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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의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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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공덕수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211회 작성일 18-05-31 10:16

본문

머리가 많이 길었다.

작년 여름에 강변 가요제에 나온 이선희처럼 아무렇게나 볶아 두었던 단발 머리가

이제는 묶어도 제법 길다. "내 머리가 너 같으면 나는 집 밖에 못 나간다"고 친구들이

말했던 곱슬은 머리 카락이 길어지며 길게 늘어져 자연스럽다. 살도 제법 빠졌다.

모처럼의 휴일 이전에 다니던 횟집의 동갑 내기 사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도 나도

이름의 끝 자가 같다. 그는 나를 냄이라 부른다. 그런데 나도 그를 냄이라고 입력 시켜

놓았지만 이전에 사장이였기 때문에 여전히 사장님이라 부르는 것이 편하다. 내가

생각 할 때 그리 큰 키는 아니지만 다부진 체구에 얼굴이 잘 생긴 친구다. 그는 나에게

여자 친구를 소개 해달라고 늘 조른다. 그러나 나는 키가 크고 이목구비가 예쁜 그의

아내를 잘 안다. 그런 아내와 사는 그가 왠만한 여자가 눈에 차지 않는다는 사실도 잘 안다.

직접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그의 아내와 그는 서로 사생활을 인정하는 사이인 것 같다.

대체로 부부가 그 지경이 될 때 서로의 마음이 관대하고 쿨해서 그런 경우보다

파탄보다 나은 선택인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일을 할 때는 머리 카락이 걸리적 거려서

촘촘한 빗으로 앞머리를 모두 넘겨서 올빽으로 묶는데, 귀신처럼 머리를 풀고,

검은 블라우스와 흰 바지를 입으니, 나도 제법 괜찮은지 모두들 이쁘다고 말했다.

그런데 나는 그런 칭찬을 믿지 못한다. 옷집 사장이 그러면 옷 팔려고 하는 말 같고

친구가 그러면 친구니까 하는 말 같고, 남편이 그러면 이이가 밥을 잘못 먹었나 한다.

그것은 내가 여지껏 살아 오면서 한번도 예뻤던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통통한 여자를

선호하던 아가씨 때에는 병든 고양이처럼 말랐는데, 이제 날씬한 여자가 대세인 지금은

몸에다 적금을 들어놓듯 군살을 넉넉하게 비축하고 산다. 호프집에 일을 하고 있으면

부부가 아닌듯한 많은 남녀들이 와서 한참을 마시고 웃다 간다. 나는 정서적으로 좀

화냥끼나 있는지 그 모습들이 부도덕해 보이기 보다는, 우리가 도덕이라고 믿는 것들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철이 들고는 한 남자, 한 여자가 볼 꼴 안 볼 꼴 다 보고

죽을 때까지 함께 사는 일도 부자연스럽지만, 어쩌면 거품이 없으면 김빠진 맥주 같은

사랑을 서로 해야 한다니, 꼭 그래야 한다니 그 또한 부자연스럽다. 적당한 거리에서

적당히 낯설고, 적당히 서로를 알지 못하는 설레임의 거리를 가진, 혼인이라는

규약 밖의 만남들이 담장을 넘는 담쟁이처럼, 딱딱한 구조물을 돌아 흐르는 물처럼

생명력 있는 시간으로 보이는지 모를 일이다. 실제로 부부가 함께 술을 마실 때보다

그런 관계의 남남이 술을 마실 때 잔을 넘쳐흐르는 하얀 맥주 거품 같은 웃음 소리들이

훨씬 많이 넘치고 가끔 기본 안주가 떨어졌나 살펴 보기 미안할 정도로 달콤한 긴장감이

많이 느껴진다. 그는 나에게 말했다. "냄이, 옛날보다 젊어졌네. 꾸미니까 이쁘네

그렇게 꾸미고 살어라" 나는 기분이 좋아진 탓도 있지만, 상대방이 지루해질까봐 하기 싫은

말도 하는, 예의나 배려 같은 것 때문에 무슨 말이나 지껼였다. 내가 사람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도 어색함을 메꾸기 위한 노력이 부담스러워서이다. 부부란 말하기 싫으면

