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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말, 줄임말, 늙은말 - 김병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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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2,477회 작성일 16-01-28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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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말, 줄임말, 늙은말

 

김병익

 

지난여름. 마른장마 속에서 나도 바캉스를 다녀왔다. 게으른 내가 바다나 산으로 간 것은 아니었고 여전히 거실의 선풍기 앞에서 책으로 시간여행을 한 것이다. 복거일의 6권짜리 대작 <역사 속의 나그네>를 따라 16세기 중세 조선 속으로 들어가 주인공 ‘이언오’의 ‘지적 무협’ 활동을 영화처럼 즐겼다. 이 소설은 젊고 머리 좋은 주인공이 2070년 시낭(時囊)을 타고 6500만년 전의 고생대로 여행하는 중에 16세기 충청도 아산 근처에 불시착해서 조선조 농경사회 속에 끼어들어 조금씩 현대적 제도와 문물을 도입하는 과정을 그린 것이다. 그러니까 과학소설이기도 하고 역사소설이기도 하지만, 주인공이 이방인, 도망자, 귀화인, 장인, 경영자, 모반자, 혁명자 등 갖가지 소임을 발휘해야 할 만큼, 시차가 큰 과거의 다른 시대 속으로 들어가 일해야 하는 어려움이 작가의 부드러운 정신 속으로 맞춤하게 녹아 있었다. 그가 21세기적 지식으로 5세기 전의 세계를 개선할 일은 의료, 무기에서부터 금융제도, 법체제 등 참으로 넓고 다양했다. 이 모든 개혁은 역사의 실제 진행을 훼손하지 않도록 ‘시간줄기’를 지켜야 했기에 더욱 까다로운 일이었다.

 

그런 중에 주인공이 농경사회의 전시대인들에게 갖가지 개선 방안을 지휘하면서 문득 자기가 사용한 말 속에서 “‘사태’니 ‘책임’이란 말들이 지금 이곳에서 쓰이기나 하는가”라고 자문하는 대목이 나온다. 오늘날 일상어가 된 이 말들을 5세기 전에는 사용하지 않았으리란 생각이 든 때문이다. 하긴 그는 ‘회사’ ‘보험’ 기구를 구상하고 있지만 도대체 그런 것들을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시절에 20세기에 들여온 사회 제도를 가리키는 용어를 이해할 리 없어 당시에 사용하던 ‘계’란 말로 대치해야 했다. 이 대목은 일본의 비교문화학자 야나부 아키라의 <번역어 성립사정>을 회상시켰다. 19세기 후반의 일본 유신 시절, 서구의 문물을 왕성하게 도입하면서 그 용어들을 어떻게 한자어로 번역할 것인가로 지식인들은 무척 고민했다. 가령 ‘소사이어티’는 교제, 반려, 집단 등 여러 말로 옮겨지다가 ‘사회’로 점차 정착되고, 젊은 남녀 간의 ‘러브’도 ‘연’(戀)은 성적인 것이고 ‘애’(愛)는 부모가 자식들에게 갖는 사랑이어서 적절치 않았는데 한 잡지가 그걸 ‘연애’란 신조어로 표현하면서 유행어로 번지기 시작했다는 것이 그 책의 설명이다. 여기서 새로운 사물이나 사태를 표기할 말을 결정하기까지의 과정도 흥미롭지만, “언어가 먼저 생기고 그에 맞춰 실제의 내용이 채워진다”는 저자의 관찰이 주목된다. 그러니까 서구적(그래서 현대적)인 ‘사회’며 ‘연애’ ‘자유’ ‘개인’이 실상으로 존재하지 않다가 서구 언어를 들여오면서 그 말에 맞는 실제적 사물과 현상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말씀이 먼저 있고 세계가 만들어졌듯이, 먼저 기표가 있고 뒤에 기의를 채워넣은 것이다. 언어 통제를 통해 사회 통제를 이룬다는 오웰의 <1984년> 속 ‘신어’(Newspeak)와 비슷한 논리다.

 

