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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변조의 시는 좋은 시가 아니다 - 이창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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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2,093회 작성일 15-08-28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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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웅변조의 시는 좋은 시가 아니다

이창배

시에서 웅변은 금물이다. 19세기 프랑스의 상징파 시인 베를렌느는 그의 유명한 시 [시작법]에서 '웅변을 잡아서 그놈의 모가지를 비틀어라'라고 외쳤다. 이 말은 상징주의 시대가 아니라도 시인들이 깊이 마음에 새겨야 하는 명언이다. 이 시에서 베를렌느는 시의 음악성을 강조하고, 정확한 묘사보다는 암시적이 뉘앙스를 강조한 상징시의 시학을 제시하였다. 그가 시에서 배척하라고 강조하는 '웅변'은 설득력이 강한 수사학적 언어를 말한다. 시는 엄격히 말해서 시인의 의견이나 주장, 혹은 어떤 지식을 전달하는 글이 아니기 때문에 뉘앙스이고 이미지이고 비전일 뿐이다. 서정시인은 독자가 알아듣건 말건 자신의 감정에 초점을 맞추어 시를 쓴다. 그래서 때로는 조리가 안 맞는 넋두리처럼 들리기도 한다. 반면 웅변가는 선동적인 수사법을 써서 청중의 이성에 호소하여 그를 설득하는 데 목적을 둔다. 그래서 아무리 비유적 수사를 쓰고 시적 표현을 쓴다 해도 그의 말은 논리가 정연하다. 시는 감정에서 출발하여 감정으로 끝나고 산문은 이성에서 출발하여 이성으로 끝난다. 웅변이니 수사니 하는 말은 시와는 거리가 먼 단어들이다.
한 편의 서정시를 쓰고자 하는 사람은 자기의 '마음 속을 들여다보고 써야 한다'라고 필립 시드니가 말한 이 '마음 속'이란 말은 마음의 상태를 말하는 것인즉, 마음의 상태에 알맞는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데 주력할 것이지 어떤 주장이나 의견이나 교훈적 진리를 교묘한 말로 전달하고자 해서는 안 된다. 시에서 '웅변'을 배제하라는 말을 현 대 영시의 정상 예이츠는 '언번에 능한 자는 자기 이웃을 기만하고, 감상에 빠지는 자는 자신을 기만할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언변에 능한 자는 그 웅변적인 화술로 상대방의 이성을 흐리게 하고 센티멘탈리즘에 빠지는 자는 자기 감정에 도취되어 마찬가지로 이성이 흐려서 사물의 변별력을 잃게 된다. 결국 시에서 웅변이나 감상은 다같이 보는 눈을 흐리게 하는 2대 해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시에서 어떤 시가 웅변조의 시인가. 화려한 언사와 유창한 문체로 쓰인 시가 웅변조의 시인가 하면 그렇지 않다. 화려한 언어로 말하면 한용운의 시도 박두진의 시도 김영랑의 시도 모두 그렇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들의 시는 그 화려한 마음의 상태를 형상화한 이미지이고 장면일 따름이지 결코 시인의 주장을 내세운 수사가 아니다. 다음 시를 예로 들어 웅변조의 시가 어떤 의미에서 서정시와 다른가를 분석해보기로 한다.


1
나는 벌거숭이이다.
옷 같은 것은 나에게 쓸데없다.
나는 벌거숭이이다.
제도 인습은 古人의 옷이다.
나는 벌거숭이다.
시비도 모르고 선악도 모르는.

2
나는 벌거숭이다. 그러나 나는
두루마기까지 갖추어 단정히 옷을 입은
제도와 인습에 추파를 보내어 악수하는
썩은 내가 물신물신 나는 구도턱에 코를 박은
본능의 폭풍 앞에 힘없이 항복한 어린 풀이다.

3
나는 어린 풀이다.
나는 벌거숭이다.
나에게는 오직 생장이 있을 뿐이다.
태양과 모든 星辰의 축배를 올리련다.


