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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가만히 서서 멸치똥이나 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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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공덕수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240회 작성일 18-11-02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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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바람이 나면 노가다라도 가겠다던 남편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는다.

돈 때문에 싸움이 나면, 싸움을 마무리하는 의식처럼

찬바람 분지가 언젠데 아직도 돈 벌러 나가지 않느냐고 닥달을 한다.

그리고는 화가 나서 말을 하지 않는 그가 안스러워서 사과를 한다.

오늘 그는 일당 9만원을 받는다는, 감을 따는 아르바이트를 하러 나갔다.

나보다 일찍 일을 나서는 남편에게

"여보! 잘 다녀 오세요" 같은 인사를 하는 것이 익숙치 않다.

사실 우린 너나 없이 높임말을 쓰지 않는다.

기껏해야 그의 가족들이 있으면 이름 뒤에 씨를 붙이는 것이고,

그는 뭐라고 부르기도 어색한지 아예 말을 잘 걸지​ 않는다.

사람들은 남편의 나이가 어릴수록 높임말을 쓰주는 것이 좋다고 하는데

높임말을 쓰지 않아도 마음으로 그를 낮춰 생각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나는 생각한다. 범죄 하기전 최초의 사람 부부처럼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서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우리 관계의 매력이다. 가끔 돈 문제로 으르렁

대기도 하지만 뒷모습만 보아도 얼굴의 표정이 다 읽히는 우리는 사이가 좋다

궁합이 잘 맞다는 말을 실감한다. 금새 지긋지긋도 해지지만 조금만 떨어져

있으면 금새 그리워지는 것이다. 내가 화냥끼가 좀 있어 다른 남자와

술도 마시고 놀러도 가는 꿈을 꾸기도 하지만, 그를 속여야 한다고 생각하면

모든 용기가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사깃꾼을 속이는 것보다 순수한 사람을

속이는 일이 더 어렵다. 감나무 꽃을 솎으러 갔다 칠단 사다리가 미끄러져

두번이나 땅바닥에 굴러 떨어져 본 적이 있는데다, 감나무가 목질이 약해

사람들이 많이 다친다는 말을 들어서, 뜨끈뜨끈한 전기 장판에서 등도 떼지 않고

조심하라는 말만 하고 다시 잠이 들어 버렸다. 드라마 같은데서 출근하는 남편을

대문 밖에까지 바래다 주는 아내들을 많이 보았지만, 갑자기 날씨가 영하로

떨어진 것 같은 아침에 나는 그렇게 훌룡하기 싫다. 내가 그렇게 훌룡한 아내가

아니어도 나를 사랑하는 그를 나는 사랑하는 것 같다.

​지금 등을 떼면 17시간이 지나야 다시 등을 붙일 수 있다는 생각이 전기 장판에

대한 나의 애착을 더 강렬하게 만드는 것 같다. 전기 장판에 맨등을 찰싹 붙이고

있으면 그것 말고는 아무 소원이 없어진다. 이제 별 걱정도 없는 것 같다.

오전반 대학병원 구내식당 일은 병원내 지리가 좀 밝아져서 응급실도 무균실과

심혈관실도 잘 찾아간다. 무슨 까닭인지 배달 수레를 30도 쯤 뒤틀어야 잘달려서

힘이 더 쓰이기도 하지만, 에레베이트를 잘못 타서 전혀 엉뚱한 병동들을 헤매고

다닐때를 생각하면, 지금 나의 배달 속도는 만족스럽다. 무균실 앞에서는 늘

비닐 옷을 뒤집어 쓰고 눈물 범벅이 된 사람들을 마주친다. 누군가 이승을 떠났거나

떠나고 있는 것 같았다.  사람들이 흘린 눈물을 타고 그는 사람을 빠져 나가는 것 같았다.

그들이 어디로 떠나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나는 여전히 30도 각도가 틀어진,

식판 배달차를 몰며, 무사히 지하의 구내 식당으로 돌아 갈 수 있는 것에 대해 안도 하는 것이다.

오늘의 중식 식판을 내려주고, 어제의 석식 식판을 걷어 와서는, 종일 켜 놓는듯한 뜨거운 물에

어제의 찌꺼기들을 털어낸 식판들을 불려 놓고, 중환자실이나 무균실의 누군가는 맞을 수 없는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다. 이삿짐 센터에서 쓰는 커다란 바구니에 가득 담긴 국그릇에 국을 퍼주고,

식탁을 닦고, 컵 따위를 컵 소독기에 나란히 놓고, 티슈를 갈고, 바닥을 닦고, 별 내용도 없는

하루를 연장하고 싶어 한가닥 희망처럼 링거를 팔목에 꽂고, 마취에서 깨어나기 위해 꼬리빗 꼬리로

발 뒷꿈치를 찌르게 하고, 누워서 소변을 보는 것이다. 그런 노력 없이도 내게 하루가 왔으니

감지덕지하며 하루를 살아야 하는 것이다. 마른 밥알 한 알도 굴러다니지 않게 바닥을 닦아야 하는 것은

그들이 그렇게 간절히 원해도 다시는 돌려주지 않은 하루를 신이 내게 허락한 까닭이다. 누구를 마주쳐도

햇빛처럼 웃고, 함께 하는 누구와도 행복하게 지내고, 컨베이어식 식기 세척기에서 밀려 나오는

식판과 그릇들을, 신이 살아 있는 내게 주는 선물로 받아야 하는 것이다.

요즘 오후반 출근 시간은 춥다. 잠깐 눈을 붙이고 일어나는 출근길은 더더욱 춥고 을씨년스럽다.

저녁은 그래도 사람들의 품이 따뜻한지 여느 계절보다 더 빨리 저물어 온다. 달과 일찍 뜨는 별들과

출근 시간이 비슷해서, 늘 그 시간에 마주치는 눈빛들처럼 차창 밖을 향한 내 시선의 끝은 멀고 높다.

호프집 앞에 주차해있는 차들이 많은 날은 욱하고 짜증부터 몰려 온다.

"술 못 쳐먹어서 죽은 귀신이 붙었나"

사실은 술 못 쳐먹어서 죽은 귀신이 붙은 것 같은 내가, 출근도 하기 전에 술집에 쳐박혀 있는 손님들

에게 악담을 퍼붓는다. 그러나 도어벨 소리를 울리며 문이 열리면

"안녕 하세요!"

그래, 오늘 아침 무균실 앞의 그 슬픔들,

이 저녁을 함께 누리지 못해서 그랬던 것 아닌가?

이 아무 내용도 없는, 뻔한, 별 볼일 없는,

손님이 없으면 그냥 가만히 서서 멸치 똥이나 까는...

이 모든 아무것도 아닌, 뻔한 것들이

사실은 신이 살아 있는 자들에게 주는 선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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