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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시로여는세상>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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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381회 작성일 18-10-18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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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하반기 시로여는세상신인상 당선작

 

항성 (4)

 

   박윤서

 

 

 

   작년 초여름엔 직사각형 액자 속 꼿꼿한 남자가 있어 나는 발길을 붙드는 그림처럼 뒷걸음질 쳐 다시 돌아오곤 했다. 반년이 흘러 겨울에 눈이 내렸다. 눈은 거울처럼 햇빛을 반사해 좁은 내 방을 구석구석까지 환하게 밝혔다. 거울 조각이 내렸어. 아니아니, 눈이 내렸어. 일어나봐. 그는 일어나자마자 뜨지도 못한 눈으로 두 팔부터 벌렸다. 나를 안았다.

 

   달은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한대. 항성도 아니고 행성도 아니고 지구 주위만 맴맴 도는 위성이라서 햇빛을 받아야 비로소

   어두운 밤도 낮같이 밝히는 달님이 되는 거래. 나는

   눈을 달이 기울면서 흘린 부스러기들이라고 생각했어. 먼 우주를 지나 지구에서 여행을 마친 눈송이. 첫 눈송이. 지상에

   맨 처음 떨어진 눈송이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프진 않았을까. 아마

   뼈가 부러졌을 거야. 현미경으로만 볼 수 있는 눈송이의 뼈가 산산이 조각조각 흩어지면 그 위에 다른 눈송이가 내려앉았을 거야. 솔솔. 펄펄. 너무 따뜻해서 녹아버렸겠지. 그렇게 껴안아 주는데

   따뜻해서 죽을 지경이었겠지.

 

   오늘은 그가 나의 흐트러진 뼛조각을 맞춰주었다. 그에게는 현미경이 없는데 맨눈으로도 뼈를 볼 줄 알았다. 눈송이처럼 솔솔 펄펄 내려앉았다. 쌓였다. 나는 지금 우는 게 아니야. 따뜻해서 녹고 있는 거야. 그 뒤로는 손을 잡고 아무도 안 밟은 곳을 골라 눈 위에 발자국을 남겼다. 그의 발자국 옆에 달처럼 맴도는 내 발자국.

 

   오후 세 시의 시침과 분침 사이에 그가 있다. 혀 밑에 웅크리고 있다. 분주한 남자가 발자국의 눈을 파낸다.

 

 

모르는 일은 쓰지 않는다

 

 

무심히 넘겼던 노래를 다시 들으며 무심코 울어버렸을 때

어둠을 뚫고 서울로 진입하는 지하철 끝 칸에 혼자 앉아있을 때

직선과 직선이 만나는 곳에는 필연적인 모서리가 생긴다는 것을 알았을 때

연락이 닿지 않을 때

인터넷 신문 사건사고란을 훑어볼 때

세상에 단어는 많지만 나의 단어는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그런데도 체온으로 데워진 이불처럼 간절해질 때

호두알을 깨던 망치를 빼앗아 머리를 내려치고 싶을 때

세상이 나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느낄 때

그런 부채의식이 몸살처럼 가득 차오를 때

손가락이 다섯 개인 게 가끔 낯설어질 때

그보다도 낯선 것은 내 이름임을 생각할 때

나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보다 받는 사람을 좋아하고

울리지 않는 핸드폰 붙들고 흘러가는 새벽을

손톱의 모든 잔물결을 좋아한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

빨래가 며칠째 두 팔을 벌리고 굳어가던 날

말도 못 하는 병신인 데다 말도 못 하게 병신이라고 소리치다가도

그래도 남의 인생을 훔쳐다 시랍시고 쓰는 저런 도둑놈보다는 낫지 않느냐며

화해하기가 무섭게 잠들어버릴 때

내가 나를 그렇게 알아갈 때

지금도 나는 머리를 달달 볶은 아줌마가 되어도 핑크색 립스틱을 사 모을 거고

그런 이야기를 부끄럽지도 않게 내 입술로 써 내려가는 중이고

세상에서 내가 절대로 훔칠 수 없는 나의 인생은 계속해서 요긴하게 쓰일 작정이므로

그런 일들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인공호수

 