전체 6부 중 3부만을 인용했다. 이 시를 쓴 김형원은 1930년대에 언론인으로 활약하면서 미국 시인 월트 휘트먼의 시를 최초로 한국에 도입한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위 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 시인은 휘트먼의 시 [풀잎]을 읽고 특히 그의 반문화 반교양적인 원시 생명 사상에 감명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휘트먼은 범신론적 우주관을 바탕으로 일체 생명체의 신성함과 평등함과 영원함을 노래한 시인이다. 거기에서 그의 민주주의적 사상과 생명주의 사상과 박애사상이 연유했고, 반문화적인 원시 찬양사상이 연유했다. 훌륭한 시인의 경우 주목할 일은 그의 철학이나 신념, 주장 같은 사상이 아니라, 그런 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느끼고 생각한 바를 어떻게 구상화했느냐 하는 점이다. 그 점 휘트먼은 시의 스타일에 있어 유니크한 시인이다. 흔히 그를 자유시의 원조라고 부르지만, 그의 시의 스타일의 특성이 단순히 자유시의 표현 방식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시의 스타일은 수많은 유사 이미지를 나열하고, 어귀와 시행을 반복하여 많은 잔물결을 휩쓸어 큰 물줄기를 이루며 흐르는 대하와 같은 리듬이라 할 수 있다. 그 리듬은 고양된 찬미의 음악이다. 실례를 들어 그의 문체의 특성을 직접 보기로 하자. 다음 시는 휘트먼의 시 [나 자신의 노래] 제 1부이다.


나는 나 자신을 예찬하고 나 자신을 노래한다.
그리고 내 것은 네 것이기도 하다.
대체로 내게 속하는 일체의 原子는 마찬가지로 네게도 속하는 것이다.
나는 빈둥빈둥 시간을 보내며 나의 영혼을 초대한다.
나는 마음 편히 몸을 기대고, 빈둥대며 여름풀의 싹을 응시한다.

나의 혀, 내 핏속의 일체의 원자는 이 땅에서,
이 대기에서 만들어진 것,
나는 여기에서 내 양친에게서 생겼고, 양친은 또 그 양친에게서,
또 그들은 똑같이,
나는 지금 37세의 완전한 건강체로 시작한다.
죽을 때까지 중단 없기를 바라면서,

종파나 학파는 잠시 접어두고,
그것이 어떻든 지금 상태로 족하니, 잠시 거기에서 물러나, 그러나 결코 잊진 않고,
나는 선악을 다 용납하고 만난을 무릅쓰고 마음껏 말하련다.
本有의 정력으로 거리낌없이 '자연'을 나의 천성을.


이 시를 번역문이 아닌 원문으로 읽어 보아야 문체상의 특이한 점을 더욱 잘 읽을 수 있다. 반복과 열거의 방식으로 유연하게 이어지는 시행들은 이 시 특유의 리듬을 형성하여 고양되괴 도취된 감정을 자아낸다. 고양된 리듬은 생명체의 아름다움과 영원함을 찬미하는 시인의 감정의 형상화이다. 시인은 '나 자신을 예찬하고 나 자신을 노래한다'라고 선언한다. 그 '나 자신'은 다름아닌 범신론적 생명체인 인간 그 자체이다. 그 '인간'은 神性의 구현이고 존엄한 찬미의 대상이다. 그 신성체 앞에서 시인은 환희의 노래를 부른다. 워즈워스가 하늘의 무지개를 보고 가슴이 뛴 것과 같은 심적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휘트먼의 시를 모방한 김형원은 휘트먼의 시적 방법을 모방했어야 한다. 그가 사용한 '벌거숭이'의 이미지라든지 열거와 반복의 스타일은 사상을 설명하기 위한 장치일 뿐이지 '정서의 객관 상관물'은 아니다. 김형원이 진정 휘트먼과 같은 시적 체질의 소유자였다면, 그 환희의 목소리가 이미지로, 또는 시의 리듬으로 나타났어야 한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독자의 정서에 호소해오지 않고 생경한 이념의 주장이 되어 머리에 와 부딪칠 뿐이다.
다음에 인용하는 셸리의 시도 웅변조 시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만일 내가 네가 '서풍이' 실어가는 한 개의 죽은 잎사구라면,
만일 내가 너와 함께 날을 한 점의 빠른 구름짱이라면,
네 힘에 눌려 네 힘의 충동을 못 이겨 신음하는

한 이랑의 파도라면, 물론 너 만큼
자유롭진 못하겠지만, 아 제어할 수 없는 자여,
만일 내가 나의 어릴 때 같이,

하늘을 방랑하는 너의 친구라도 될 수 있었다면,
너의 하늘의 속력을 이겨내는 것이
결코 공상처럼 생각되지 않던 그때 같기만 하다면,

나는 이렇게 간절한 소망에 기도하며 너와 겨루지 않으리라.
아 나를 파도처럼, 잎사귀처럼, 구름처럼 일으켜다오.
나는 인생의 가시밭에 쓰러진다. 나는 피흘린다.

