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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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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배야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493회 작성일 17-08-17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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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아직 알려진 바가 없고 지금으로서는 단지 그가 아주 오래전에 살았다는 사실만이 우리들에게 희미하게 남아 있을 뿐이다. 그는 주로 풀 한 포기 없고 물 한 모금 마실 수 없는 꽤 황량한 곳에서 명상을 하는 것을 즐겨했고 그가 그럴 때면 모든 짐승들과 새와 비와 바람은 그에게 결코 다가오지 아니하였다.
하지만 그에게는 말 못할 고민이 있었다. 도무지 살아도살아도 재미가 없었던 거였다. 그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나 대화할 수 있는 짐승과 새가 있었지만 그는 내심 그 대화가 지루할 뿐이었고 그러고 나면 늘 쓸쓸한 기분에 젖어 풀밭과 호수 가를 아무런 생각 없이 거닐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그 날도 풀밭과 호수 가를 거닐면서 어떻게 하면 좀 더 즐거워질 수 있을까를 골몰하고 있을 때였다. 여느 날처럼 호수 가에 서 있는 큰 나무에 손을 짚으면서 그는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아, 내게도 진짜 친구가 있었으면 ... ”
이제는 정말로 참을 만큼 참았다고 생각했던 터였다. 그는 나무줄기에 기대다가 이내 털썩 주저앉고 만다. 너무나 오랫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고 그 생각만 했던 것이었다. 이내 저절로 눈이 감기고 그는 참으로 오랫동안 그렇게 앉아 있었던 것 같다.
그 시간이 얼마나 되었는지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다만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땐 그는 너무나 기력이 쇠하여 제대로 앉아 있을 수조차 없게 되어 버렸다. 그는 풀밭에 엎드렸다가 다시 눈을 감는다. 이제는 아예 앉아 있을 수조차 없게 되었구나, 차라리 이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풀 냄새를 가까이 맡아보기도 참으로 오랜만이 아니었던가. 그는 풀에서 나는 어딘지 모를 고소한 냄새를 맡으며 또 그렇게 오랫동안 눈을 감고 있었다.
그를 잠에서 깨운 건 불곰 한 마리였다.
“이 보슈, 사람양반?”
“뭐?”
“내 청 좀 들어주시오.”
“뭐 청이라고?”
“그래요.”
나는 일어나 앉았다. 이상하게 힘이 솟아나는 것 같았다.
“그래요. 무슨 청이 길래?”
“나 말이오. 오늘 저 물 속에 한번 들어가 보고 싶소이다. 한 번도 들어가 보지 못했는데 당신이라면 충분히 도와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소이다.”
“무 무 물속이라고?”
“그래요.”
“그건 한 번도 안 해봤는데.”
“그건 나도 잘 알고 있소. 당신이 여기 엎드려 있는 동안 내가 쭉 보아왔지만 당신은 결코 그걸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소.”
“그런데 왜.”
“그냥 해주었으면 하오.”
그는 잠시 불곰 얼굴을 쳐다보다가 이내 정색을 하고는 일어섰다.
“불곰 양반 나는 그것을 해 줄 수 없소. 그것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을뿐더러 지금은 배가 너무 고파서 뭘 좀 먹어야하오.”
“그럼 기다리겠소.”
“마음대로 하시오.”
나는 다시 일어나 걷기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힘이 솟아나는 게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예전에 자주 다니던 길을 따라 갖가지 식물들이 무성하게 자라 있는 식물원을 찾아갔다. 가보니, 역시나 그곳에는 아직도 먹음직한 것들이 많이 있었다. 나는 먹을 것 두개를 집어 들고 다시 호수 가로 걷기 시작했다. 참으로 기분 좋은 날이다. 내가 엎드려 있다가 한 번에 일어나 걷게 된 것도 좋지만 무엇보다 좋은 건 내게 말벗이 생긴 것 같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엎드려 있던 호수 가에 돌아와 가지고 온 것을 먹기 시작했다. 가지고 온 것을 다 먹어갈 때 쯤, 무심코 호수 건너편을 보니 아까 그 불곰이 몸을 이리저리 흔들고 있었다. 나는 불곰에게 소리쳤다.