 

밑바닥에는 아직도

주민들이 밭을 매고 집을 짓고 산다는 이야기가 있는

백이십삼 미터의 댐

 

햇빛에서 살아남은 이슬 한 방울이 그 위로 떨어지기라도 하면

세상은 온통 물바다가 될 것이라는

전설 같은 예언이 이곳에 있다

 

 

태초의 기억

 

 

   시골 할머니에게 마음의 병이 있었다는 사실은 넷이나 되는 자식들조차 장례식장에서 알았다 서울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뒤부터 엄마는 미친 사람처럼 바늘로 스스로를 찔러대는 버릇이 생겼다 나는 걸핏하면 엄마가 얹혔다 가족력이었다

 

   내가 서너 살이었을 때 우리 가족이 수원에서 살았고 아래층엔 몸이 아프지만 엄마에겐 다정했던 두 남매의 엄마인 아줌마가 살고 있었다는 얘기들은 죄다 나중에 들어서 알게 된 것들이지만 손에 기다란 파리채인지 뭔지를 들고서 달려드는 얼굴은 기억나지 않는 엄마와 안방 침대로 풍덩 뛰어든 나를 하얀 이불 속으로 숨겨주던 아빠와 기어코 나를 끌어내려던 엄마의 기억은 교과서에서 오려낸 삽화처럼 선명하다 그 집은 곰팡이가 너무 피어서 엄마가 기겁하며 이사를 가버리고는 영영 돌아가지 않았다고 하지만 나는 엄마, 아직도 가끔은 그 집으로 돌아가 쥐똥 묻은 것 같은 이불을 들치고 파리채로 엄마를 후려치고 싶어 그러나 마주 앉은 엄마는 몸을 동그랗게 웅크리고 나보다 더 커진 나는 엄마의 등을 두드리고 엄마는 구역질처럼 울어버리고

 

   엄마나 나나 사람을 중력 삼았다가 실패한 사람들이고 내일이라는 것도 잠들기 직전 먹는 한 무더기의 알약처럼 삼켜지고 떨어지고 내려보내는 것이겠지만

 

   이 좁은 방 한 칸마저 습기 같은 이야기들로 가득 차 건강한 폐가 갖고 싶어지고 등 떠밀려 내쫓기고 싶은 밤

 

   밀린 설거지를 한다

 

 

관계자 외 출입금지

 

 

당신은 지금 구 킬로짜리 드럼세탁기에 머리를 넣고 있다

당신은 십 분이 빠른 어제 아침 겨드랑이가 구멍 난 푸른 티셔츠만 입고 꿈 없는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당신은 모든 경의선 기차가 야경 속으로 다 사라질 때까지 성대가 터지도록 말을 걸거나 소리를 지를 것이다 마포대교를 두 발로 건너올 내일 밤

 

당신은 글이 무섭다 했으니

자두 맛 사탕을 양 볼에 물고서 몇 번이고 읽어주지

당신은 세상에서 귀가 가장 크다는 강아지를 준비해 주길

 

당신은 질투만큼이나 어렵고

당신의 갈색 베개만큼이나 푹 파였다

그럴 바에야굽기 직전의 비스킷이 되자

아직 완성되어버리기 전으로

 

사랑이 진부하거나 혹은 어제 입었던 옷만큼만 꺼려진다면

혀가 다 녹아 없어질 때까지 불러 주리라 등허리의

이름 없는 우물에 고인 자음과 모음을 퍼내며,

 

당신

구석진 어금니 위로 흐른 한 방울의 침 같은

 

 

⸺⸺⸺⸺⸺⸺⸺⸺⸺

박윤서 / 본명 박정은. 1993년 경기 출생.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2018년 하반기 시로여는세상신인상 당선.

 

 

              ⸺계간 시로여는세상2018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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