시간의 중압이 사슬로 묶고 굴복시킨다,
너무나도 너와 같아. 순종을 모르고, 민첩하고, 거만한 한 인간을.


이 인용은 [서풍송가] 제4부이다. 이 시는 하늘에서 구름을 흩날리고, 지상에서 낙엽을 휩쓰는 가을 서풍의 위력을 찬미한 시로서 시인은 서풍을 자유와 힘의 상징으로 생각하며, 그것과 비교하였을 때 '시간'에 얽매여 무력하기 짝이 없는 인간의 실상을 슬퍼한다. 낭만시인들은 인간이 본래 자유롭고 완전무결한 신적인 존재인데 인간으로 태어나 비자연적인 구속 속에 갇혀 감옥 생활을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시인은 '나의 인생의 가시밭에 쓰러진다. 나는 피흘린다'라고 인간의 비극적 운명을 한탄한다. 전형적인 '낭만적 고뇌'에 찬 감정의 발산이고, 웅변조의 절규이다. 그 고뇌가 시의 좋은 모티프가 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좋은 시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은 감수성이 원숙해지고 세련되어야 하고, 그와 더불어 '웅변의 모가지'를 비틀어서 감정을 뿜어내는 목소리를 없애고 이미지나 극적 장면을 보여주어야 한다. 셸리는 이 시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본래 자유분방한 성격의 소유자로 태어나 가정에서 학교에서 사회에서 그를 억압하는 종교적, 사회적 관례와 규범과 싸워 많은 문제를 일으킨 전형적인 낭만시인이었다. 시인이 추구하는 자유의 이상과 좌절이 다른 시인의 경우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비교해보는 것은 유익한 일이다.
비교가 적절할지는 모르지만 우리나라 시인 중에서 김수영의 시에서 똑같은 모티프를 많이 찾아볼 수 있다. 47세에 요절한 김수영은 한국의 현대사를 온몸으로 겪으면서 항상 비타협적인 눈초리로 사회와 정치의 모순을 응시하면서 자유와 갈망과 실패 사이에서 고뇌한 지성시인이다. 그의 [그 방을 생각하며]를 읽어보기로 한다.


革命은 안 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 버렸다
그 방의 벽에는 싸우라 싸우라 싸우라는 말이 헛소리처럼
아직도 어둠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나는 모든 노래를 그 방에 함께 남기고 왔을 게다
그렇듯 이제 나의 가슴은 이유없이 메말랐다
그 방의 벽은 나의 가슴이고 나의 四枝일까.
일하라 일하라 일하라는 말이
헛소리처럼 아직도 나의 가슴을 울리고 있지만
나는 그 노래도 그 전의 노래도 함께 다 잊어버리고 말았다.
革命은 안 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 버렸다
나는 인제 녹슬은 펜과 뼈와 狂氣......
失望의 가벼움을 財産으로 삼을 줄 안다
이 가벼움 혹시나 歷史일지도 모르는
이 가벼움을 나는 나의 財産으로 삼았다.


이상은 전체 시 중 3연을 인용한 것이다. 시에서 말하는 '혁명'은 4.19 혁명을 가리키는 것이고 학생들의 피의 대가로써 얻어진 혁명이 독재와 억압에서의 해방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다시 5.16혁명으로 이어졌을 때 지식인들은 자포자기 속에서 다시 일상생활을 이어가면서 뼈저린 좌절감과 무력감을 맛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투쟁의 벽보로 가득 찼던 '방'에서 이제 '녹슬은 펜과 뼈와 狂氣'의 방으로 옮겨앉아 이것이 역사일지도 모른다는 체념과 실망의 생활을 살아가야 한다. 셸리와 같이 자유에 목말라하는 체질로 태어난 김수영의 시는 '방'을 바꾸는 장면을 통하여 막연한 외침이 아니라 구체적인 시각으로 감각에 와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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