“어이! 불곰양반!”
불곰은 내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지 잠깐 주위를 둘러보다 이내 하던 짓을 계속했다. 나는 먹고 있는 것을 풀밭에 내려놓고 손짓을 하며 다시 소리쳤다.
“어이! 불곰양반!”
불곰은 그제야 나를 알아보고는 방긋 웃으며 내게로 달려온다.
“이 보슈, 이것 좀 드셔보시오.”
“아유 뭐 제게 이런 것까지. 아무튼 고맙소이다, 형님.”
“아니, 방금 형님이라고 했소?”
“아까 사람양반이라고 한 건 미안했소이다, 내가 원채 말을 잘 못해서. 내 처음 볼 때부터 형님으로 생각하고 있었소이다.”
“아, 그래요.”
“아무튼 잘 먹겠습니다, 형님.”
불곰은 내가 준 것을 양손에 들고 한입씩 베어 물더니 만면에 미소를 띠면서 금 새 삼켜 버렸다. 나는 불곰에게 물어보았다.
“어떻소?”
“내 생전 이런 건 처음 먹어봅니다, 형님.”
“아니, 이런 게 있는 걸 몰랐단 말이요?”
“있는 건 알았는데 한 번도 먹어보진 않았죠, 뭐. 저야 늘 사는 대로 사는 거니까요.”
“아, 그렇소.”
“근데 형님, 아까 그 물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어떻게 하면 될지 ... ”
“아, 그거? 내가 오는 길에 생각을 좀 해 보았지.”
나는 불곰을 호수 가로 데려가 같이 쪼그려 앉아서 모래 위에다 뭔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나는 거의 즉흥적으로 호수 바닥을 개략적으로 그리고는, 불곰에게 호수 안쪽으로 계속 걸어 들어가다가 너무 깊어서 더 못 들어가겠으면 돌아오면 될 거라고 말해주었다.
불곰은 내 말을 잠자코 듣고도 한참을 가만히 있더니 갑자기 나랑 같이 어디 가보자고 하는 것이었다. 불곰은 내 손을 꼭 쥐고는 천천히 호수 가를 벗어나, 숲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무언가 강한 힘 같은 것을 느끼며 마치 어미에게 붙들린 새끼마냥 따라가고 있었다. 나는 이상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이 불곰이 누구란 말인가? 난 분명, 이 불곰을 처음 보는데 어찌 이리도 가깝게 느껴진단 말인가? 난 얼굴을 돌려 불곰을 유심히 관찰해 보았지만 도무지 뭐가 뭔지 하나도 생각나는 것이 없었던 것이었다. 불곰은 말없이 앞만 보면서, 숲 가운데 있는 풀밭으로 나를 데려갔다. 그러고는 나보고 여기서 잠깐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나는 알았다면서,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다고 말해주었다. 불곰은 나를 살짝 보더니, 이내 몸을 돌려 빠르게 숲 속으로 다시 들어가 버렸다.
나는 풀밭에 앉아 보았다. 사실, 나는 오래전부터 이곳을 알고 자주 왔었지만 오늘은 왠지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다는 기분이 드는 것이었다. 나는 풀밭에 엎드려 보았다. 풀에 코를 가까이 대고, 코끝을 간질여 보았다. 그러고 보니 간지러움을 안 느껴본지도 참으로 오래 된 것 같았다. 나는 몸통을 굴려 하늘을 잠시 보았다가 다시 풀에 코를 대 보았다. 이렇게 풀밭에서 뒹굴기를 수차례 하고 있는데, 저 만치서 불곰이 다시 숲에서 나오는 것이 보였다. 나는 씩 웃으며 일어나 불곰을 맞이하였다.
“형님, 나랑 같이 어디 좀 갑시다.”
“어디를 가는데?”
“형님이 도와주셨으면 해서 말입니다.”
“아, 그래. 알았어.”
우리는 다시 말없이 숲길을 걷기 시작했다. 나는 불곰과 함께 걷고 있는 게 왠지 무척이나 편안했고 목적지를 묻지는 않았지만 그 목적지에 대한 생각만으로도 무척이나 설레는 기분이 들었다. 숲은 또 다른 숲으로 이어지고, 그렇게 숲과 숲을 여러 차례 통과한 후에 우리는 어느 공터에서 멈추게 되었다.
