이지 정보

작성자 profile_image 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4건 조회 10,945회 작성일 17-10-03 18:53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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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마을 10월의 초대시인으로 이선이 시인을 모십니다. 


이선이 시인은  1991년  문학사상》으로 등단하였으며,

시집으로 서서 우는 마음』과  평론집 생명과 서정, 상상의 열림과 떨림등이 있습니다.


시인은 따뜻한 서정을 바탕으로 삶의 본질과 희노애락을  함축적으로

표현해내는 능력이 뛰어나며, 사소한 일상이 주는 소중함을 진지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계절 가을을 환하게 밝히는 시편들과 함께 넉넉하고 풍성한 가을여행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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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의 감촉 외 9편 / 이선이

 


노인이 공원에 앉아 호주머니를 뒤적거립니다

어두워질 때까지

손을 더 깊이 넣어 무언가를 찾습니다

꺼내는가 싶더니 다시 넣어

만지작만지작합니다

   

바람이 숲을 뒤적거리자 새가 날아갑니다

새가 떨구고 간 깃털을 땅거미에 곱게 싸서

바람은 숲의 호주머니에 다시 넣어줍니다

바람과 숲을 버무려 노인은 새를 만듭니다

 

호주머니가 헤지고

저녁은 부드럽게 날아갑니다

 

 

 

 

운우지정雲雨之情

 

  

뒤꼍에서

서로의 똥구멍을 핥아주는 개를 보면

개는 개지 싶다가도

이 세상에 아름다운 사랑이란 저리 더러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머물러서는

마음도 미끄러진다

평생 바람처럼 활달하셔서

평지풍파로 일가一家이루셨지만

그 바람이 몸에 들어서는 온종일 마룻바닥만 쳐다보시는 아버지

병수발에 지친 어머니의 야윈 발목 만지작거리는 손등을 희미한 새벽빛이 새겨두곤 할 때

미운정 고운정을 지나면 알게 된다는

더러운 정이라는 것이 내게도 바람처럼 스며들곤 했다

 

그런 날 창 밖에는 어김없이 비가 내려

춘향이와 이도령이 나누었다는 밤이 기웃거려지기도 하지만

그 사랑자리 지나고 나면

아픈 마나님 발목 속으로

불구의 사랑 녹아드는 빗소리에 갇히기도 하는데

 

미웁고 더럽고 서러운 사람의 정이란 게 있어

한바탕 된비 쏟아내고는 아무 일 없는 듯 몰려가는

구름의 한

이제금 나는 가만히 머금어 보곤 한다

 

 

 

 

여름의 입맛

 

  

때 절은 난닝구에 쪼그라든 뱃가죽 감춘 채

밥보를 들추며, 노인은

나귀 뒷걸음질로 주저앉는 노을의 궁둥이를 파리채로 후려친다

적막이 붉고 어둡게 달아오른다

 

냉수에 찬밥 한술 말아 삼키는 밥상머리

밥 알갱이 둥둥 떠다니는 사기그릇에 얼굴 드리우고

세월이 생각을 오물거린다

허기가 푹푹 찐다

 

먹다 남은 밥풀에 파리떼처럼 달라붙던 식욕들

세월의 문짝 들락거리며

얼거니 녹거니

성에 낀 어스름이 쌉쓸하다

 


 

돌에 물을 새기다

-박수근미술관에서 

 

  

  내가 사는 별의 저편에는 물로 집을 짓는 여인들이 있고이름 모를 어느 계곡에는

물을 연주하다 잠드는 느릅나무가 있고

  

  내 이웃에는 하늘에 연못을 파고 물을 져 나르다 연애를 놓쳐버린 정원사가 있고,

물의 혈맥을 찾아 어두운 땅속을 헤매다 시력을 잃어버린 수맥탐지가도 있지만

 

  늦가을 강원도 양구 언저리에서 돌에 물을 새긴 이를 만날 줄이야

  

  그가 두레박 같은 손을 뻗어 돌 속에 여울물 쟁일 때면, 근처 오래된 사찰에서는

 강에 달을 새기다 입적한 선승의 부도浮屠에서 물소리 세찼다는데

  

  평생 다른 사람의 자서전만 대필하다 죽은 글쟁이는 남을 문장에 새기느라 자기를

잊었고, 일생 제 나이만큼의 아기를 낳은 여자는 아기를 낳느라 제 어머니를 기억하지

못했다지만

 

  죽은 짐승의 피눈물 가슴에 새기느라 모진 칼날 견디는 정육점의 도마처럼,

가난하고 어질어 물 같이 살다간 이들 추모하느라 평생 돌가슴에 사포질을 해댄, 그는

미석美石이라는 호를 가졌다 했다

 

     

 

헛제삿밥을 먹으며

   

 

