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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백에 이는 바람소리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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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영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03회 작성일 18-11-07 23:21

본문

                    여백에 이는 바람소리 / 김영채

                                                  

 

   숲길을 천천히 걷는다. 나뭇잎은 햇살 사이로 나부끼듯 흔들린다. 서로서로 조심스럽게 바람을 맞이한다. 살포시 부는 바람은 가끔 소리를 내기도 한다. 나뭇가지들로 뒤엉킨 틈새로 보이는 하늘빛 공간에 바람소리는 머물다 간다. 나뭇잎이 흔들릴 때마다 물결이 흘러가듯 혼자만의 시간은 머뭇거릴 수 없었다.

   일상생활 속에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란 존재는 무심히 머물러 있어야 하는가? 머물다 보면 알 수 없는 공허의 어두운 늪 속에 빠져버릴까? 머물 수 없어 나그네 같은 길을 떠나가고 싶다. 시간이란 지나간 과거를 기억하게 되고, 현재에도 한순간 머물 수 없다. 또 미래를 향해 앞서 가려고 한다.

   인생을 돌이켜보면 삶의 끝마무리를 향해 언제 종착지에 도달 할지 모르지만, 터벅터벅 종점을 향해 걸어가는 여정이다. 그 여정 속에 길을 가다보면 싱그러운 봄바람이 불어올 때는 마음이 들뜨기도 하고, 갑자기 비바람이 폭우를 쏟아내어 두려움에 빠지기도 하고, 소슬바람이 부는 가을엔 가는 길을 멈추고 자신을 반추해보기도 한다. 그리고 매서운 바람 속에 흰 눈이 내리는 겨울엔 자기 꿈을 더 높이 간직해본다.

   이런 과정을 지나오면서 무수한 일들과 만나게 된다. 쉽게 다가오는 슬픔과 기쁨, 노여움과 즐거움, 다툼과 화해, 미움과 사랑이 상대방과의 관계에서 가져오는 감정이라면 생노병사(生老病死) 즉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어가고 이런 과정들은 자기에게 가져오는 본래적인 인생여정이다. 이 여정에서 한포기 잡초처럼 살아가는 나약한 존재자로서 나를 다시 바라보고 싶었다.

이런 때 좀 부족하고 덜 채워진 동양화 화폭에 숨겨진 여백을 찾게 되고 여유로움과 시간의 흐름을 지켜 볼 수 있었다. ()에서도 싯귀절에 담겨있는 여백 속에는 자유로운 상상과 독백은 그 자신 만의 시어(詩語)를 재창조하게 되기도 한다. 우리고유의 춤사위에서도 장단가락에 맞춰 휘어지는 몸짓 사이로 좁은 공간적인 여백은 율동의 아름다움으로 재탄생한다. 내안에 텅 빈 채로 자리하고 있는 동공에 때 아닌 바람소리가 속삭이듯 들려온다. 바람이 몰고 오는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으면 그 속에는 물소리, 새소리, 낙엽소리, 휘파람소리 온갖 소리들이 뒤엉켜 잠들어 있던 침묵을 깨운다.

   그러나 들리지 않은 소리가 있었다. 깊은 가슴 속에 여울져 밀려오듯 들여오는 영혼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 소리를 찾아야 했다. 찾아야만 한다고뇌에 깊이 빠질 때마다 대장간이 떠오른다. 유년시절 학교 가는 길목 대장간에서는 늘 쇠망치 소리가 들려왔다. 뻘겋게 달구어진 쇳덩이를 연신 내리친다. 마냥 쇠망치로 내리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소리의 높낮이, 장단에 맞춰 두드리는 쇳소리는 무심코 지나가려는 발길을 멈추게 한다

   대장장이는 풀무질로 활활 불질을 올리다가 화덕에서 뻘겋게 달궈진 쇳덩이를 꺼내 모루에 올려놓고 두세 명이 연신 내리치다가 물속에 넣어 담금질을 한다. 반복적으로 담금질을 하며 쇠의 강도를 높이거나 성질을 조절한다. 다듬어진 쇳덩이를 구부리고 쉬며 쇠스랑, 곡괭이, 호미, , 칼 이런 도구의 쓰임새에 맞게 만드는 작업은 결코 쉽지만은 않다. 불질의 위험 속에서 달구어진 쇳덩이를 잘 다루기 위해서는 오랫동안 고된 작업과 끈기로 숙련된 솜씨를 잘 갖추어야 한다. 대장장이들이 숙련도를 쌓아 만들어낸 도구에는 땀방울 적신 그들의 혼이 깃들어 숨 쉬고 있지 않겠는가. 혼신의 힘을 다하여 만든 도구가 비록 아름다움답진 못해도 쓰임새에 맞게 만들어 낸 투박한 도구는 그들의 삶과 영혼이 녹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만에 쇳덩이를 다듬는 쇳소리의 울림이 강한 파장을 일으켜 일상 속에 파묻혀 잠자던 내 영혼을 깨웠는지 모른다. 나이 든 세월은 매일매일 출퇴근해온 직장생활을 마감하게 했다. 간혹 술에 푹 절여진 채 단조로운 일상의 굴레에서 벋어나고자 발버둥도 쳐보았다. 늘 갖고 싶었던 시간적 여유와 얽매이지 않은 나만의 자유를 가져보고 싶었다. 시간은 점점 흘러갔다. 계절도 쉼 없이 바뀌어 갔으나 뭔가 허허로운 공간 같은 여백은 아직도 동공으로 남아 나를 아프게 한다.

   늦가을로 접어든 숲길은 스산했다. 바람결에 낙엽은 길섶 위로 흩날렸다. 숲길을 걷자니 하늘로 쭉 뻗은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흔들렸다. 나뭇가지 사이로 이는 바람소리, 내 아픈 동공 속을 한순간 스치며 속삭이듯 들려줬다. 대자연과 소통하는 자유라고. 한참 묵묵히 허공을 쳐다보았다. 파란 하늘이 더 높고 넓게 보였다. 그렇다. 대자연과 함께 우주에로 소통할 수 있는 자기 내면에 자리한 자유. 또 다른 형식이나 장르에 구애됨 없이 자기존재를 글로 창조해나가는 맑은 영혼의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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