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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모의 현실과 너그러운 말 - 황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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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2,158회 작성일 15-12-17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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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모의 현실과 너그러운 말

황현산

 

우리 시가 어느 길로 나아가야 하느냐고 묻는 사람을 종종 만난다. 나는 이런 질문을 별로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데, 이는 무엇보다도 그 질문의 진지성을 의심하기 때문이다. 대개의 경우 질문자는 머릿속에 그 대답을 미리 마련해 놓고 상대방의 찬반을 확인하려 할 뿐이다. 그는 우리 시가 쌍갈래길 앞에 서 있다고 생각한다. 한쪽에는 자연의 본질과 삶의 원형에, 더 정확하게는 그렇다고 생각되는 것에, 인간의 희로애락을 연결시켜 감동적으로 노래하는 이른바 전통적인 서정시가 있고, 다른 쪽에는 이미 확립된 가치와 정식화된 표현법 일체를 고발하는 가운데, 최소한 아랑곳하지 않는 가운데, 개인의 특수한 생각과 감정을 생경하게 드러내는 이른바 해체시가 있다. 질문자는 보통 첫 번째 길의 지지자이기에, 이 질문에는 두 번째 길로 몰려가는 ‘철없는’ 사람들에 대한 책망이 담겨 있으며, 때로는 그 철없음의 기세에 자신의 길이 막혀버리거나 과소평가되리라는 우려도 숨어 있다. 대답이 반드시 필요한 경우라면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모르겠다. 길을 찾느라고 시를 쓰는 것이 아니겠는가.” 내 대답은 대답의 회피가 아니라, 대답이다. 나는 이 대답 속에 중요한 것은 길이 아니라, 어느 길이건 그 길에 대한 성실성이라는 뜻을 담으려 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길은 두 갈래로만 뻗어 있는 것이 아니란 것을 이 대답으로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 자신이 모더니스트였던 김수영이 다른 모더니스트에게 ‘히야까시’하듯 내던졌다는 시 「공자의 생활난」에는 “이제 나는 바로 보마 / 사물과 사물의 생리와 / 사물의 수량과 한도와 / 사물의 우매와 사물의 명석성을”이라는 시구가 있다. “사물의 우매”는 필경 사물의 “생리”와 “수량”과 “한도”를 뭉뚱그리는 말일 것이다. 현실 속의 사물은 우리에게 인색하다. 그것은 무겁고 둔탁하여 움직이지 않으며, 움직일 기미조차 보여주지 않기에, 거기서는 어떤 희망도 고양된 감정도 기대하기 어렵다. 거기에는 특별하게 가치 있는 말이 없으며, 시가 없다. 반면에 “사물의 명석성”은 사물의 날카로움이며, 그 움직임의 예외 없는 법칙이며, 현실의 칙칙함과 인색함 속에 감춰져 있는 맑고 너그러운 언어이며, 한 마디로 시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 사물의 둔탁함은 지금 이 자리의 현실이지만 명석함은 거의 언제나 뒤늦게 깨달음의 형식으로만 발견된다. 그래서 김수영은 또 다른 시 「절망」에서 “풍경”과 “곰팡이”와 “여름”과 “속도”가, “졸렬과 수치”가, 그리고 “절망”이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지만, “바람은 딴 데서 오고 /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온다고 쓴다. 시의 길은 끝내 반성하지 않을 것 같은 현실과 저 예기치 않은 순간에 발견되는 명석성 사이에 있다. 그러나 이 말은 현실의 우둔함에 갇혀 사후의 명석함이 발견될 때까지 시가 기다려야 한다는 뜻은 물론 아니다. 바람이 “딴 데서” 온다고 하지만, 그 딴 데도 결국은 현실의 한 모퉁이일 뿐이며, “예기치 않은 시간”도, 어떤 명석한 정신에 의해서만 감지될 수 있다 하더라고, 현실 속의 한 시간일 뿐이다. 현실의 명석함이 그 우둔함 속에 있고, 예기할 수 없는 구원이 실은 결코 반성하지 않는 그 절망 속에 있다.