진주 남강 저녁물결 무릎에 앉힌 채 어스름과 겸상하고는

죽은 자가 진설하는 밥상을 받아듭니다

누군가 칠흑을 덧입히는 서쪽 하늘에선

바람이 노을에 목물 끼얹는 소리 소란스러워 내 귓불 붉어지고요

서녘에서 흘러드는 물소리에 놀란 듯

적막이 씹다 남긴 꽃잎들 기울어진 담장 밖으로 오르르 몰려들 갑니다

복사꽃 꽃술 닮은 저승의 어머니는 지는 꽃잎 소복이 담아 저녁상을 차려내시고는

어두워진 강물에 줄배를 띄워 어린 나를 불러들이네요

강바닥에 발이 묶여 신열 앓는 물풀들의 신음에 내 목젖은 빨갛게 부어오르고요

당신은 이승의 봄앓이 따위는 아예 모르는 양

놋수저가 내는 기척을 공손히 어둠 속으로 받아 넘기시네요

보일 듯 보이지 않습니다

나는 신위神位 처럼 반듯하게 앉음새를 고치고는

저승까지 흘러갈 먼 물소리에 찬밥 한 술 말아 서둘러 삼켜봅니다만

당신은 저무는 강에서 건져 올린 젖은 세월 우물거리며

내 수저 위에 은하를 건너온 살별 하나 얹어주고는요 그윽한 눈매로 달을 그려 내시는군요

생전의 봄밤이 남강의 수면 위에서 한없이 뒤척입니다

저 강물을 다 마시고도 채워지지 않을 봄날의 허기를 어쩌지 못해

나는 수저를 들어 배냇짓하듯 저승의 봄밤을 한술 떠서는 삼켜봅니다만

당신은 하늘로 흘러드는 강의 속물살을 어루만지듯 내 이마를 짚으며

비워낸 밥그릇에 다시 연분홍 꽃잎을 고봉밥으로 담아냅니다

그러고는 꽃밥 한 그릇에 배불리고 가는 봄바람에 떠밀려

스웨터단추만한 꽃잎 한 장을 내 등에 가만히 붙여주고 저만치 멀어지네요

나는 양수에 잠긴 태아처럼 몸을 옹그리고 앉아

꽃들의 사자밥을 죽은 어머니와 말없이 나누어 먹습니다

고향 다녀오는 길

늦은 저녁밥을 먹으며 바라본 남강의 밤물결은

봄이 차려내는 조촐한 제상입니다

저승의 어머니가 손수 차려주시는 꽃밥상입니다

 

 


 

순간들

    

 

번호표를 뽑아들고 세상의 호명을 기다려 본 자는 알리라

낯선 운명의 틈바구니에 끼여 울적스런 얼굴로 서면

문득 전신마취에서 깨어나는 얼얼함이 있어

창밖에는 봄바람 가을비 몰아치고, 거기

누군가를 애타게 부르는 물컹한 비린내 번져난다는 것을

언제나 나만 비껴가는

단 한 번의 낮고 단호한 호명을 기다리는 동안

내 손에 잡힌 무엇보다 확실한 기다림을 잊기도 한다는 것을

 

세월은 망각의 텃밭을 일구며 아이의 엉덩이에 살을 올리고

물오른 젖가슴을 말린 건포도처럼 쪼그라들게 하지만

길은 부어오른 발등 격류에 던져 놓고

내가 도망쳐 나온 이탈의 길목이 어디쯤인지

지금 기다리고 있는 것이

끝끝내 기다려야 할 그 무엇인지 말해주지 않았으니

 

어쩌면 면박 당하듯 서 있는 이 시간이

어떤 기억으로도 환생하지 못한 무수한 내 전생이거나

오지 않을 단 한 번의 호명을 기다릴 줄 아는

숨죽인 마음의 백만 년이거나

내 가슴에서 빈 기다림의 번호표를 뽑아갔던 단 한사람의

기억되지 못한 일생一生은 아닐는지

 

이렇게 번호표를 뽑아들고 멍하니 서서 바라는 것은

더는 세상에 구걸하지 않는 묵묵한 얼굴로

한 벌의 생을 완성하는 일

부드럽고 따스한 기다림의 안감을 덧대고는

붉고 뜨거운 혀끝에 그대의 이름을 새기는 일은 아닐는지

 

 


 

반달

     

 

품으러 가는 마음도

버리고 가는 마음도

무겁구나, 당신

 

꽃기운에 열린

속꽃모양

속내이야길랑

사내이야길랑

 

한 반생은 비내리고

한 반생은 흐벅져서

 

한움큼 어둠으로나

다독이려나

버거운 그리움의 능선을 닮은,

  

당신

      


    


에피쿠로스의 정원

    

 

플라타너스 그늘 아래

 

