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격조의 시는 좋은 시가 아니다 - 이창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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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2,643회 작성일 15-08-27 09:01본문
감격조의 시는 좋은 시가 아니다
이창배
다음에 인용하는 김소월의 걸작으로 애송되는 [초혼]의
경우도 감격적 어조가 두드러진 시이다. [초혼]이란 말 은 사람이 죽었을 때 망자의 이름을 세 번 부르고 난 후에 장례식을 치르는 관례에서
비롯된 말이다.
제목이 암시하듯이 시인은 죽은 애인을 못 잊어 비탄에 잠겨 절규한다.
죽은 이가 과연 누구인지는 밝혀져 있지
않지만 이 절규를 통해 슬퍼서 몸부림치는 시인의 비애의 감정이 처절하게 호소해온다.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
중에 흩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마디는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붉은 해는 서산 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의 무리도 슬피 운다.
떨어져나가 않은 산 위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비껴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나 넓구나.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애인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라 이해가 가지만 원숙한 시인은 그 감정에 매달려 몸부림치지 않고 내적인 감정을 외적인 장면이나 사물로 객관화한다.
이
점에서 같은 시인의 작품이지만 [진달래꽃]은 훨씬 잘 쓴 시라 하겠다.
[진달래꽃]에 대한 해석이 반드시 일치하진 않겠지만 사랑하는
애인과의 이별 장면이 제시된 것은 틀림없다.
이 장면을 통하여 전통적인 한국 여인에 대한 시인의 감정이 정확히 구상화된 점에서 이 시의
작품성이 높이 평가된다.
이 시에 대한 자세한 분석은 다음 장으로 미루고 [초혼]에 제시된 것과 같은 애인의 죽음에 대한 비애의 감정이
感傷에 흐르지 않고 구상화되자면 시가 어떻게 씌어져야 하는가를 유사한 주제를 다룬 또 다른 한 편의 시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사무치게 그리운 여인이여, 당신은 어떻게 내게 말을 하는가요.
지금의 당신은 이전의 당신이 아니라고,
나에게
전부였던 그 당신이 변했던 시절, 그때가 아닌
우리 사이가 아름다웠던 처음 그때와 같다고 말하는군요.
들려오는 목소리가 정말로
당신인가요. 그렇다면 봅시다.
내가 집 근처에 다가들면 늘 기다리고
서 있던 당신의 모습, 그래요, 그때 내가 보았던
그
상쾌한 하늘색 가운까지도 똑같은 당신의 모습을.
아니면, 이 목소리는 축축한 초원을 가로질러 무심히
이쪽으로 불어오는 미풍에
불과한가요.
당신의 목소리는 이제 파리한 불가해한 것으로 변하여
이 근처 어디서고 다시는 안 들리는군요.
그래서
나는 비틀거리며 걸어가고,
낙엽은 여기저기 떨어집니다.
바람은 북쪽에서 가시덤불 사이로 가냘프게 스며들고,
여인의 부르는
목소리.
이 시를 보면 하디에게는 죽은 부인과의 관계가 원만치 않았던 시절이 있었음을 알 수 있고, 사이가 좋았던 시절에
그녀는 외출했다가 돌아오는 남편을 멀리 집 밖에까지 나와서 기다리고 있을 정도로 다정한 아내였음을 또한 알 수 있다.
그 아내가 죽으니
이제 생시의 원망과 그리움이 한 데 뒤섞여 못 견디게 보고 싶어 한다. 환각으로 들려오는 아내의 목소리에 이끌려 비틀거리며 낙엽을 밟으며
걸어가는 시인의 외로운 심정이 이 짤막한 한 편의 "극"을 통해서 잘 전달된다.
이 시가 성공할 수 있었던 주요 원인은 감정을 인물과
장면으로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시인들이 감정의 절제를 기하여 낭만적 한탄과 초월에서 벗어나 감정을 리얼하게 표현하는 방법 중의 하나가 극적
수법이다. 엘리엇은 잘 씌여진 시는 아무리 짧은 한 편의 서정시라도 극적이지 않은 시가 없다고 말한 바 있다.
시의 초보자들이 개척해야
할 부분이 그 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관점에서 테니슨의 시보다 예이츠와 하디의 시가 잘 쓴 시이고, [초혼]보다 [진달래꽃]이 잘 쓴
시라고 평할 수 있다.
다음에 인용하는 서정주의 [부활]이란 시도 김소월의 시, 하디의 시와 같은 주제를 다른 시로서 시인의 감정이
어떻게 형상화되어야 좋은 시가 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내 너를 찾아왔다. 수야
너 참
내 앞에 많이 있구나.
내가 혼자서 종로를 걸어가면
사방에서 네가 웃고 오는구나
새벽닭이 울 때마다 보고 싶었다.
내 부르는 소리 귓가에 들리더니.
수야, 이것이 몇 만 시간만이냐.
그날 꽃상여 山 넘어서 간 다음, 내 눈동자
속에는 하늘만 남더니
매만져볼 머리카락 하나 머리카락 하나 없더니.
비만 자꾸 오고...... 촛불 밖에 부엉이 우는 돌문을 열고
가면
江들은 또 몇 천 리, 한 번 가선 소식없던 그
어려운 住所에서 너 무슨 무지개로 내려왔느냐.
종로 네거리에
뿌우여니 흩어져서,
뭐라고 조잘대며 햇볕에 오는 애들.
그 중에서도 열아홉 살 쯤 스무 살 쯤 되는 애들 -
그들의 눈망울
속에, 핏대에, 가슴 속에 들어앉아
수야! 수야! 수야! 너 이젠 모두 다 내 앞에 오는군나.
이 시에 등장하는
"수야"라는 아이가 실명인지 가명인지는 가릴 필요가 없고, 아마 "열아홉 살 쯤 스무 살 쯤" 나이에 죽은 여자아이임에 틀림없다.
시인은
이 아이가 죽은 뒤 "새벽닭이 울 때마다 보고 싶"어서 그 모습이 늘 눈에 밟혀 종로 바닥을 걸으면서 같은 또래의 아이들을 보면 그 애가
"조잘대며 햇볕에 오는" 명랑하고 맑은 모습으로 돌아온 듯한 착각에 시달려 왔음을 알 수 있다.
죽은 수야에 대한 사무치게 그리운 심정이
부활의 사상으로 바뀌면서 자초지종에 대한 설명도, 애절한 감정의 표출도 없이 장면과 이미지만으로 잘 전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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