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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왜 쓰고 읽고 가르치나? - 김재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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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2,815회 작성일 15-07-06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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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왜 쓰고 읽고 가르치나?
-김재홍 문학평론가. 경희대 교수.



1. 현대 · 문명· 문화 · 문학

오늘날 우리가 발붙이고 살고 있는 삶의 현장으로서 현대의 특질은 과연 무엇이며 어떠한가? 농경사회로부터 시작된 인류사는 어느 새 산업화 사회를 거쳐 정보화 사회를 줄달음쳐가고 있다. 그만큼 급 새 산업화 사회를 거쳐 정보화 사회를 줄달음쳐가고 있다. 그만큼 급속히, 또한 눈부시게 인류ㅡ이 문명은 지보하여 인간의 생활을 편하게 하지만 또한 그만큼 불안하고 왜소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일컬어 현대를 불연속의 시대, 불확정성의 시대라고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불연속의 시대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그것은 물질문명의 과도한 발달과 산업화의 촉진, 대도시화의 추세로 인하여 자아와 세계, 인간과 자연이 연속되지 못하고 끊어져버린 모습을 말한다. 자아에 비해서 외부의 세계, 정신에 비해서 물질세계가 지나치게 거대화하여 자아는 세계에, 정신은 물질에 종속되고 짓눌려버림으로써 단절과 소외를 겪을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그러기에 자아와 세계, 정신과 물질 사이의 등가화(equalization) 또는 자아의 주체화(identification)를 획득하는 일이야말로 오늘의 삶에 있어서 가장 긴절한 명제가 아닐 수 없다. 또한 불확정성의 시대란 무엇인가? 그것은 물질문명, 과학기술의 발달은 물론 거대 산업자본의 팽대화로 인해 오히려 인간의 미래는 더욱 불안정하고 예측하기 어려운 것이라는 위기의 인식을 말한다. 물질문명이란 인간이 편리하게 살기 위해 고안하고 발달시켜온 것이지만, 동시에 그 과도한 발달은 인간에게 있어 정신문화의 위축과 불안감을 고조시켜온 것이 사실이라고 하겠다. 물질문명과 산업의 거대화로 인해 빈발하는 각종 대형 재해와 사건사고가 바로 그러한 불확정성 시대의 인간상실 현상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고 그 무엇이겠는가. 물질가치를 추구하는 문명의 속성이 정신가치를 추구하는 문화현상을 함께 섭수해 들이고 발전시켜오지 못한 필연적인 귀결이 아닐 수 없다고 하겠다.
따라서 오늘날 문화가 그러한 것처럼 그 문화의 핵이자 정수라 할 수 있는 문학이 하나의 위기의 시대에 처해 있다는 것은 자명한 이치가 아닐 수 없다. 인간의 위의를 지키고 인간정신의 승리를 진지하고 깊이 있게 탐구하는 형식으로서 문학은 자본주의의 격랑에 밀려 좌초할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이다. 값싼 대중문화와 상업자본의 폭력 아래 진정한 문학, 순수한 인간탐구의 문학은 점점 뒷전으로 물러나고 위축돼갈 수밖에 없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라 하겠다. 문학의 위기란 바로 인간의 위기이며, 인간정신의 위기가 아닐 수 없다. 이 점에서 오늘날 문학다운 문학, 참문학정신의 확립과 회복이야말로 현대가 처한 불연속성과 불확정성에 맞서 인간성을 수호하고 인간의 정신가치를 고양시킬 수 있는 소중한 관건이 아닐 수 없겠다.

