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참 / 이수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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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鵲巢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836회 작성일 18-11-23 11:32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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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참 약속이 있다. 새 장갑을 끼고 이마를 짚어본다. 약속은 부끄럽다. 약속 옆에 누울 수가 없다. 이대로 식물군을 쏟아내는 식물과 함께 머무르고 싶다. 파란 물이 들 때까지 식물을 손으로 문지르고 싶다. 약속이 켜지면 아무 혀를 내밀어도 파랗다.
오늘은 참 성격이 없다. 오늘의 버릇이 없다. 무턱대고 유람선이 떠 있는 버릇을 갖고 싶다. 물보다 빨리 떠내려가는 유람선을 고백하고 싶다. 물이란 이미 폭파된 것이어서 그 속으로 들어갈 수가 없지 오늘 하루가 버릇이 되어서 그 속으로 들어갔으면
-오늘은 참, 이수명 詩 全文-
鵲巢感想文
가끔 이러한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言語의 記標와 記意의 분간을 떠나 새로운 언어를 사용할 때 그 언어가 새로운 世界를 그렸을 때 또 다른 문장과 새로운 의미의 단어가 창조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우리가 사용하는 표면적 단어에서 오는 어떤 혼돈과 문장에서 詩感은 어떤 중첩적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니까 하는 말이다.
위 詩에서 사용하는 단어와 시에서 느끼는 그 의미는 분명 다르다. 가령 약속과 장갑, 식물군과 식물, 그리고 파란 물, 성격, 버릇, 유람선과 폭파는 이들이 뜻하는 단어의 1차적 의미를 벗어난다. 가끔은 이들과 연계한 동사에서 뉘앙스를 잡아 낼 때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의미는 분명 詩的 世界觀이다.
우리가 종교를 가지듯 詩人은 시적 세계관에 놓인 하나의 파편들이다. 이들을 대체적으로 종합하면 하나의 유기물적인 어떤 모형을 형상한다. 그 세계에 詩人은 하루도 끊임없이 불경을 외거나 주기도문을 암송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마치 신에서 ‘ㄴ’을 걷어낸 것처럼 詩에 접근한다. 이것은 하나의 마음 수양이며 이것으로 하루의 안정과 생활의 밑바탕을 원만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詩는 하나의 충분한 문학 장르가 될 수 있으며 어떤 종교보다도 숭상할 가치가 있다.
이 詩에서 약속은 약속의 표면적 뜻과는 조금 다르게 쓰이고 있다. 다른 사람과 어떤 일을 어떻게 하겠다는 그런 의사표시로 쓰이는 것이 아니라 나(我)와 詩的 世界觀에 놓인 어떤 형상물과의 관계다. 그 형상물은 미완성의 가작이며 성숙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식물군으로 詩人은 깃대로 두었다. 이 식물군에서 식물을 곱씹다 보면 순수 절정체인 詩를 끌어올리는 것이 된다. 이것은 봉숭아 꽃잎을 손톱에 물들이듯 同化되는 과정이며 굳은 세계를 표상表象한다. 그때는 혀를 내밀어도 좋다. 이에 누가 대변할 것인가? 당당히 설 수 있는 自我와 完成의 妙味는 德의 世界를 이루니까.
성격과 버릇, 유람선도 참 재밌다. 어떤 규범적 생활관에서 벗어나고 싶은 우리의 생활관을 그려 넣기도 하면서 일탈과 더불어 오는 새로운 世界를 접하는 충동衝動 어린 詩 쓰기다. 自我가 미치는 세계는 이미 固定觀念으로 둘러싸인 하나의 벽과 같고 이 세계는 폭파하고 싶은 물을 대변한다. 정말이지 유람선을 타고 하나의 공간을 타파하면서 뻗어나가는 하록 선장 아니 여기서는 메텔이 좋을 것 같다. 마치 레일이 없는 레일을 따라 저 깊은 우주로 뻗어나가는 詩의 世界를 우리는 동경하니까! 참 성격 다 죽었다. 성격을 살리는 방법은 그것을 타파하는 것이며 버릇도 없는 무無 궤도적軌度的 삶이 오히려 창조의 삶을 엮어 낼 수 있는 건 아닌지 조심스럽게 피력披瀝해 본다. 잘 감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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