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 없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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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너덜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4건 조회 389회 작성일 21-10-17 17:50본문
흔적 없는 삶*
잘 닦여진 도로를 뒤로하고
헝클어진 머릿결 같은
숲길을 찾아 걸어 들어가는 아버지가 있었다
아무도 그의 길을 가늠하지 못했다
다만 눈 덮인 풀 위를 걷는 것으로 그는 말할 뿐,
길의 이유를 대는 일은 없었다
흔적 없이 걷는 숲엔
피 한 방울 같은 선명한 마침표를 찍기 위해 걸어온
살갗이 닳은 생의 쉼표들이 흩어져 있었고
가쁜 들숨 날숨으로 그의 길을 받쳐주던 띄어쓰기가 있었다
숲에서라야
아버지는 의문부호를 떨쳐버릴 수 있었다
끊임없이 걷는 것만이 그를 살리는 유일한 느낌표였으므로,
가끔 벽지에 두고 온 딸이 떠오르는
슬픈 밤엔
숲의 어스름 속에 흔들리는 자작나무 이파리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언젠가 그에게
길었던 숲의 문장을 마무리할 시간이 찾아오면
바람은,
자작자작 잠 못 드는 이파리 위에
눈송이 같은 느낌표 하나를 가만히 놓고 갈 거라 했다
* 영화 [흔적 없는 삶(leave no trace)]를 본 후에.
댓글목록
하늘시님의 댓글
하늘시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3연에서 잠시 숨이 마침표를 찍었네요
마지막 연에서 느낌표를 눈송이처럼 맞고 갑니다
저도 이 영화 본 기억이 있답니다
공감할수 있는 좋은 시
잘 읊조리다 갑니다^^
너덜길님의 댓글의 댓글
너덜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시든, 영화든 삶을 바라보는 태도가 그 질을 좌우하는 것 같습니다.
마음에 남지 않는 건 숲에 핀 풀 한 포기의 가치도 없다는 거구요.
풀은 최소한 그 흔들림으로 바람의 말은 들려주니깐요.
공감한다는 말보다 더 좋은 말은 없을 것 같습니다.
공감의 말씀 감사합니다.
museum님의 댓글
museum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마침표, 쉼표, 띄어쓰기, 벽지에 두고 온 딸
인상 깊은 시어들에 감명받고 갑니다.
너덜길님의 댓글의 댓글
너덜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말씀, 감사합니다.
깊어가는 가을에 좋은 시 많이 올려주시길 바랍니다.
오늘도 멋진 하루 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