불곰이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저기, 형님.”
“어, 왜?”
“전에 여기 땅 속에 조그만 막대기를 묻어놓았는데, 며칠 전부터 이 주변 흙을 아무리 파도 도무지 찾아지지가 않네요. 형님이 혹시 찾아주실 수 있을는지.”
“으-응 함보지.”
나는 공터 한 가운데 약간 솟아오른 흙을 파기 시작했다. 그런데 파도파도 하나도 나오는 게 없었다. 나는 불곰에게 말했다.
“글쎄 이건 잘 모르겠는데. 천천히 두고 봐야 할 것 같은데.”
불곰은 잠시 말없이 가만히 있다가, 내게 커다란 나무 잎사귀를 하나 준다.
“이게 뭐요?”
“거기 내가 그려놓은 그림이 보이지요? 그런 막대기들이 엄청 많이 보관되어 있다는 동굴로 가는 지도를 베껴 놓은 건데, 나는 도무지 그리로 갈 수가 없어서. 대신 가서, 좀 가져다주시면 좋겠소.”
나는 불곰이 그려놓은 지도를 가만히 보기 시작한다. 지도는 여기서 꽤 멀리 떨어진, 초원 너머에 있는 꽤 높은 언덕을 가리키는 것 같았다. 나는 말했다.
“저기 불곰양반. 이건 좀, 계획을 세워서 출발해야 할 것 같은데? 나는 이리로 당장 갈 수는 없다네.”
“그거야 저도 알죠. 생각날 때 한번 가주시면 되요.”
“알았어, 알았어. 그런데 말이야.”
“네.”
“그 막대기가 왜 필요한지 물어도 되나?”
“아, 그건. 제가 어릴 적부터 갖고 놀던 거라서, 일종의 향수랄까 중독이랄까 뭐 그런 거죠.”
“알았네.”
나는 불곰에게, 가급적 빠른 시일 내에 출발하도록 할 터이니 조금만 기다려보라고 했다. 불곰은 알았다면서 급히 할 일이 남아 있다며 우리가 걸어왔던 길로 혼자 되돌아가 버렸다.
조그만 공터 위에 혼자 남은 나는 생각했다.
‘아무래도 지금 당장 출발해야겠다. 불곰도 불곰이지만 내게 또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 가급적 빨리 해결해 놓는 게 좋을 거야.’
나는 불곰이 베껴 놓은 지도를 자세히 살펴보면서 막대기들이 많이 있다고 하는 정확한 지점을 가늠해보기 시작했다. 살펴보니 그곳은 내가 헤매지 않고도 충분히 갈 수 있는 곳일 것 같았다. 나는 당장 주위에 떨어져 있는 잎사귀로 끈을 만들어 양 어깨에 감아 두고 한 어깨에는 지도를 끼워 넣고 그곳으로 출발했다.
한 참을 가는데 조금씩 추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또 떨어져 있는 커다란 잎사귀들을 모아 몸을 조금 감싸고는 다시 걸어가기 시작했다. 얼마 안가서 지도에 나와 있던 초원에 다다랐고 그곳에서 나는 잠시 초원의 풍경에 넋을 잃고 말았다.
거기엔 풀만 있는 게 아니라 갖가지 색깔의 꽃들이 이곳저곳에 화사하게 피어있었던 것이었다. 꽃들이 많은 곳으로 가까이 가보니 꽃 하나하나는 너무나 수수하게 보여서 나는 이것이 정말 가능하다는 것에 대해 새삼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한 참 꽃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문득 나는 하늘의 색이 조금씩 달라지는 것을 보고는 다시 지도에 나와 있던 언덕으로 출발하기 위해 일어섰다. 저녁이 되면 초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추워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언덕은 금 새 나왔다. 나는 지도에 나온 그 동굴 앞 비탈진 곳을 찾아 가기 시작했다. 비탈을 걷는 건 그리 힘들진 않았고 오후의 산바람은 나를 더욱 기분 좋게 만들어주었다. 마침내 지도에 나온 그 지점에 상당히 근접했다고 생각할 때 쯤, 멧돼지 한 마리랑 마주치게 되었다. 나는 멧돼지에게 물어보았다.