2. 산문정신과 시 정신

그렇다면 이러한 문학다운 문학의 핵심으로서 참 문학정신을 오늘에 회복할 수 있는 길은 어디에 있을 것인가? 그것은 바로 문학의 근본정신을 회복하는 일이고, 그것을 오늘의 현실에 되살려가는 일이라 하겠다. 문학의 근본정신이란 무엇인가? 범박하게 말해 소설은 그 근본 기능으로서 비판정신을 더욱 날카롭게 버려가는 일이며, 시는 그 핵심으로서 창조정신을 심화해가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소설의 기본으로서 산문정신, 비판정신이란 바로 개인과 개인, 개인과 사회, 사회와 역사, 그리고 시대정신과 영우너정신 사이의 긴장과 갈등 속에서 무엇이 옳고 그르며, 바라직한 것이고 그렇지 않으며, 아름다운 것이며 추한 것인가를 따지는 일이라고 하겠다. 진위판단, 선악판단, 미추판단, 호오판단, 신념판단, 당위판단 등 모든 판단기준이 총체적으로 작용하여 하나의 바람직한 가치체계를 정립해가는 일이라는 듯이 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즈음의 많은 소설들에서 그러한 인간정신의 날카로운 비평정신이 신랄하게 또한 섬세하고 예리하게 물결치고 있음을 볼 수 있는 경우가 얼마나 있는가? 적지 않은 작품들이 이른바 대체역사라는 이름으로, 기업소설이라는 이름으로, 베스트셀러라는 이름으로 각양각색의 대중문학, 통속문학의 경향을 띄며 재탕, 삼탕을 일삼고 있다는 혐의는 없는가? 인간탐구의 그 깊고 깊은 광맥 속으로 뚫고 들어가서 오늘에 바람직한 삶, 가치 있는 삶의 모습을 비판적이면도 따뜻하게 창조해낼 수는 없는 것인가? 물론 이즈음에도 그런 진지한 소설이 적지 않게 쓰여지고 발표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다만 그러한 것들이 또한 출판잡지계를 둘러싼 상업주의 또는 자본주의의 범람에 의해 의도적으로 조작되고 포장되어, 마치 팔리지 않으면 소설이 아니라는 식의 자본논리, 현실법칙에 지배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자 할 뿐이다. 문학상 하나도 그렇지 않은가? 소설가의 이름에 매달려, 상을 빌미로 문학지가 자본논리, 현실법칙에 좌우되고 있지는 않은가? 그러기에 상에 있어서도 부익부, 빈익빈의 자본주의 논리가 그대로 통하고 있는 것이 아픈 오늘의 문단현실이 아닌가 하는 뜻이다. 그러니 순수한 인간탐구, 진지한 인간 영혼의 움직임, 또는 운명의 형식을 깊이 있게 천착해 들어가는 본격소설, 순수소설이 설 곳은 과연 어디란 말인가. 비평 또한 그렇지 않은가? 비평에 있어서도 상업주의, 자본의 논리에 기대어 기계적으로 북치는 소년, 자동인형화한 비평행위는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실정이니 참 문학의 길, 올곧은 비평정신으로서 산문정신을 수행해 가려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외로움이나 고절감이 얼마나 깊은 것이겠는가? 깊이 따져 생각해 볼 일이다.
시에 있어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이즈음의 많은 시들은 이름만 가려놓고 보면 어떤 것이 누구의 시인지 전혀 본간이 가지 않는 비슷비슷한 작품들이 홍수를 이루고 있다. 이른바 몇몇 우상화된 시인들의 시 경향이 그대로 범람하여 창조적인 시, 개성적인 시들이 두드러지게 눈에 띄지 않는 실정이란 말이다. 주지하다시피 시의 흐름은 크게 보아 리리시즘이나 리얼리즘, 그리고 모더니즘이라는 세 가지의 경향성으로 묶어볼 수가 있다.
그러나 어떤 경향이든지 중요한 것은 기성의 시관이나 시형, 또는 관습화된 표현양식이나 기법을 깨뜨리고 새로운 인식이나 개성적인 표현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야말로 시정신은 창조정신이며, 그러기에 반역의 정신이고, 또한 자유의 정신이고 주체의 정신인 것이다. 그럼에도 이즈음에는 젊은이들의 많은 시들이 점점 아류화 하고 정형화함으로써 창조적인 시, 자유로운 시, 개성적인 시의 면모를 상실해가고 있는 추세이다. 그렇다! 시인일수록, 시를 쓰는 일이란 권력이나 금력을 얻는 일과는 거리가 먼 일이다. 더구나 명예를 얻는 일과도 진짜 시의 길, 시인의 길은 거리가 멀 수밖에 없다. 일제 강점하 만해나 심훈, 육사나 윤동쥬의 경우를 보아라. 그들이 어디 그러한 현실적인 멸이를 얻기 위해 시를 Tm고, 더군다나 시인 행세를 하려 했던가? 죽을 때까지 시인으로서는 알아주는 살마도 별로 없었고, 그 어떤 현실적인 명리와도 전혀 무관한 모습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그들이 문단권력이나 그 어떤 시대적 추이에 아부하지 않고 자신의 창조적인 삶을 개성적으로, 주체적으로 노래함으로써 스스로 정신의 구원을 얻으려 했기에 그들이 남긴 시들은 시대에서 시대를 넘어 우리에게 감동을 던져주고 진실의 길이 바로 진짜 시의 길임을 소중하게 일러주고 있지 않은가? 시에서 현실이란 삶의 기반이기에 소중하다. 그러나 참된 정신이란 권력, 금력, 명예욕으로서 현실법칙을 거부하고 진실법칙을 생명으로 알고 개성적, 창조적으로 탐구해가는 데서 구현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오늘의 문학에 있어 문제는 문학의 문학다움으로서 참 문학 정신을 회복하고 확립해가는 것이 가장 긴절한 명제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

