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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제의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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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공덕수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90회 작성일 18-06-25 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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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소변이 마려워 변기에 앉으니, 늙은 변기가 임종이라도 맞는지 쉐쉐 소리를 내며 헐떡거리고 있었다. 변기 속의 물을 고이게 만드는

프라스틱 두껑이 배수를 끝낸 후 뒤집어져서 제 자리를 찾지 못하기 때문인 것 같았다. 화장실 표면이 반듯하지 못해서 걸핏하면 복통을 앓듯 빨랫감을 소화 시키지 못해 덜컹거리며 안절부절 못하는 세탁기와 이 앓는 소리를 내는 냉장고, 가난은 소리가 부자다. 가난은 손이 많이 가고, 불평이 많고, 나의 간섭과 관여를 원한다. 수제 돈가스나 수제 햄버그가 잘 팔리고 비싸게도 팔린다는데 손이 많이 가는 수제의 삶은

왜 동정이나 경멸의 대상이 되는지 모를 일이다. 머리는 바닥에 엎드려 큰 절하듯 감아야 하고, 고양이가 먹던 음식물이 떨어지면 이내 개미가 끓는 마당은 자주 쓸어야 하고, 제 숨도 들여 마시기 힘들어하는 진공 청소기를 모셔 두고 빗자루를 쓰야 하고, 바닥은 무릎 꿇고 닦아야 하고, 삐꺽삐꺽 무겁다고 투덜거리는 침대는 매트리스가 뒤틀려 한숨 자고 나면 침대 커버를 매만져 주어야 한다. 가난은 울퉁불퉁하고 변수가 많고, 틈도 어긋남도 많다. 나는 가난이 체질인지 가면 갈수록 이 가난에 정이 든다.  마루를 딪으면 마루가 신음 소리를 내고, 비라도 내리는 날엔 집 전체가 낡은 악기처럼 소리를 내고, 아이처럼, 개처럼 신이 난다. 가끔 부자는 아니라도 가난하지 않은 친구집에 놀러가면 무슨 재미로 사나 싶어지기도 한다. 세탁기나 청소기나 냉장고나 뭐든 서로 눈치를 보며 소리를 내지 않는다. 바닥은 밟혀도 소리를 내지 않고, 전등이나 형광등은 영원한 태양이나 달처럼 켜지고 꺼진다. 안방에서 형광등이 수명이 다하면 옷방 것을 반만 빼어다 끼우고,  주방 것이 고장나면 마루의 형광등을 통째로 빼다 끼우는 게으런 남편도 없다. 몇 번을 꼈다 켰다해야 인형 뽑기에서 만원을 넣어서 겨우 인형하나 뽑듯 불이 켜지는 요행도 바랄 수 없다. 전문가가 구색 맞춰 바른 벽지는 주부의 감각을 원하지 않는다. 개가 오줌을 싸서 지도를 그려놓은 벽에 영화관에서 얻어 온 영화 포스트나, 식당에서 얻어온 영문이 잔뜩 쓰인 튀김 종이를 바르는 일은 꿈도 꿀 수 없다. 베란다에서 유리창을 넘어 온 창백한 햇살에 마르거나 빨래 건조기에서 마른 빨래는 햇빛을 정면으로 쬐고 종일 바람 속에서 뛰어 논 빨래들이 갖는 풀기가 없다. 요즘 같은 날씨에 제 때 빨래를 걷으면 맡을 수 있는 햇빛 냄새는 가난이 내게 뿌려주는 향수다. 우리가 이사 오기 전부터 살고 있던 고양이도, 어디서 밥 잘 준다는 소문을 들었는지 새끼를 물고 이사오는 고양이도, 그 고양이가 어엿한 처녀가 되어 떡하니 임신을 하더니, 쥐새끼만한 새끼를 세마리나 낳은 어제도 없다. 어디서 애비 모를 아이를 임신한 딸 산구완을 하듯 미역국을 끓이고 물방울이 어린듯한 새끼 고양이 발만 빼꼼히 보이는 고양이 집앞에 놓아주는 시간 많은 남편은 더우기 없다. 돈이 없어 어쩌나,  더 좋은 차가 없어 어쩌나, 더 좋은 일이 없어 어쩌나 하는 걱정은 없고, 저 눈도 못 뜬 것들이 꼬물거리다 요구르트 통 집에서 굴러 떨어지면 어쩌나, 요구르트 통에 돌을 얹어 고정 시킨 츄리닝 커튼을 고양이가 당겨서 돌덩어리가 떨어져 다치면 어쩌나, 한심한 걱정들 뿐이다. 가난은 구멍 숭숭한 막걸리 빵 같고, 대바늘로 뜬 뜨개 옷 같고, 언제라도 접고 떠날 수 있는 텐트 같다. 밤이면 또 어떤 고양이가 몰래 내지른 새끼들이 뛰어다니는지 지붕마저 살아 있다고 심장을 쿵쾅 거린다. 밤 열두시까지 일을 하느라 커피를 석잔 넉잔 마셔도, 천정이 아무리 두근거려도 나는 잠만 잘 잔다. 시간 많은 남편은 밤 늦게까지 일하는 아내가 짠하고, 그나마 몸 꿈적여서 돈이라도 벌어오는 아내는 수입이 변변챦아서 쪽도 못쓰는 남편이 짠하다. 재산이라고는 닥치는데로 모아놓은 책들 뿐인데 어쩌다 책장 정리를 하면 내책이다 하며 맘대로 그은 밑줄이나 여백에 아무렇게나 갈겨놓은 낙서들은 타임머신과도 같다. 나는 서른 살로도 마흔 살로도 자유자재로 이동한다. 미래란 별로 가보고 싶지 않은 여행지다. 지도도 이정표도 없는 나라는 무섭다. 가난은 수타면이나 수제 돈까스처럼 힘을들이고 땀을 흘리고 내도록 손이가야하는 삶이다. 그래서 맛있고 식감이 쫄깃쫄깃하다. 하루 하루가 찍어낸 것처럼 똑 같지 않다. 번듯한 아파트에 새끼를 세마리나 낳은 고양이가 어디에 묻어 두었던 새끼들을 한마리씩 물고 오는 이변은 없을테니까. 피할 수 없다고 즐기는 것이 아니다. 나는 진정 이 수제의 삶이 풍요롭고 싱싱하게 느껴진다. 녹초나 파김치가 되어 볼 수 있고, 소르르 바닥에 스며들듯 잠이들고, 푹 잔만큼 투명한 정신으로 눈을 뜰 수 있는 것이다. 마당에 스치로폴 박스와 버려진 화분에 심어 놓은 풋 고추가 많이 열려서 국수를 끓여 먹을 때 몇 알 따서 된장에 찍어 먹었다. 풀약을 치지 않은 상추와 깻잎도 지척에 있다. 주인집 할머니는 감자가 수북이 담긴 대야를 신발장 위에 올려 놓았다. 산딸기와 양파도 얻어 먹었다. 남편은 다리 아픈 노인 부부를 트럭에 태워 어디라도 모셔다 드린다. 동네 할머니들은 다 쓰러져 가는 집에 사는 늙은 새댁에게 관심이 많은 것 같다. 인사를 꾸벅하고 오전반 출근을 하고 오후반 출근을 하면, 뒤통수에 피가 몰린다. 나는 빨강머리 앤처럼 큰 모자를 쓰고, 펄렁펄렁 고무줄 바지를 입고, 온 몸에 속옷처럼 바람을 들이며 유월의 햇빛 속으로 걸어간다. 밤새 새끼들이 잘 잤는지 고양이네 집을 들여다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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