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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한국 현대시 - 박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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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2,187회 작성일 15-11-04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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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한국 현대시

박상천


1. 시와 불교의 존재론적 자유

시가 지향하는 바는 근본적으로 불교적 사유와 유사하다. 시는 언어를 통해 언어에 매여 있는 존재를 자유롭게 하려고 하고 불교적 사유도 또한 사고의 전환을 통해 존재를 자유롭게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불립문자 교외별전 직지인심 견성성불(不立文字 敎外別傳 直指人心 見性成佛)’이라는 선(禪)에 관한 불교의 게(偈)는 진정한 도(道)의 세계는 언어로서는 표현되지 않는, 언어의 바깥에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도가 언어로는 표현되지 않는 세계에 있다는 말은 언어의 한계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 언어는 근본적으로 사물을 구속할 수밖에 없다. 일상 언어는 사물과 사물을 분별하여 결정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일상 언어의 세계에서 ‘하늘’이 ‘꽃잎’이 될 수 없고 ‘그녀’가 ‘딱따구리’가 될 수는 없다. 그것은 일상의 언어가 지닌 ‘지시성’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상 언어의 세계에서는 ‘하늘’은 ‘하늘’이요, ‘그녀’는 ‘그녀’일 수밖에 없다. 일상의 언어 속에는 분명한 ‘분별’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일상의 언어는 무엇인가를 대신하는 지시적 기호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세계 속에서의 사물들은 ‘사물성’을 잃어버리고 사물들은 철저하게 언어에 의해 결정되고 언어에 구속당하고 만다.
그러나 언어가 일상의 세계를 벗어나는 순간, 즉 시의 세계에서의 언어는 사물을 구속하지 않는다. 언어가 사물을 구속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물과 사물을 분별하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시의 세계에서는 ‘하늘’이 ‘꽃잎’이 되기도 하고 ‘그녀’가 ‘딱따구리’가 되기도 하고 ‘나’는 ‘병든 숫캐’가 되기도 한다. 이처럼 시는 언어에 매인 존재들을 언어를 가지고 자유롭게 풀어 놓는다. 시의 언어는 결정된 의미에 매이지 않고 의미를 구속하지도 않는다. 시의 언어가 사물들을 자유롭게 풀어놓는다거나 시의 언어가 결정된 의미에 매이지 않고 의미를 구속하지도 않는다는 말은 결국 사물과 사물을 분별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시인은 시를 통해 독자들에게 자신의 사상이나 감정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 세계와는 다른 세계를 창조해 놓을 뿐이다. 독자 또한 시인이 창조해 놓은 세계와 접할 때, 시인의 의미에 구속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체험을 하게 된다. 따라서 시의 세계는 끊임없이 의미가 소멸하면서 끊임없이 의미가 새롭게 탄생하는 ‘제법생멸(諸法生滅)’의 현장이라고 할 수 있다. 시가 지향하는 세계는 언어에 의해 존재가 결정된 세계가 아니라 존재의 자유가 실현되는 세계이다. 시가 존재의 구속이 아니라 존재의 자유라 함은 불교에서 말하는 무심(無心)이요 무념(無念)의 경지라고 할 수 있다. 시는 존재를 결정하려고 하지도 않고 존재를 구속하려고 하지도 않기 때문에 우리는 시에서 결정된 존재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체험되는 세계를 만나게 된다.
시를 통해 새롭게 체험되는 세계란 어떤 세계인가? 우리의 주위에 있는 모든 사물들이 존재의 자유를 얻은 세계이다. 따라서 그 세계는 ‘무분별(無分別)’의 세계이며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불교는 그러한 세계를 ‘반야(般若)’의 세계라 부르고 시는 그러한 세계를 ‘창조(創造)’의 세계라고 부른다. 시는 언어를 가지고 언어를 파괴함으로써 존재의 자유를 성취한다면 불교는 ‘깨달음’으로 존재의 자유를 성취하는 것이 다를 뿐이다.
시와 불교는 이렇게 존재론적 자유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그 지향하는 세계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불교의 ‘게(偈)’가 시의 형태로 나타나게 되고 시가 근본적으로 선(禪)의 측면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시와 불교의 이러한 존재론적 유사성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 특히 불교의 선(禪)과 시가 존재론적인 측면에서 유사하다는 것은 현실과 도(道)의 관계 또는 현상과 본질의 관계에 많은 시사점을 준다. 즉, 우리를 구속하고 있는 현실이 본질의 세계는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인간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세계를 꿈꾸게 되고, 인간이 꿈꾸는 세계의 본질은 자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한국시와 불교적 사유

