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한도 / 이경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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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湖巖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060회 작성일 18-06-25 05:26본문
세한도 / 이경교
텅 빈 움막은 속이 빈 악기다 새들이 울음을 쟁여놓고 떠난 빈집,
거기 나를 끌어들이지 마라
노송의 안쪽은 공명통을 부풀려 벌판의 침묵을 빨아들인다 슬그머니
늘어뜨린 가지, 저 손가락은 지금 무슨 음계를 짚는 중일까
벌판을 지나가면 남태평양까지 뻥 뚫린 항로
빈 하늘은 귀를 번쩍 세우고 있다
노송의 바깥은 칼바람이 엮어내는 진혼곡 가락이다
그 선율을 밟고 누군가 언덕 너머로 사라지고
나는 미끄러지듯 화폭에 발이 빠진다
지상의 한쪽이 슬금슬금 어두워진다
울던 새들은 어디로 갔나, 세상을 등진 나무의 슬픈 눈
텅 빈 울림판 위에 언 손가락 하나 얹어놓고
나는 여전히 침묵을 연주하는 중일다
저쨍쨍한 겨울 야상곡, 천둥 같은 울림
소리는 연신 소리를 밀어내어 길을 지운다
아무것도 없어 환하게 차오르는 벌판
거기, 내 발자국을 찾지 마라
* 이경교 : 1958년 충남 서산 출생, 1989년 <월간문학> 등단, 시집 <꽃이 피는 이유>
등 다수, 명지전문대 문예창작과 교수
# 감상
국보 제180호 인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그림에 대한 화자의 감상문이다
하얗게 눈덮인 정초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시골 풍경을 화자의 서정을 가미하여
현장감 있고 음악적 발상으로 묘사해 나가고 있다
낡은 집 한채와 소나무와 전나무가 뻥 뚫린 공간에서 풍기는 휑 한 쓸쓸함은 민족
특유의 정서이다
새들의 울음을 쟁여놓은 텅 빈 허공은 속 빈 악기이며, 노송의 안쪽은 한 여름 매미
울음 같은 탱탱한 공명통이다
노송의 가지가 칼바람 속에 엮어내는 가락은 진혼곡이며, 쨍쨍한 겨울의 야상곡,
맑고 청순한 그 선율을 밟고 누군가 언덕 너머로 사라지고 아득하고 먼 그리움 속에
화자는 미끄러지듯 화폭에 빠져든다
- 아무것도 없이 환하게 차오르는 벌판
- 거기, 내 발자국을 찾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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