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회용 봄 / 이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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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鵲巢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957회 작성일 18-08-16 00:21본문
일회용 봄 / 이규리
아물 때까지만 너의 이야기
일회용 밴드를 떼자 치사한 어제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이기적인 상처
자세가 좀 바뀌었지만
제 자리로 돌아온 셈이다
쓸쓸하단 말은 자유롭다는 말로 대신하기에 좋았다
흐,
고무풍선을 불 때도 뭐 우린 놓치는 걸 포함하니까
-어디서 다시 만나더라도 네가 날 피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그 말은 밴드를 붙였다 떼는 일처럼 가볍게 들렸다
이기적인 밴드
그래도 나는 계속 피할 것이므로
밴드 이후는 비교적 조용했다
우린 불행을 더 잘 믿었고
돌이켜보면 할 말이 많았던 때가, 제일 슬펐던 때였다
몇 개의 그늘이 저물며 지나가고
어떤 경우라도 잘 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진물로 꾸덕꾸덕해진 모서리가 몇 차례 피부를 그었던 기억도
피해 갔다
그때마다 밴드가 덮어주었으므로
너는 너를 보지 못했을 것이다
차창으로 온 4월의 눈발처럼
미움도 야위어 가는 날
죽었던 봄, 일회용 봄이 저기 또
鵲巢感想文
얼마 전에 일입니다. 환경부에서 일회용품 사용 규제안을 내놓고 어기면 과태료를 매기니 연기니 뭐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카페를 하다 보니 좀 민감하게 들었습니다만 일회용품을 전혀 쓰지 않을 수 없는 것도 업계의 말입니다. 그러나 카페 내에서만이라도 일회용품을 자제하자는 말이겠죠. 한날 일회용품이었던 빨대가 거북이 코에 끼어 있는 것을 보았는데요. 참! 할 말이 안 나옵디다. 이러한 것을 보면 규제뿐만 아니라 생산 자체를 금하는 것이 맞겠죠. 일회용품이 우리 경제에 얼마나 기여하고 또 영향이 있는지 분명한 실태조사가 먼저 있어야겠지요.
詩人 이규리 님 詩를 봅시다. 전에 詩人의 詩 ‘비유법’을 읽고 감상한 적 있었습니다. 정말이지 가슴 서늘하게 읽었던 적 있었습니다.
여기서는 시제가 일회용 봄입니다. 뒤에 봄이라는 글자에 생각을 좀 담아야겠습니다. 봄인지 본다는 동사의 축약형인 봄을 말한 건지 말이에요. 다른 장르라면 그냥 봄이라 허심탄회하게 보겠습니다만, 詩에서는 무엇이든지 다르게 돌려 보는 습관을 가져야겠지요. 아물 때까지만 너의 이야기, 아문다는 것에서 굳은 세계관을 들 수 있습니다. 당신은 아물겠지만, 아물고 나면 나는 버려지겠지요. 그러니까 아물 때까지 나의 이야기는 너의 이야기도 된다는 얘기입니다. 일회용이며 밴드며 빨대죠.
일회용 밴드를 떼자 치사한 어제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한 행 건너뛰고 이기적인 상처라고 합니다. 상처가 어떤 事故로 생긴 것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앞에 이기적이라는 말에 어떤 결과물입니다.
자세가 좀 바뀌었지만 / 제 자리로 돌아온 셈이다 / 쓸쓸하단 말은 자유롭다는 말로 대신하기에 좋았다. 자세가 바뀌었다는 말은 주객이 바뀌었다는 말과 같습니다. 상처를 보듬은 밴드죠. 그러니까 원래 주인은 제 자리로 돌아온 셈인데 이건 버려진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제 역할은 이미 끝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쓸쓸합니다. 그러나 어찌 보면 역할이 없으니 자유로운 것과 마찬가지죠. 가령 시를 쓰겠다고 시집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시집 한 권 들여다보고 어떤 결과를 도출한 다음은 두 번 다시 거들떠보지 않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흐, / 고무풍선을 불 때도 뭐 우린 놓치는 걸 포함하니까 / -어디서 다시 만나더라도 네가 날 피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고무풍선을 분다고 모든 공기가 풍선 안에 들어가지는 않듯이 그 놓친 공기도 포함하는 것은 詩의 全能함을 묘사한 것에 불과합니다. 어디서 다시 만나더라도 네가 날 피하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말, 너 없이는 숨 쉴 수 없고 너를 피한다는 것은 곧 죽음이니까! 공기처럼 가볍지만 공기가 없으면 우리는 죽음만 있듯이, 그러나 밴드를 붙였다 떼는 일처럼 가볍게 대하는 것은 우리 인간의 행위입니다. 이기적인 상처를 겪고 이기적인 밴드를 붙이는 일 말고는 전적으로 시의 힘을 모르고 지내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래도 나는 계속 피할 것이므로, 나의 전능한 신, 시는 어쩜 이리도 피하시기만 하십니까?
밴드 이후는 비교적 조용했습니다. 그것이 잠깐은 치유라고 생각하겠지요. 읽지 않으면 불행뿐이었으며 돌이켜보면 할 말이 많았던 때가 제일 슬펐습니다. 시적 교감입니다.
몇 개의 그늘이 저물며 지나가고 그림자와 같은 표현이 지나가고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의 길입니다. 상처는 진물로 시작해서 하얀 세계를 긁은 마음처럼 기억은 피할 수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그때마다 밴드(일회용)가 덮어주었으므로 형님은 저를 알지만, 저는 형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차창으로 온 4월의 눈발처럼 희고 녹기 쉽고 죽음도 어렵지 않은 날, 미움도 야위어 갑니다.
죽었던 봄, 더디어 죽음을 맞이하였건만, 아! 저기 또 일회용 봄을 펼쳐 들고 있습니다.
아지랑이처럼 하늘 가득 매웁니다.
금시 또 죽고 말겠지만, 일회용 빨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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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리 1955년 경북 문경에서 출생 1994년 현대시학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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