그러면 이제 시와 불교의 이러한 존재론적 유사성을 바탕으로 하여 한국의 현대시는 불교와 어떠한 관련을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본고의 근본 논지는 한국의 현대시가 불교적 주제를 어떻게 시화(詩化)하고 있는지에 관한 것이다.
이는 결국 따지고 보면 한국의 현대 시인들의 시적 사유에 불교가 어떻게 관련을 맺고 있는지를 밝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또 어떻게 보면 우리의 역사 속으로 불교가 들어온 이후 한국인의 의식과 무의식 속에 불교가 어떠한 모습으로 각인되어 있는가를 살피는 일이라고도 할 수 있다.
편집자가 요구한 본고의 주제는 ‘한국 현대시와 불교적 주제’였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불교시’의 범위를 어디까지로 잡느냐는 것이다.
먼저 두 편의 시를 살펴보도록 하자.

당신 앞에선 말을 잃습니다.
미(美)란 사람을 절망(絶望)케 하는 것
이제 마음 놓고 죽어 가는 사람처럼
절로 쉬어지는 한숨이 있을 따름입니다.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당신의 모습을 저만치 보노라면
어느 명공(名工)의 솜씨인고 하는 건 통
떠오르지 않습니다.
―박희진, 「관세음상(觀世音像)에게」 일부

바람으로 지나가는 사랑을 보았네
언덕의 미류나무 잎이 온 몸으로 흔들릴 때
사랑이여 그런 바람이었으면 하네
붙들려고도 가까이서 얼굴을
보려고도 하지 말고
그냥 지나가는 소리로만 떠돌려 하네
젖은 사랑의 잔잔한 물결
마음 바닥까지 다 퍼내어 비우기도 하고
스치는 작은 풀꽃 하나 흔들리게도 하면서
사랑이여 흔적없는 바람이었으면 하네
―김석규, 「사랑에게」 全文

위의 두 편의 시는 근본적으로 큰 차이를 보여준다. 앞에 놓인 박희진의 「관세음상(觀世音像)에게」는 직접적으로 불상을 시적 대상으로 삼고 있는 불교시 또는 찬불시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김석규의 「사랑에게」는 비록 시적 대상으로 불교적인 것을 택하고 있지는 않지만 불교적인 사유를 읽을 수 있는 시라고 할 수 있다. 전자를 쉽게 ‘불교시’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후자를 ‘불교시’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그러나 불교라는 종교 그리고 그 사상과 시의 연관성을 이야기하기 위하여서는 시적 대상으로 직접 불교적인 것을 택했느냐 택하지 않았느냐의 문제보다는 불교적인 사유가 한국의 현대시의 저변에 어떠한 모습으로 놓여져 있는가하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위에서 김석규의 「사랑에게」는 분명히 직접적으로 불교와 관련되는 그 어떠한 용어도 사용하지 않고 있지만 사유의 저변에는 분명히 불교적인 내용이 놓여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지나가는 소리로만 떠돌려 하네.’ ‘흔적없는 바람이었으면 하네.’라는 시적 화자의 새로운 삶에 대한 원망(願望)은 불교적인 사유의 한 가지인 제행무상(諸行無常)의 깨달음에 근거를 둔 초연(超然)을 추구하는 모습이며 무념(無念)과 무상(無相)의 경지에 대한 희구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한국의 현대시는 직접적으로 불교적인 대상을 다루지 않는다 할 지라도 그 저변에는 불교적인 사유가 짙게 깔려 있는 경우가 대단히 많은 것으로 보인다. 직접적으로 불교적인 내용을 다루지 않으면서도 한국의 현대시에 불교적인 사유가 깔려 있다는 것은 불교적인 사유가 한국인의 무의식에 크게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물론 노장(老莊)의 무위(無爲)의 사상과 불교의 공(空)사상의 유사성 때문에 한국인의 무의식 속에 깔려 있는 내용이 불교적인 것인지 노장적인 것인지를 쉽게 판단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한국인의 무의식 세계 속에는 그것이 불교적인 것이든 노장적인 것이든 삶의 본질적인 자유에 대한 희구와 염원이 짙게 깔려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현대시에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불교적 사유는 어떠한 것일까?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아무래도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상(諸法無常)’이라는 사유가 아닌가 한다.

지혜로와라 은행잎이여,
붓다는 가을날 어느 늦은 오후
세종로를 거닐며 내게
이렇게 일렀다.

시절을 마련할 줄 모르는 불자(佛子) 있거든,
하늬바람에 지천으로 떨어지는
저 은행잎을 보게 하라.