“저기 여기 주변에 혹시 막대기가 많이 보관되어 있다는 곳을 아시오?”
“아, 막대기요. 그거 저쪽 동굴 안에 모아져 있는 걸 내가 본 적이 있수다. 그런데 그걸 왜 찾으시오?”
“아, 내가 아는 친구가 그걸 좀 구해 달라고 해서 내가 찾으러 온 것이오.”
“아, 그렇다면 더 좋은 방법이 있소.”
멧돼지는 여기서 조금만 더 올라가면 아주 큰 나무가 하나 있는데 거기 밑에 막대기가 많이 떨어져 있을 거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고맙다고 하면서 서둘러 그 나무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가보니 과연 막대기들이 많이 떨어져 있었다. 나는 가져갈 만한 막대기를 챙겼다. 그러고 나니 참으로 뿌듯한 기분에 그 나무 밑에 앉아 잠시 앞에 보이는 경치를 내다보기 시작했다. 구름이 천천히 흘러가는 하늘. 나는 문득 그것이 참으로 낯설다고 느껴지기 시작했고 나는 이것이 어떤 하나의 새로운 무언가가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좀 있으니 하늘이 노랗게 물들기 시작했다.
나는 어느새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좀 싱거운 노래였지만 계속 부르면 나름 흥이 나는 노래였다. 그렇게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는데 새 한 마리가 내게 다가온다.
“그 노래는 무슨 노래야?”
“응, 내가 옛날부터 자주 불러보던 노래야. 그런데 너는 노래 부를 줄 아니?”
“응, 나는 노래 말고 소리를 낼 줄 알아. 맑고 청아한 소리, 그런 걸 나는 좋아하지.”
“아, 그렇구나! 그러면 네가 소리를 내 주면 내가 거기 맞추어서 한번 노래를 불러 볼께.”
“응, 좋아. 자, 내가 먼저 할게.”
새는 조금씩 목청을 가다듬더니 이내 내가 익히 들어본 적 있는 참으로 아름다운 곡조를 들려주었다. 나는 그 곡조에 맞추어 아까 흥얼거리던 노래가사를 붙여 부르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렇게 꽤 오랫동안 호흡을 맞추어 가며 즐겁게 시간을 보냈다.
얼마 안 가 하늘은 형형색색으로 완전히 물들고 새는 잠시 가 볼 데가 있다면서 자리를 떴다. 나는 다시 혼자 남았다.
나는 앉은 자리에 누워 보았다. 저 위로 불그스름한 하늘이 보이고 그 앞에 나무 가지의 끝 부분이 살랑거리는 바람에 살짝 흔들리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하늘과 나무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느낌을 갖게 하는 것 같았다. 마치 하루 종일 바로 이때를 기다려왔다는 것처럼 나무는 그지없이 아름답게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주려는 것 같았다. 나는 행복했다. 여태 이처럼 행복했던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나는 잠시 눈을 감아 본다.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며 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그, 시간을 재촉하는 것 같으면서도 스스로는 결코 서두르지 않는 느낌. 나는 시간이 이미 정점에 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렇게 눈을 감고 한참을 있으니 뭔가 내 마음이 어딘가로 두둥실 떠가는 것 같았고 나는 도무지 눈을 감고 있을 수만은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눈을 떠보니 아니나 다를까 캄캄한 하늘 가득 하얀 별들이 가득 빛나고 있었다. 아, 얼마나 황홀했던가. 나는 처음으로 저 별들로 올라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하얀 초승달이 보이고 나는 그 초승달을 타고 세상을 여행하는 생각을 하면서 어느새 잠이 들었다.

* *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다. 나는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으로 얼굴을 돌리려다 잠에서 깨어났다. 깨어나 보니 어제 저녁 무렵 보았던 그 새가 옆에 쪼그리고 앉아 나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살짝 웃으며 밤새 잘 지냈느냐고 물어보았다. 새는 잘 지냈다고 하면서 내가 잠자고 있는 것을 쭉 지켜보고 있었다고 말했다. 나는 싱긋하고는 일어나서 기지개를 켰다. 하늘을 보니 이미 해는 떠 있었고 나는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막대기를 지도가 없는 다른 쪽 어깨의 끈에 끼웠다. 새에게 이제 내가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니까 새는 어딘가에서 떠온 마실 물을 커다란 잎사귀에 담아서 내게 건네주는 것이었다. 나는 그 물을 마시고 새에게 인사를 하고 다시 길을 나섰다.