3. 개인의 발견과 사회 또는 민족어 완성의 길

무엇보다도 필자에게 오늘에 있어 더욱 소중한 것은 참된 시정신의 회복과 확립이 긴절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참된 시란 무엇이고, 시인의 길이란 또 무엇인가?
오늘날에 있어 시의 회복이란 말 그대로 인간성의 회복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왜 우리는 시를 쓰고 읽는가? 한마디로 그것은 시를 통해서 참된 자아를 발견하고, 현실에 있어 정신의 위기를 극복하고, 나아가서 자기를 온전하게 실천하며, 궁극적으로 자기를 구원하는 길로 나아가고자 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서 가만히 들여다봅니다//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읍니다//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읍니다/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읍니다//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 집니다//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읍니다

ㅡ 윤동주, 「자화상」

시를 쓰고 있는 가장 원초적인 동기는 바로 자아발견의 노력에서 비롯된다고 하겠다. 나는 무엇이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고, 해서는 안 될 일, 해야 하는 일은 과연 무엇인가? 또 나의 장점은 무엇이고 단점은 무엇인가와 같은 문제는 물론 나는 어떻게 성장해가 야할 것인가 하는 명제들과 연관된다는 뜻이다. 인용 시에 있어서도 나를 발견하는 일은 '들여다봄 ㅡ 미워서 돌아감 ㅡ 다시 돌아가 들여다 봄 ㅡ 다시 미워짐 ㅡ 도로 들여다봄 ㅡ 가엾어짐'이라는, 다시 말해서 윤동주는 이 시를 통해 자아란 이미 완성돼 있는 그 어떤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차츰 발견됨으로써 마침내 형성되고 확립되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갖게 된 것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자아발견의 과정이 윤동주가 이 시를 쓰게 된 동기가 된 것이고, 또 우리들이 이 시를 읽고 깨달을 수 있는 사실이라 하겠다.
또한 시는 자기를 이기는 과정, 즉 자기 극복의 과정을 보여주는 일이라고 하겠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ㅡ 한용운, 「님의 침묵」부분


삶이란 무엇이겠는가? 끊임없이 부족한 자신을 스스로 이해하고 납득시키고 온갖 난관을 극복해가는 과정 그 자체가 아니겠는가? 한용운의 이 인용 시는 바로 시가 이러한 자기극복의 과정을 탐구하는 것임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즉 시는 좌절에서 위안을, 슬픔에서 힘을, 절망에서 희망을 발견하고 그것을 향해 나아가는 자기 극복의 동기에서 씌어진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자신이 처한 정신의 어려움은 물론 온갖 위기를 이겨내고 좀더 인간적인 삶의 가치를 찾고자 노력하는 데서 시의 시작이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뜻이다.
아울러 시는 자기를 실천하는 길, 자아실현의 길로서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매운 계절의 채쭉이 갈겨/마츰내 북방으로 휩쓸려오다//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서리빨 칼날 진 그 뒤에 서다//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박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ㅡ 이육사, 「절정」