않해도 되고, 모처럼 풀은 머리카락이 자꾸 술잔에 달라 붙는 번거러움을 인내하지 않아도

되어 좋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나는 남편 앞에서 내가 아닌 누군가이기 위한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아도 된다. 남편이 아닌 누군가와 술잔을 부딪히고 알콩달콩 하는 일이 부럽기도 하지만

나는 체질적으로 그런 시간을 오래 즐길 수 없는 사람인 것 같다. 내가 사실은 여성의 영혼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을 나는 어렸을 때부터 느꼈다. 담배를 피지 않고, 술은 적당히 마시고

소곤소곤 말하고, 잔잔하고 고요하고, 남자들이 좋은 여자라 생각하는 그 어떤 풍경도

나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풀고 있어서 이쁘다는 머리는 십분도 못되어 질끈 묶을 것이다.

술은 술이 사라질 때까지 마실 것이고, 곧 설레임 같은 것은 갑갑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의 얼굴이 지겹지 않게 잘 생긴 것은 정말 다행이였다. 그가 말이 많지 않고, 유머 감각이

있다는 것 또한 다행이다. 그가  오백원에 노래 두 곡 부를 수 있는 코인 노래방에 간다고

전기 자전거 뒤에 타라고 했다. 나는 손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를 몰라서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가 제대로 잡지 않으면 위험하다고 했지만, 위험한 것이 위험하지 않은 것보다 더 안전하게

느껴졌다. 오월의 바람이 끼얹은 동이 물처럼 한차례 나를 쓸고 갔다. 이제 설레임 같은

나와 체질적으로 맞지 않는 젤라틴 같은 감정의 상태에 속지 않을만큼 나도 산 것이다.

약속 대로 노래를 두 곡 부르고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자리를 도망쳐 왔다. 오는 길에

야식을 파는 거북이 휴게소에서 소주 한 병과 튀김들을 혼자서 먹고 집으로 돌아왔다.

난 전혀 신비롭기 싫은 것이다. 옷에 갇혀 있은 사람처럼 마구 옷을 벗어 던지고, 화장도 지우지 않고

잠든 그에게 귀찮은 뽀뽀를 마구하며 코를 곯거나 방귀를 뀌거나 침을 흘리며 깊이 마구 잠들고 싶은

것이다. 예쁘고 싶지만 예쁘지는 과정이 싫은 것이다. 발에 불편한 신발을 신고, 밥숟가락에 딸려

오는 머리 카락을 견디고, 땀에 녹은 마스카라가 다크 서클처럼 눈밑을 검게 만드는 것을 내가 왜

견뎌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무슨 말이라도 하려고 두 사람이 동시에 공감 할 수 있는 기억들을

들쑤셔야 하는 일도 고역이다. 그러고 보니 남편과 나는 결혼도 혼인 신고도 하지 않았다. 내가 여자답지

않아도 나를 여자로 느껴주는 사람, 나에게 있는 여성 이외의 인간을 사랑해주는 사람, 내 뱃살도

씻지 싫어하고, 정리 정돈하지 않고, 내가 자신을 위해서 아이를 낳아주지 않아도, 기꺼히 나에게 매여

주는 사람, 그가 모는 자전거 뒤에 타면 뒤에서 와락 껴안아도 정신이 교란되지 않는 사람, 둘이서 술 한잔

먹고 불쑥 잠옷 차림으로 부르스 한 곡 추자고 해도 들이대는 기분이 들지 않는 사람. 그를 위해 아무런

불편한 노력을 하지 않아도, 엑스레이처럼 나의 아름다움을 알아주는 사람. 만약 남편과 사는 일이 나 같지

않다면 이혼을 해도 나쁘지 않아고 나는 생각한다. 다음엔 귀신처럼 머리를 풀고, 감옥 같은 옷들을 차려 입고

쥐 잡아 먹은 것처럼 바르고, 그와 함께 맥주를 마시러 가야겠다.  그를 위해 수다를 떨고, 눈을 빛내야 겠다.

내가 몰랐던 사실은 그가 이 세상에서 나에게 가장 매력적인 남자라는 사실이다. 거품을 다 걷어 내고 나를

마셔도 내게서 청량감을 느껴주는 사람, 나는 그에게 죽을 때까지 연애 감정을 느낄 것 같다. 더러는 욕도

하고 보따리도 싸지만, 다음엔 정말 그를 위해 묶었던 머리를 풀고, 가장 날씬해 보이는 옷을 입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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