그렇게 다시 왔던 길로 언덕을 내려가고 있는데 어제 보았던 멧돼지가 어디선가 나와서 말을 걸어왔다.
“밤새 잘 있었는가?”
“그럼요, 덕분에 좋은 막대기 구했죠.”
“하하, 내가 어제 말은 안했지만 자네가 찾으려고 한 동굴 속의 막대기들은 사실 내가 모아 놓은 것들이었다네.”
“아, 그랬어요? 어쩜, 그것들을 어떻게 동굴에 모아놓을 수 있었어요?”
“다 방법이 있지.”
“야, 궁금해지는데. 저 같으면 몇 번을 올라갔다 내려가야 조금 모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떻게 모아놓은 거예요? 하하, 궁금해.”
“그럼 나를 따라오게나.”
나는 멧돼지를 따라서 다시 나무 있는 곳으로 올라가보았다. 멧돼지는 나무 뒤쪽으로 슬쩍 가더니 나보고 따라오라고 말하면서 높이 자란 풀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나는 멧돼지를 따라 내 키 정도 되는 풀 속을 조금 헤치고 나아갔다. 얼마 안 가 조그마한 입구의 동굴이 보이고 그곳으로 들어가니 참으로 맑은 지하 연못이 거기에 있었다. 나는 환하게 미소 지으며 아침에 새가 내게 건네주었던 마실 물이 생각이 났고 멧돼지는 그 안으로 좀 더 들어가더니 자신의 진짜 집이라면서 위로부터 빛이 비쳐오고 바닥이 평평한 지하 공간으로 나를 안내했다. 멧돼지는 거기서 커다란 잎사귀에 마실 물을 담아서 내게 건네주었다. 나는 물을 마시면서 멧돼지에게 이렇게 좋은 곳으로 데려와줘서 너무나 고맙다고 말하니까 멧돼지는 이게 다 저 큰 나무 덕택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껄껄 웃으면서 멧돼지와 담소를 나누었고 꽤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다.
얼마쯤 흘렀을까. 갑자기 빛이 어두워지더니 천장으로부터 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비가 오나 보다 하고 멧돼지에게 잠시 더 머물러도 되겠냐고 물어보았다. 멧돼지는 머물러도 좋은데 더 재미있는 걸 보여 주겠다며 또 따라오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멧돼지를 따라 동굴의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겨우 몸을 수그리고 들어가 보니 이번에는 빗물로 넘쳐난 연못물이 더 깊은 곳으로 흘러들어가는 게 보이는 데 이르렀다. 멧돼지는 한쪽 눈을 찡긋하면서 옆에 있는 조그만 통나무 두 개 중 하나를 내게 주면서 이것을 꼭 잡고 있기만 하면 된다면서 자기 따라서 흐르는 물을 타고 밑으로 내려가자는 것이었다. 나는 알았다면서 고개를 끄덕했고 멧돼지를 따라서 밑으로 슬슬 내려가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흐르는 물이 양이 꽤 되는 곳에 이르러서 멧돼지는 통나무를 잡고 미끄러져 내려가기 시작했고 나도 조금 기다렸다가 그를 따라 미끄러져 내려갔다.
분명 그 내려간 거리는 그리 길지 않았다. 사실 엄청 짧았다. 그런데 다시 조그만 지하 폭포를 거쳐 어떤 연못에 떨어지고 나니까 나는 이것이 무척이나 재미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멧돼지도 다시 타보자는 듯한 표정으로 다시 그 옆의 어떤 경사를 따라 올라가는 것이었다. 나는 어깨에 끼워 놓은 지도와 막대기를 내려놓고 그를 따라 그 경사를 조금 올라가니 처음에 통나무가 놓여 있었던 바로 그 곳에 이르렀던 것이다. 나는 다시 그를 따라 미끄럼을 탔고 그렇게 몇 번을 타고 또 탔다.