우리는 왜 사는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를 거쳐, 어디로 가고 있는가? 아무도 이에 선명한 해답을 던져주기는 어렵다. 그러기에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신학이 있고 철학이 있으며 사학과 문학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문학을 공부하는 입장에서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사는 것은 우리자신을 실현하기 위해서라는 점이다. 자기를 살고, 자기를 실천해 나아가려는 것이 삶의 시작이자 끝이라는 점이다. 이육사는 이 시를 왜 썼는가? 열여섯 차례나 피검되고 중국과 만주를 오가는 사이에 과연 무엇 때문에 이 시를 썼겠는가? 해답은 한 가지다. 자신에 대한 존재확인이자 존재증명이다. 까뮈가 말했던가? 쓴다는 것 그것은 부조리한 삶에 있어서 존재증명을 위한 최후의 몸부림이라고 ……. 그렇다! 믿고 의지할 것 없는 백척간두의 현실에서 육사에게 시는 유일하게 자신이 살아 있음을 증거하고 확인할 수 있는 존재증명의 방법이자 자아실현의 방법일 수밖에 없음이다. 그러나 자아실현의 방법이 치열했고, 존재증명의 안간힘이 처절했기에 이 시는 오늘에도 싱싱하게 살아 우리에게 삶의 의미를 생생하게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
또한 시는 궁극적인 면에서 자기구원의 길을 의미한다.
삶의 근원적 목표는 무엇인가? 한마디로 그것을 정신의 구원이라고 말해볼 수는 없을 것인가? 한계 지워진 인간 영혼이 종교를 통해 정신의 구원을 얻고자 하듯이 가난한 영혼은 운명의 형식으로서 시를 통해 정신은 구원을 갈망한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시는 여기에 머물지 않는다. 원천적으로 삶은 '나'에서 시작되어 무수한 '너'를 거쳐 다시 '나'로 회귀하는 속성을 지닌다. 자아 발견에서 시작되어 자기극복, 자아실현, 자기구원으로 마무리되는 속성을 지닌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시는 공적인 면에서는 더불어 사는 삶, 함께 살아가는 사회를 반영하지 않을 수 없다. 한용운의 '님'이 개인적인 의미에서 '연인/부모/형제/친구'일 수 있지만, 공적인 차원에서는 '조국/민족/민중'일 수도 있다는 이치다. 이 점에서 시는 개인구원의 길이지만 넓게는 사회, 역사를 향해 열린 인간구원의 길이기도 한 것이다.
아울러 시는 그러한 인간정신의 높은 움직임을 형상화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숙명적인 면에서 언어와의 싸움을 전제로 한다. 즉 문학, 특히 시는 언어와 변증법적 관계에 놓인다는 말이다. 그러기에 시는 민족어 완성을 향한 길이라고 할 수 있다. 민족어란 무엇인가, 그것은 민족의 정서와 정신을 담는 그릇이다. 말하자면 정신의 형식이자 그릇이라는 뜻이다. 그러기에 시는 민족어의 완성을 지향해 나아감으로써 민족정서와 혼의 형식을 탐구하고 완성해 나아가는 것을 궁극적인 이상으로 한다. 일찍이 하이데거가 말했듯이 시는 역사적인 차원에서 민족어 완성을 향한 길이라고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렇게 본다면 시는 개인의 삶에서 시작되어 사회 · 역사적 삶의 지평으로 열려가는 길이며 동시에 민족어의 완성을 위한 순례의 길,
구도의 역정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 점에서 시대현실과는 끊임없이 길항하면서 언제나 민족정신의 지평 위에 자리 잡고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4. 시인의 길, 인간의 길

