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목 / 최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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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湖巖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888회 작성일 18-07-17 02:51본문
고사목 / 최을원
더 이상 오를 곳은 없다
푸른 살들은 남김없이 제단에 바쳐졌다
내게 깃들던 것들은
모두 허공 속에 둥지를 틀었다
그리움 마저 단단하다
그러나 나는 유년처럼 설렌다
천 개의 태양이 지나간 길들을 되집어
나는 내 속을 돌고 있다
머릿속까지 타들어 가던 그 작열의 정점에서
불러다오, 푸르러서 서럽던 것들아
찬란하던 새벽의 불면들아
유예의 시간은 길었다
나를 지나가던 벌레 한 마리
그 작은 떨림 하나까지 기록한 책장을
겨울 새떼들이 끝에서
끝으로 천천히 넘기고 있다
또 다른 길들이 오는 소리가 들린다
그래도 나는, 雪花 몇 송이로
상형문자 몇 자로
지금 버티는 중이다
누군가는 떠나고
누군가는 남아
오래 기억하고 싶은 저 맑은 햇살을
다시 찬찬히 들여다 볼 때까지,
자 벌레 한 마리
신의 손등 위에, 혹은 푸른 잎사귀 위에
슬며시 놓일 때까지
* 최을원 : 1961년 경북 예천 출생, 2002년 <문학사상> 으로 등단,
시집 <새와 함께 잠들다>
# 감상
벼락을 맞았을까? 영양 부족일까? 죽은 고사목에서 실타레처럼 풀려 나오는
내러티브가 화자의 내공을 짐작하게 한다
"더 이상 오를 곳은 없다 / 푸른 살들은 남김없이 제단에 바쳐졌다"
지난날 작열하던 그 푸르름을 과거의 한 생으로 기억, 이야기를 엮어나간다
나를 지나가던 벌레 한 마리의 작은 떨림까지도 하나의 책장으로 기록되어
천천히 넘기면 푸르러서 아름다운 것들이 아득한 옛날의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목탁소리 탱탱한 내 몸속에서 또 다른 생이 다가오고 있다
"雪花 몇 송이로 / 상형문자 몇 자로 / 지금 버티는 중이다 / 누군가는 남고
/ 누군가는 떠나는"
色卽是空 空卽是色, 無에서 有로 有에서 無로, 生은 돌고 드는것,
지나간 것은 모두 아름다운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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