한참을 타다 보니까 어느 샌가 수량이 너무 줄어들어 있었다. 나는 멧돼지에게 그만 타자고 했고 멧돼지도 고개를 끄덕여 우리는 함께 물에서 나와 지도와 막대기를 두었던 아래쪽 연못 가에 같이 앉게 되었다. 나는 멧돼지 옆에서 무심히 말하기 시작했다.
“그런데요, 이 물. 이 물이 왜 이렇게 맑은 걸까요?”
“역시 자네는 똑똑해, 내가 처음 봤을 때부터 알아보았다니까. 나야 모르지, 그냥 오래전부터 그래왔고 뭐 그런 것을 생각할 만한 무언가가 내게는 없으니까. 그래, 자네는 그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글쎄, 뭐. 언덕과 물이 만나서 물이 맑아질 수도 있을 것 같고, 또는. 그치, 그러고 보니 그것 밖에 없네. 그러네!”
“듣고 보니 자네 말이 맞는 것 같네, 허허. 내가 평생을 여기서 살아와도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 본적이 없었는데, 자네 말을 들으니 그게 맞네. 그래 맞아.”
“뭐, 그냥 제 생각이죠. 뭐.”
나는 다시 말을 걸어보았다.
“그런데 언덕은 왜 경사가 졌을까요?”
“하하, 그건 더 모르겠는데. 물이야 마시면, 그치? 맑은 물을 마시면 맑은 걸 아는데, 언덕이 왜 경사가 졌는지는 한 번도 언덕을 벗어난 적이 없으니까. 안 그래? 자네는 참 언덕에도 별로 안 와봤으면서 어떻게 그런 질문할 생각을 하지? 하하, 참 영특해영특해. 나는 절대 할 수 없는 일이지. 그래, 이번에도 자네 생각을 한번 듣고 싶은데?”
“으-음, 글쎄. 언덕이 왜 경사가 졌을까요? ... 음, 그건 모르겠는데. 정말 모르겠어. ... 음, 아. 그런데 그 저 아래 동굴에 모아놓았다는 막대기들! 그건 어떻게 옮긴 거예요?”
“그야 우리가 탔던 그 물 미끄럼, 비올 때마다 내 뒤에 조금 씩 묶어두고 타고 내려온 거지 뭐. 별 수 있겠어?”
“응, 그랬구나! 그러니까 높은데 있는 거를 낮은 평평한 곳으로 옮기라고 경사가 진거네, 그러네. 그러니까 하늘 가까이에 있는 거를 평평한 데로 옮기라고 언덕이 경사진 거네.”
“야! 자네는 정말 대단해! 대단해! 어떻게 그렇게 짧은 시간에 그걸 다 맞출 수가 있지? 와, 나는 이제 말을 못하겠네. 내가 알고 있는 거를 자네가 금방 다 알아버렸으니, 허허.”
“히, 뭐. 별 건 아닌데.”
“그런데 말이야, 자네.”
“네.”
“요새 이 근방에서 그나마 얼마 있지도 않는 풀들이 계속해서 더 말라죽어가고 있는데, 내가 듣기로 저 앞 초원에 가면 풀과 풀꽃들이 아주 그냥 잔뜩 있다고 하다고 하더라고. 응? 혹시 그 이유는 아는가?”
“아아, 그거야 뭐. 여기는 그냥 물이 흘러 내려가 버리고 거기는 물이 흐르지가 않잖아요. 그러니까 풀들이 그냥 그렇게 잔뜩 있는 거지요.”
“야, 그러네! 그래. 그러니까 여기는 하늘 가까이에 있는 무언가를 초원으로 전해주기만 하면 되는 곳이네, 그치. 그렇지?”
“글쎄, 그것은. 좀 뭐랄까, 언덕에는 그런 것만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렇지 않아요?”
“그런 것도 같네, 응. 아무튼, 말해줘서 고맙네. 나 그것이 항상 궁금했거든. 야, 오늘 참 많은 것들을 알게 되는 거 같네. 참 고맙네, 젊은이.”