오늘날의 사회현실은 과연 어떠한가? 일제강점의 질곡도 무너지고, 분단이래의 고질적인 군사통치의 폭력도 점차 사라져가는 이즈음 오히려 각종 사회병리 현상은 가중돼 가는 것이 실상이 아닌가 한다.
다리가 무너지고, 건물이 폭삭 주저앉아 수많은 생명을 앗아가는가 하면, 자식이 유산을 노려 부모를 살해하고 ……. 헤아릴 수 없는 반인간적 대형사고는 물론 반인류적 사건 사고들이 줄지어 일어나고 있다. 참으로 아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나, 너, 또한 우리 모두 그러한 재앙과 폭력으로부터 예외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러기에 바로 우리들 지친 마음에 참된 시심을 일러주는 일이 그 어느 때보다도 간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ㅡ 윤동주, 「서시」

참된 인간의 길이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그것은 시심을 간직하는 길, 진짜 시인의 길을 걸어가려는 데서 그 바람직한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인용 시에서 시인이란 무슨 의미를 지니는가? 첫째 그것은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다. '죽는 날까지 하늘 우러러 부끄럼 한점 없기를'기도하며 사는 자세가 그것이다. 인간이 짐승과 다른 것은 바로 이 부끄러움을 알고 그렇게 되지 않으려 노력하는 데서 인간의 인간다움, 인간의 위의가 지켜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둘째로 그것은 괴로움을 아는 마음이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라는 구절이 그것이다. 괴로움이 없는 인간, 괴로움을 모르는 인간이란 그야말로 인간성이 마비된 인간이 아닐 수 없다. 기계인가, 무쇠인간이 물질, 영혼과 육체 사이에 끊임없는 갈등이 존재하며 그 속에서 인간다운 삶을 향한 괴로움이 따를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부끄러움, 괴로움을 통해 인간은 죄의 길로부터 속죄의 길, 정죄의 길을 나아감으로써 마침내 인간구원을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셋째로 시인의 길은 '별을 노래하는 마음'을 간직하는 일이다. 그것은 별이 상징하듯 진. 선. 미를 향한 동경의 마음이자 갈망의 표현이 아닐 수 없다. 끊임없이 진실의 길, 착함의 길, 아름다움의 길을 찾아가고자 하는 갈망의 삶, 형성의 삶을 지향한다는 뜻이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 그것이야말로 바로 '아가'를 사랑하는 마음이며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마음이고 하늘의 별을, 땅의 꽃을 그리고 고향을, 조국을 소중히 하는 마음이 아니고 그 무엇이겠는가. 넷째로 그것은 자기운명을 사랑하는 길이라고 하겠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지는 길을 걸어가야겠다'라는 이 시의 핵심 구절이 그것이다. 삶의 처음도 나에서 비롯되고 그 끝도 바로 나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어떠한 삶의 자세이겠는가? 한마디로 그것은 스스로의 운명을 뜨겁게 끌어안고 진지하게 사랑하는 길, 즉 운명애(amor fati)의 길이 아닐 수 없다. 나의 운명을 긍정하고 사랑하는 길, 그것은 바로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이자 최대의 행복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나의 운명을 사랑해야 하듯이 너의 운명, 나아가서 인간의 생명, 모든 목숨 있는 것들의 생명을 긍정하고 긍휼이 여겨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운명에는 바로 인간애의 길이며, 생명사랑의 길이기 때문이다. 그런 마음을 가질 때 과연 이 땅에 함부로 남을 속이고 죽이는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한마디로 오늘날 인간성의 위기는 바로 문학의 위기이자 시의 위기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 바로 이 점에서 지금 이 시점은 진정한 문학의 회복과 참 문학정신의 확립을 통해 문명의 위기, 인간상실의 비극을 극복해 나아가야만 할 운명의 시간, 결정의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우리 모두 한 사람 한 사람이 문학사랑, 시사랑의 등불을 이웃에게 한사람씩 점화해 나아감으로써 진정한 생명사랑, 인간사랑, 자유사랑의 정신을 새봄의 풀잎처럼 싱싱하게 키워나아가야만 한다는 뜻이다.

 

-출처: 문학의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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