은행잎은, 높은 가지 끝에서 스스로의
알몸을 땅으로 떨어뜨림으로써,
나무로 하여 겨울을 살게 하고
그것으로 또 인간을 깨쳐 주느니,

아, 차바퀴 아래 저렇게 아우성치며 굴러가는 은행잎은
차라리 그 날 이 거리에 쏟아지던 데모대(隊)의 구보행렬(驅步行列)―

흰 눈을 뒤집어 쓰고 누렇게 매어달린 미련스런 은행잎을 보았는가.
자연(自然)의 이법(理法)을 따라 피고 질 줄 모르는 완명한 권자(權者) 있거든 깨쳐주라고.
―장 호, 「은행경(銀杏經)」 일부

어디론가 흘러가는 바람소리밖에 없던 허공(虛空)에 문득 고추잠자리 한마리가 나타나 팔천개의 눈으로 나를 내려다 보고 팔천개의 나도 그를 바라볼 때 허공(虛空)에서 부딪치는 우리의 눈길에 어느 위의 민들레 꽃씨가 뿌리를 내리며 그만큼의 꽃망울을 피워 흔들 때 마침내 부딪치고 부딪치던 우리의 눈길을 휘몰아오는 불길로 모든 것은 불붙어 슬어지고 허공(虛空)엔 꽃망울 흔드는 것같은 어디론가 흘러가는 바람소리만 남아
―박제천, 「어디론가 흘러가는 바람소리」 전문

만유(萬有)는 그 어떠한 것도 항구성을 가질 수 없다는 ‘무상(無常)’의 불교적 사유가 이들 시의 근저에 깔려있다고 할 수 있다. 장호의 「은행경(銀杏經)」은 ‘알몸을 땅으로 떨어뜨리는’ 은행잎을 보면서 삶의 무상함을 깨닫고 있다. 은행잎이 낙엽이 되어 떨어지는 지극히 평범하고 사소한 일에서 ‘자연(自然)의 이법(理法)’을 깨닫고 그러한 깨달음을 주는 은행잎을 ‘은행경(銀杏經)’이라 부르고 있다. ‘흰 눈을 뒤집어 쓰고 누렇게 매어달린 미련스런 은행잎’이 없듯이 우리들의 삶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말하여주는 것이며 불교에서 말하는 ‘자연(自然)의 이법(理法)’이란 다름 아닌 ‘무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박제천의 「어디론가 흘러가는 바람소리」 역시 ‘무상’의 사유를 잘 드러내고 있다. 눈길과 눈길이 만남으로써 ‘민들레 꽃씨가 뿌리를 내리며 그만큼의 꽃망울을 피우지만’ 결국은 ‘어디론가 흘러가는 바람소리만 남는’ 우리들 삶의 무상함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만남을 통해 이루어지는 생명의 탄생도 허공(虛空)에서 이루어지고, ‘바람소리’ 역시 허공(虛空)에 남게 된다. 이들 시와 같이 한국 시에는 삶의 ‘무상’에 대한 시적 사유가 드러나는 경우가 대단히 많다.
이렇게 삶의 무상함을 깨달을 때 나타나는 반응은 대개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그 하나는 허무주의에 빠지는 일이며 다른 하나는 삶에 대하여 초연해지는 일이다. 그런데 근본적인 불교의 사유의 방식으로 본다면, 만유가 영원하고 항구적인 것은 없다는 무상에 대한 깨달음은 초연주의로 갈 수밖에 없다. 불교적 사유에서 본다면 그것은 있음과 없음이 다르지 않고, 이것과 저것이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있음과 없음이 다르지 않고 이것과 저것이 다르지 않으며 삶과 죽음이 결국 하나라는 ‘생사일여(生死一如)’의 불교적 사유에서 본다면 무상의 삶을 허무하다고 보기 보다는 그러한 삶에 초연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국 현대시에 흔히 드러나는 ‘초연주의(超然主義)’는 이러한 ‘무상’에 대한 깨달음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섭섭하지는 말고
좀 섭섭한 듯만 하게,

이별이게,
그러나
아주 영 이별은 말고
어디 내생에서라도
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

연(蓮)꽃
만나러 가는
바람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엊그제
만나고 가는 바람 아니라
한 두 철 전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서정주, 「연(蓮)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전문