“저도 고맙죠, 어르신. 그런데 이제 슬슬 길을 떠나야 할 것 같아요. 아는 친구한테 전해주어야 할 게 있거든요.”
“응, 그래. 그래, 어서 출발해 젊은이. 아까 말한 초원 쪽으로 갈 거지? 그러면 요 뒤쪽으로 돌아서 내려가면 금방 내려갈 수 있어. 어서 출발해. 내가 언덕이 거의 끝나는 곳까진 배웅해 줄 수 있어. 가자고, 어서.”
나는 멧돼지와 함께 언덕을 내려갔다. 멧돼지는 언덕이 거의 끝나는 데쯤 이르러 내게 몸조심하라면서 초원에서는 길을 잃지 않아야 하는 거라고 거듭 말하며 내 손을 꼭 잡아 주었다.
나는 멧돼지에게 지도보고 온 길이니까 문제가 없다고 말하면서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다시 언덕으로 오겠다고 말하면서 멧돼지 곁을 떠났다.
나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얼마쯤 걷다보니 갈증이 심하게 나기 시작했다. 너무 많이 놀았고 너무 많이 말해서 그런지 이번엔 몸에 정말 힘이 하나도 없는 거 같아 도무지 이대로 그냥 참고 가서는 안 되겠다 싶었다. 나는 초원에 앉아서 다시 한쪽 어깨에서 지도를 꺼내 살펴보기 시작했다. 지도에는 초원 바로 위에 아주 조그맣게 언덕 같은 게 하나 그려져 있었는데, 그것도 아랫부분만 조금 그려져 있어 언덕이 얼마나 큰지는 지도로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가만히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이 언덕에 정말 마실 물이 충분히 있을까? 혹시 너무 조그만 언덕이라 마실 만큼의 물이 아예 없던지 아니면 한참을 찾아 헤매야 하는 것일까? 나는 앉은 자리에서 이리저리 생각해보아도 도무지 결론이 나지 않는 것이었다. 어디로 가야 할까? 나는 무심코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초원의 참 특이한 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불곰을 만날 때 통과해 이리로 오게 된 숲 쪽 말고 세 방향에 모두 언덕이 있었던 것이었다. 가만히 보니 그 높이가 모두 거의 비슷한 것이 마치 누가 일부러 그렇게 만들어놓은 것처럼 참으로 절묘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둘러보고 있는데, 숲 쪽에서 어떤 아주 약한 바람 같은 게 불어오는 것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순간, 나는 숲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이제는 지도를 볼 필요도 없었다. 일단 숲에만 들어가면 이미 내가 익히 알 수 있는 곳일 거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나는 저 멀리 숲까지 이르는 가장 짧은 경로로 곧바로 달려갔다. 어차피 초원에는 길이 따로 없지 않은 간 말이다. 나는 마치 도움닫기 해야 날 수 있는 새처럼 있는 힘껏 달린 것이다.
달려가는 데 바람이 더욱 세게 느껴졌다. 바람은 내 앞에서 나를 향해 불어왔는데, 나는 오히려 그것이 갈증에서 나를 더욱 편하게 해줄 것 같아 멈추지 않고 계속 달려 나갔다. 어차피 멈추어 봤자 마실 물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가급적 빨리 숲으로 들어가는 것이 오히려 더 나을 거라는 판단도 있었다. 그렇게 곧장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려는 듯이 나는 질주를 이어간 것이다.
숲 가까이에 이르자 바람이 갑자기 멈추었다. 나도 달리는 것을 멈추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이제는 갈증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 것 같았다. 초원의 끄트머리에 이르자 더 이상 풀은 보이지 않았고 그저 모래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 내 밑에 깔려 있었다. 나는 모래에 찍히는 나의 발자국을 보면서 문득, 내가 이제는 정말 새롭게 출발할 수 있고 어쩌면 그토록 바라던 그 재미있는 무언가도 할 수 있다고 느끼게 되었다. 그 때가 언제 올지는 모르지만 나는 진정 내 생이 참으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나는 아주 천천히 숲으로 걸어 들어간 것이다.

오랜 세월이 흐르자 그 초원과 언덕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오직 나무가 울창했던 그 숲만이 남아 그 어떤 아름다웠던 날을 기억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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