문학은 언어를 도구로 사용할 뿐만 아니라 언어에 모든 기대를 걸고 자주 언어를 목표로 삼기까지 하기에 어떤 예술 장르보다도 더 이성적이다. 문학은 가진 바 수단을 다하여 미지의 것을 파헤쳐 그 현상 하나하나를 말로 표현하려고 애쓰며, 혼란을 정리하고 분석하여 거기에 언어적 질서를 부여한다. 그러나 동시에 안다고 생각해 왔던 것이 실제로는 모르는 것임을 폭로하고, 그래서 질서를 혼란으로 전복하는 것도 문학의 일이다. 오만한 앎과 성급한 질서가 반성하지 않는 현실의 우둔함을 더욱 두텁게 할 때, 자각된 모름과 품 넓은 혼란이 명석성에 이르는 길을 더욱 넓힐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문학의 가장 효과적인 무기인 이미지도 그 가치는 양면적이다. 이미지는 한편으로 혼란과 미지에 언어의 초벌 그림을 그려주어 우리를 안심시키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친근한 얼굴을 낯선 얼굴로 바꿔 놓아 우리를 놀라게 한다. 이미지가 가장 아름다운 것도 그때이다. 우리가 문학의 어떤 비유체계를 가리켜 알레고리라고 부르며, 그것을 문학의 현대적 기획과 결부시킬 때, 그것은 저 두 번째 기능이 격화된 이미지와 다른 것이 아니다. 널리 알려진 이야기지만, 알레고리는 본질 자연에 내재된 것으로 생각되어온 상징과 다르다. 알레고리는 외적이고 임의적이다. 상징은 초역사적이고 통합적이지만, 알레고리는 시대적이고 파편적이다. 상징은 인류학적이지만 알레고리는 문화적이고 사적이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본질주의 시와 ‘미래파 시’의 갈등은 상징과 알레고리의 싸움이라고 부를 만도 하다.) 그러나 알레고리는 바로 이 약점에 의지하여, 본질적이고 튼튼하다고 믿었던 삶의 토대가 얼마나 허망하며, 그래서 존재가 얼마나 부박하고 비극적인가를 알게 한다. 알레고리는 질서 속에 혼란을 창조한다. 문제는 이 혼란인데, 삶의 비극성뿐만 아리라 새로운 가능성도 이 혼란 속에 있기 때문이다. 알레고리는 그 파편적 성질을 이용하여 현실의 고리가 거의 끊어진 자리에서 미래의 한 점을 향해 정신을 투기하고, 논리적으로 현실의 조건이 아직 성숙하지 않은 자리에서 그 현실의 질적 변화를 전망한다. 굳어진 현실이 한 치의 빈틈도 내보이지 않고, 말이 바닥나고, 논리가 같은 자리를 맴돌아 모든 토론이 무위로 돌아갈 때, 신비주의자들은 어떤 신화적 세계의 안개 속으로 걸어 들어가겠지만, 현실을 잊어버리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이 초라한 현실이 그 조건을 그대로 간직한 채 더 큰 현실로 연결되는 한 고리가 죽음 뒤에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낯선 얼굴로 나타난다. 현대시는 그 얼굴을 알레고리라고 부른다. 그러나 시인은 제가 쓰는 것이 알레고리인 것을 알지 못한다. 그는 현실의 한 면모를, 그것도 찌그러지고 조각난 형식으로 그렸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시의 신비라고 불러도 무방한데, 여기에는 전통적인 영감론과는 완전히 다른 의미에서 어떤 ‘대필 현상’이 있기 때문이다. 젊은 시인 김경주는 「대필(代筆)」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짧은 시를 썼다.

일기를 대신 써 준 적이 있고

군대를 대신 가 준 적도 있다

주인이 떠난 폐가의 마루 냄새를 맡고 밤이면 이름이 없는 먼 별에서 흘러내리는 모래를 혀에 굴리다가 죽은 바람은 자신의 장례를 단 한 줄의 밀사라고 불렀다

(시집 『시차의 눈을 달랜다』)

소식을 전해 줄 “밀사”가 “자신의 장례”라고 해서, 바람이 (또는 시인이) 그 소식을 듣지 못한다는 뜻은 아니겠다. 소식은 “폐가의 마루 냄새”에도, 메마른 영감의 “모래”에도 벌써 들어 있었지만, 그 소식을 깊이 뜯어 읽기 위해서는 정신이 죽음을 걸고 모험해야 한다는 뜻이겠다. 시인은 어떤 초월적이 존재의 말이 아니라, 이 현실에 발을 디디고도 벌써 다른 현실을 “살고 있는” 저 자신의 말을 대필한다.