서정주의 「연(蓮)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는 죽음에 대하여 초연한 자세가 두드러진다. 죽음에 대한 이러한 초연한 자세는 현세와 내세를 동질적인 것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현세에서 내세로 건너가는 것을 ‘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섭섭하지는 말고 좀 섭섭한 듯만 하게’라고 초연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생사일여(生死一如)의 인식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 시는 현실로부터의 완벽한 초월을 꿈꾸기보다는 한편으로는 인간적인 삶에 대한 약간의 아쉬움을 남기고 있지만 결국 죽음 자체에 대한 자세는 초연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초연주의는 결국, 삶이란 영원하지도 않고 ‘무상’한 것이라 변화할 수밖에 없지만 그러나 이쪽에서 저쪽으로의 변화가 결국은 같다는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의 불교적 사유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닌가 한다.
한국의 많은 현대시가 보여주고 있는 초연주의는 초월주의와는 같지 않다. 초월주의가 현실 부정에 바탕을 두고 현실과는 완벽하게 다른 세계를 추구하는 공격적인 것이라면 초연주의는 현실과 또 다른 세계를 동시에 인정하는 그리하여 그 속에 인간적인 냄새가 배어 있는 포용적인 삶의 자세라고 할 수 있다. 삶에 대한 이러한 포용적 자세는 이것과 저것이 다르지 않다는 ‘불이(不二)’의 사유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다.

비록 우리가 가진 것이 없더라도
비록 한 점 없이
지는 나무 잎새를 바라볼 일이다.
또한 바람이 일어나서
흐득흐득 지는 잎새를 바라볼 일이다.
우리가 아는 것이 없더라도
물이 왔다가 가는
저 오랜 썰물 때에 남아 있을 일이다.
젊은 아내여
여기서 사는 동안
우리가 무엇을 가지며 무엇을 안다고 하겠는가
다만 잎새가 지고 물이 왔다가 갈 따름이다.
―고 은, 「삶」 全文

죽음을 ‘다만 잎새가 지고 물이 왔다가 갈 따름’이라고 인식하는 이러한 시적 사유는 한국인들의 삶과 죽음에 대한 초연함을 잘 보여준다. 삶과 죽음을 잎새가 지는 것처럼, 썰물 때 물이 빠져나가는 것처럼 담담하게 바라볼 뿐이다. 모든 것은 결국 내가 어떻게 바라보느냐고 어떻게 생각하느냐의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혜능(慧能)의 게(偈)에서처럼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기 때문이다. 불교적으로 본다면 삶과 죽음이라고 하는 것도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뿐이지 그것 자체가 어떤 상(相:성질)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어낸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생각은 불교의 깨달음의 세계란 결국 사고의 대전환을 일컫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사고의 전환을 통해 만남과 헤어짐이 다르지 않고 있음과 없음이 다르지 않고 나아가 삶과 죽음도 다르지 않다는 초연주의로 귀결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욕심을 놓고 돌아서면
사방에서 소리치고 있는 안개
안개 속에 떠 있는
無重力의 사랑을 본다.

돌아가리라
가진 것 다 돌려주고
이제야 몸 가볍게 시작하는
여행
휘적이며 휘적이며
조금씩 소멸해 가는
우리들의 매듭

돌아가리라
이른 아침
승천하는 맨살의 안개
다친 몸 거두어
비단 수건으로 닦아내고
이제
無緣의 들판에 돌아 가리라.
―강계순, 「안개 속에서」 一部

불교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세계는 존재론적 자유의 세계이다. 이러한 존재론적 자유의 세계는 무념무상의 세계이며 모든 것을 다 비운 무연(無緣)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현대시에서 ‘비움’의 미학을 노래하는 시가 많은 것도 결국은 이러한 존재론적 자유의 성취를 희구하기 때문이다. 강계순의 「안개 속에서」가 보여주는 ‘무중력(無重力)의 사랑’이란 무념무상의 경지에 대한 시적 희구라고 할 수 있다. 중력이란 결국 ‘연(緣)’의 무게라고 할 수 있고 그러한 ‘연’의 무게를 버리고 비우는 ‘무연의 들판’은 존재론적인 자유가 성취된 광막한 들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 글을 마치며

불교가 이 땅에 들어와 뿌리내린 이후 한국인들 의식과 무의식 속에는 불교적인 사유의 방법이 크게 자리잡고 있음이 사실이다. 그러한 정신의 뿌리는 개인이 부정한다고 해서 부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유전자와 같아서 끈질기게 우리의 사유의 방식에 영향을 주고 우리의 사유방식을 지배하고 있다.
몇 편의 시를 통해 한국의 현대시와 불교적 사유 방식에 대하여 고찰하여 보았다. 한국인의 정신의 근저에 놓여 있는 불교적 사유의 방식은 한국의 현대시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직접적으로 불교적인 대상물을 시적 대상으로 택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시인들의 의식의 깊숙한 곳에 놓여진 불교적인 사유는 근본적으로 시가 추구하고자 하는 존재론적 자유와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언어를 통해 언어의 구속을 벗어나 존재론적 자유를 성취하려는 시와 사고의 대전환을 통해 만상의 구속을 벗어나 존재론적 자유를 성취하려는 불교는 우리들 삶의 본질이 현실에 머물지만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시인, 한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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