‘영어 공용화론’으로 논의를 일으켰던 복거일은 이런 언어 현상에 대한 문제들을 활용하면서 일본 식민통치 기간 중 우리말을 사용하지 못했기 때문에 반세기 동안 언어의 진화가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본다. “언어는 사회가 발전하는 대로 따라서 바뀌어야 생명력을 제대로 지녀갈 수 있는데 조선어는 그렇게 진화할 기회를 거의 반세기 동안 갖지 못했다. 그래서 조선어는 갑자기 늙어버린 언어가 되었다”(1권 125쪽)고 주인공은 생각한다. 이 작품은 특이하게 대화체는 조선조의 중세어(로 생각되는)의 말씨를 사용해서 읽어 알기 어려울 때가 자주 있지만, 다른 제도들과 기구들은 개선하면서도 정작 말은 쉽게 고치지 못하는 것도 표기와 표의의 일체화가 쉽지 않은 때문일 것이다. 짐작건대 전통의 우리말이 가장 잘 고수되고 있는 곳이 한말에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당해 러시아대륙에서 고립된 섬처럼 폐쇄된 사회로 살아야 했던 조선족일 것이고 지금은 아마 외부와의 교류를 최대한으로 억제하고 외래문물도 가능한 한 우리 고유의 말로 옮겨 쓰고 있는 북한 사람들이 전통 조선어에 가장 가까운 ‘늙은 말’을 쓸 듯하다. 그러나 가령 ‘어름보숭이’는 늙은 말로 새말을 만들어낸 흥미로운 예일 것이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같은 민족임에도 남한처럼 말이 빨리 변하는 사회도 드물 것이다. 해방 후 70년 동안 한국 사회는 한껏 다른 문화와 새로운 문물들을 적극 받아들였고 그 수용과 개발에 조금도 거리낌 없이 능동적이고 조급했다. 우리가 신문이나 책, 거리와 모임에서 보고 듣는 말들의 반 정도는 1945년 해방 후에 생기거나 들여온 어휘들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과학에도 매우 해박한 복거일이 이 작품에서 예상한 대로 1960년에서 2070년의 110년 동안 지식의 양이 2천 배 늘어난다면, 당연히 우리말의 어휘수도 엄청 늘어날 것이다(잃는 말도 상당히 많겠지만). 여기에 외국 언어 때문에 우리말의 문체가 달라지고 있다는 점도 덧붙는다. 가령 ‘보인다’ ‘된다’란 우리말의 수동태형 어휘가 있는데도 영어로 피동형 문장을 배운 젊은 세대들이 ‘-지’를 넣는 어법을 사용해 ‘보여진다’ ‘되어진다’란 이중수동태의 잘못된 말을 쓰고 있는 것이 그렇다. 내가 출판사에서 교정을 보면서 처음에는 눈에 띄는 대로 그 ‘-지’를 지웠지만, 그 표기가 너무 창궐해서 결국 내가 투항하여 저-역자가 쓴 대로 그냥 두고 말았다. 말의 활용에 표준 문법이 패배한 것이다. 최근 국립국어원이 ‘너무’란 부사를 긍정문에도 사용할 수 있도록 수정했다는 보도를 보며 으레 “너무 좋았어요”로 끝내는 말을 들을 때마다 못마땅해하던 내 고정관념도 이젠 수정해야 마땅하게 되었다.

 

김병익 문학평론가
김병익 문학평론가

 

 

내가 더 당혹해한 것은 짐작 못 할 새말들이 급하게 많아진다는 점이다. ‘강추’ ‘밀당’ ‘열공’ 같은 말은 앞뒤 문맥으로 겨우 알아챘고 ‘돌씽’ ‘썸타다’는 자식에게서, ‘자기 경멸’의 ‘셀프디스’는 신문 기사로 배웠는데 우리말과 영어를 억지 축약했기에 그 뜻을 도저히 짚어낼 수 없었다. 근래 한 칼럼에서 “수포자는 대포자이고 영포자는 인포자”란 김삿갓의 희시(戱詩) 같은 말을 보고 어리둥절하다가 필자 이재현이 “수학 포기자는 대학 포기자이고 영어 포기자는 인생 포기자”로 풀이해주어서야 알아들었다. 바빠진 일상에 마음은 다급해진데다, 새 사물과 기술, 특히 디지털 정보기술의 급격한 확산 때문에 ‘젊은 말’이 가림없이 마구 생겨나 번지는 오늘날의 언어생활에서 나 같은 아날로그 또래는 ‘늙은 꼴통’이 되고 세대간, 집단간의 불통은 더욱 심해진다. 그 줄임말들에서 표의문자인 한자 약어는 쉽게 이해되지만 순우리말의 약어는 귀엽게 들리는 대신 알아듣기 까다롭고 영어와 뒤섞여서는 한참 고개를 갸웃거려야 한다. 이 신조어들의 상당수는 이미 신문에 버젓이 사용되고 있고, 권위 있는 옥스퍼드 온라인 사전이 분기마다 1천 개의 신어를 추가하듯이, 그중 많은 어휘들이 국어사전에 등재될 것이다. 현대생활에서 신조어, 약어, 축어, 속어, 은어, 합성어, 전문어 등 ‘젊은 말’의 개발과 확산은 피할 수 없는 추세이고 그래서 신어·약어 사전이 더욱 필요해지지만, 조어나 약어의 규칙과 논리가 없어 억지스럽거나 때로는 ‘악플’처럼 그악스러워 말의 품위를 떨어트리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니, <역사 속의 나그네>에서 듣는 우리 옛말의 느리고 정중한 말씨가 더욱 그윽한 정서로 다가온다.

 

김병익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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