농담을 즐길 줄 아는 오후를 펼치고

깍두기 한 접시

소주 서너 병 놓인 자리 오가며

천천히 말을 거두어가는 햇살들

너무 깊지 않은 그늘 공평하게 나누어

은박돗자리 빛나고

 

구름이야 있어도 없어도 좋은

봄날

 

서로의 빈잔 채워주는

침묵을 나누는 일

침묵으로 담을 둘러

정원을 만드는 일

 

페이스북에도 카카오톡에도 옮겨지지 않을

빈둥거림으로

 

결코 포기하지 말아야 할

건배를 위해

 

사소하고 시시한 소주잔 몇 개를

우리는 가꾸어야하리

 

 


머그잔에도 얼굴이 있다

                            

 

마시던 커피를 반쯤 남겨두고

밋밋한 테이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아무도 일하지 않는 시간이 세계를 업어간다

 

비워진 유리창

 

넓은 오후의 이마에 햇빛들 가지런히 번지고 

단정한 머그잔에 얼굴이 어른거린다

 

들여다보니, 없는 세계를 구하려고

깨알만한 벌레 한 마리

필사적이다

침묵하는 몸이 내지르는 비명*

 

아무도 구원해주지 않는 세계를 기억하라고

사이렌의 혀가

구월의 이마에 비명을 새겨놓는다

 

커피는 뜨거워지고

얼굴은 차가워지고

 

머그잔 속은 더없이 평화로워

커피는 곤혹이 깊다

 

근처 이슬람사원 쪽으로

유리창은 테이블을 돌려놓는다

   

 *알란 쿠르디의 주검을 카메라에 담은 사진기자 닐뉴페르 데미르의 말에서 빌려옴.

 

 

   

꽃빛의 내력來歷

 

 

꽃빛이 서로 다른 이유가

사랑을 나눈 대상이 달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랑을 아직 몰랐던 탓

춘분 지나

꽃봉오리 아린 패랭이꽃 화분을 사온 뒤

꽃빛의 비밀을 비로소 짐작하게 되었다

 

쪽으로만 드나들어 심하게 기울어진 문지방에 앉아

누군가를 향해 간절해져 본 사람이라면

꽃빛의 내력을 모른다고 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암술과 수술이 만나는 순간까지

햇빛 달빛이 벙어리 냉가슴 속을 들락거린 사연을

한 마디로 사초史草에 기록할 수는 없는 일

식물의 가계도를 연구하려면 꽃들의 그리움, 그 연애의 풍문에 민감해야 한다는

어느 식물학자의 말을 떠올려 보면

내 귀가 꽃빛에 달구어지는 이유도 짐작할 만한데

 

어느 밤인가

별빛 다 스러진 새벽까지 꽃을 들여다보느라

풍문으로 쓴 야사野史마저 설핏 잠든 사이

 

패랭이는 꽃 속으로 나를 옮겨 심고 있었던 걸까

꽃은 그렇게 나를 들여다보느라

밤새 다른 꽃빛으로 깨어나고 있었다

     

  ==================

 1991<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 서서 우는 마음, 평론집 생명과 서정,상상의 열림과 떨림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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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임기정님의 댓글

profile_image 임기정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한편 한 편 내려가 읽다
어느새 꽃빛의 내력來歷 까지 읽고 말았습니다,
귀한 시 너무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감사드립니다,

노트24님의 댓글

profile_image 노트24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시인님안녕하세요


은하를 건너온 살별 하나 얹어주고는요
그윽한 눈매로 달을 그려 내시는군요

어머님의 꽃 밥상
어쩌지 못하는 그리움...

명절 끝이라 그런지
보고픈 어머님입니다

부족하나마

영상시방에 시인님의 에피쿠로스의 정원
올렸습니다

이쁘게 보아 주세요^^

감사합니다()

박해옥님의 댓글

profile_image 박해옥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이선이시인님 명절은 잘 쇠셨는지요^^
부산스런 연휴를 보내고 모처럼 들어와 시인님의 시를 다 읽었습니다
시 한 편 읽고 시인님 얼굴 한 번 보고 그랬네요
어쩌면 이리도 좋은 시를 쓰셨을까 감탄 하고 존경합니다
그러나.
제 자신이 무척이나 실망스러워서.
시를 계속 써야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 많이 됩니다
시인님의 시를 읽고 용기를 얻어갑니다
시인님의 시를 읽고 근심을 얻어갑니다
항시 건강하십시오

대왕암님의 댓글

profile_image 대왕암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이선이 시인 선생님 반갑습니다
선생님이  정성으로 만들어 올려주신 예쁜 글 잘 읽어 깊은 감상 잘하고 갑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더 많은 글 올려주지면 감사합니다,
오늘도 건강하시고 즐거운 날 되시여 행복을 누리세요
선생님의 글 잘 모시고 갑니다 허락 해주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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