산사와 외진 늪을, 강마을과 겨울 바다를, 티베트와 인도를 찾는 시인들이 많다. 아마도 시인들은 거기서 창조된 자연 너머에 있는 창조자로서의 자연을 보려 할 것이다. 사실 시는 현실보다 더 큰 현실이 있고, 자아를 넘어서는 또 하나의 자아가 있다는 것을 잊은 적이 없다. 현실에 ‘붙잡혀’ 있는 시일 수록 더욱 그렇다. 더 큰 나를 무의식이라고 부를 때, 그 무의식을 집단 무의식으로, 역사적 무의식으로 경계를 넓힐 때, 거기에는 다른 여러 의도 가운데 이 작은 삶과 큰 삶을 연결시키려는 의도도 들어 있다. 물질의 신비도, 역사의 신비도 결국은 현실의 신비이다. 말이 한 자아에서 다른 자아를 보게 하여 두 개의 삶을 연결하는, 논리가 제 장례를 치르면서 논리 너머를 끌어안는 시의 신비도 그와 다르지 않다. 산사와 강마을이, 티베트와 인도가 중요하다면, 그것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삶의 원형과 미래의 평화가 거기 있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삶의 극단을 나타내고, 상상력의 한계를 점찍는 이미지들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이 극단과 한계를 하나의 알레고리로 체험하지 않는다면, 어디에서나 마찬가지로 그 ‘근본의 땅’에도 지금 초라하고 영원히 초라할 삶과 개인들이 있을 뿐이다. 여기 없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애석하게도 현실 밖에는 다른 현실이 없지만, 다행스럽게도 현실 속에는 또 다른 현실이 있다.

시가 순수한 언어를 지향하고 그것을 그 미의 근간으로 삼는다는 말도 우리는 같은 방향에서 이해한다. 역시 누구나 아는 이야기지만, 말은 사물을 이미 알려진 속성으로 한계 짓는다. 게으른 정신의 안이한 경험은 그것이 아무리 두텁게 쌓인다 하더라도 말과의 관계에서 사물의 한계를 넓히기보다는 그 한계에 더께를 입힐 뿐이다. 출구 없는 시간처럼 요지부동한 것이 되고, 마침내 제도가 되기에 이르는 이 더께는 당연히 주체의 말과 타자의 말을 가른다. 인정된, 따라서 더 이상의 반성이 필요 없는 주체의 말로 제도가 현실을 은폐하고 가둘 때, 사물의 현실이 지닌 다른 가능성의 조각난 얼굴이자 알레고리인 타자의 말이 억압될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시가 지향하는 바의 순수 언어는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억압된 말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또 하나의 현실에 닿기 위해 어떤 길도 가로막지 않은 언어이다. 사실, 말이 사물을 유연하면서도 명확하고 깨끗하게 지시하는 일에서 늘 실패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순수 언어에 대한 시의 소망은 저 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부정하는 언어에 이른다. 그러나 이 부정은 사물의 깊은 속내를 말로 다 드러낼 수 있을 때까지, 현실 속에 ‘숨은 신들’이 (다시 말해서 타자들이) 저마다 제 말로 말할 수 있을 때까지, 고쳐 말하고 다시 고쳐 말하려는 노력과 그 희망의 다른 이름이다. 부정의 언어, 곧 시의 언어는 늘 다시 말하는 언어이며, 따라서 끝나지 않는 언어이다. 모든 주체가 타자가 되고, 그 모든 타자가 또 다시 주체가 된다고 믿는 희망이 이 언어의 기획 속에 들어있다. 시는 꿈과 현실이, 상상할 수 있는 것과 상상할 수 없는 것이, 작은 나와 큰 나가, 비루한 사물과 너그러운 말이, 불모의 현실과 생산하는 현실이 갈등하기를 그치는 자리가 우리의 정신 속에 있다고 믿는다. 시의 길이 거기 있다기보다는 시가 그 길을 믿는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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