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OME
  • 문학가 산책
  • 오늘의 시

 (관리자 전용)

 
☞ 여기에 등록된 시는 작가의 동의를 받아서 올리고 있습니다(또는 시마을내에 발표된 시)
☞ 모든 저작권은 해당 작가에게 있으며, 상업적인 목적으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작성일 : 17-11-27 10:53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1592  

 


  이선영


 

남은 집 몇 채이려나, 나 여러 채의 집들을 거쳐 왔네

크거니 작거니 높거니 낮거니 했지만

들어앉으면 달리 나설 데도 없는 나의 집이었다네

옥상에서 별을 올려다보던 집

계몽사 50권 세계동화전집이 반겨주던 집

할아버지가 벼루에 먹을 갈아 다리 가는 학을 그리던 방이 있던 집

할머니가 큰솥에 개떡을 찌던 부엌이 있던 집

키우던 고양이가 갓 낳은 새끼들을 숨기려다 목줄에 걸려 죽고

나는 멍하니 창틀에 올라앉아 마당의 후박나무만 바라보던 집

저녁 어스름 귀갓길에 문득 노을빛 조등이 걸렸던 집

아버지에게 대들다 한동안 치마 아래로 종아리가 시퍼렇던 여대생이 살던 집

후두둑 빨간 딱지가 붙고 빚쟁이로 몇날 며칠 눅눅하던 집

퇴직하고 이빨 빠진 아버지가 낡은 소파와 함께 음침한 정물화가 되어가던 집

그 집이 싫어서 한 남자와 도망쳐 나온 집

커다란 모기장을 사면 벽에 걸고 아이들과 한방에서 자던 집

아이들이 자라면서 식탁이 소란스러워지고

기어코 같이 놓일 수 없게 된 수저들이 생긴 집

네 식구가 제 귀퉁이에서 각자 자기 식의 평화를 지키는 집

때로 네 식구 마음 따라 문짝은 어그러지고 변기가 막히고 천장이 얼룩지는 집

제 손바닥에 옹송그리는 식구들을 하나라도 놓쳐서는 안 되는 지상의 단 한칸

어쩌다 예전 살던 곳들을 지나칠 때면

어떤 집은 뭐하러 또 왔냐 묻고 어떤 집은 들렀다 가라 하는데

제 들보를 갉아먹는 슬픈 벌레를 키우지 않는 집은 어디 있으려나


 —《창작과비평》2017년 가을호 

 

 

1964년 서울 출생
이화여대 국문과 졸업, 동대학원에서 박사학위.
1990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오, 가엾은 비눗갑들』 『글자 속에 나를 구겨넣는다』
『평범에 바치다』 『일찍 늙으매 꽃꿈』『포도알이 남기는 미래』
『하우부리 쇠똥구리』
‘21세기 전망’ 동인


童心初박찬일 17-11-28 00:00
 
집이 인생이었네.
즐감하였습니다.(__)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공지 오늘의 시 등록 관련 안내 관리자 07-19 34017
1156 한 마리 사막 / 안 민 관리자 02-23 174
1155 우주의 시간 / 박현솔 관리자 02-23 134
1154 마늘밭의 꿈 / 이건청 관리자 02-21 272
1153 취한 여행자들을 위한 시간 / 서영처 관리자 02-21 247
1152 재가 / 정호 관리자 02-20 259
1151 은유, 봄 / 김택희 관리자 02-20 298
1150 허공에 검은 선을 그으며 / 이재연 관리자 02-19 387
1149 붉은 나무들의 새벽 / 정용화 관리자 02-19 349
1148 양철굴뚝과 나팔꽃 / 유창성 관리자 02-14 523
1147 껍데기론 / 신단향 관리자 02-14 456
1146 개같은 사랑 / 최광임 관리자 02-12 666
1145 바닥이 나를 받아주네 / 양애경 관리자 02-12 594
1144 오렌지에 대한 짧은 생각 / 김부회 관리자 02-09 651
1143 발/ 권기만 관리자 02-09 589
1142 칼갈이 스다께씨 / 김미희 관리자 02-07 646
1141 막판이 된다는 것 / 문보영 관리자 02-07 679
1140 0도와 영하 1도 사이 / 조현석 관리자 02-05 790
1139 사과하는 방법 / 신이림 관리자 02-05 743
1138 바깥의 표정 / 이해존 관리자 02-02 896
1137 드라마에 빠지다 / 나호열 관리자 02-02 790
1136 겨울 변주 / 정다인 관리자 01-31 980
1135 낙타는 묶여 있던 밤을 기억한다 / 오 늘 관리자 01-31 871
1134 오래된 울음 / 이진환 관리자 01-30 964
1133 설핏 / 김진수 관리자 01-30 807
1132 외상 장부 / 이종원 관리자 01-29 815
1131 희나리 / 향일화 관리자 01-26 1346
1130 겨울 병동 / 최충식 관리자 01-26 956
1129 정오의 꽃 / 오시영 관리자 01-25 1004
1128 자전거 바퀴를 위한 레퀴엠 / 안정혜 관리자 01-25 895
1127 파도타기 / 정호승 관리자 01-23 1170
1126 불멸의 꽃 / 김광기 관리자 01-23 1006
1125 죽은 파도에 관한 에필로그 / 전비담 관리자 01-22 1024
1124 가볍고 가벼운 / 김 령 관리자 01-22 1071
1123 수유역에서 / 장옥근 관리자 01-19 1185
1122 다른 교실 / 서동균 관리자 01-19 1063
1121 문지방을 넘다 / 임성용 관리자 01-18 1167
1120 밤 산책 / 이정민 관리자 01-18 1132
1119 헌 돈이 부푸는 이유 / 채향옥 관리자 01-17 1145
1118 짐 / 유행두 관리자 01-17 1096
1117 캄캄절벽이 환하다 / 채재순 (1) 관리자 01-16 1186
1116 더 작은 입자보다 조그만 / 진수미 관리자 01-16 1118
1115 문득, 이 따뜻한 / 류현승 관리자 01-15 1355
1114 내 안의 내원궁 / 김판용 관리자 01-15 1113
1113 작금바다를 지나며 / 이은봉 관리자 01-12 1336
1112 자오선 / 한성례 관리자 01-12 1225
1111 오리의 탁란 / 강희안 관리자 01-11 1261
1110 포옹 / 이기성 관리자 01-11 1342
1109 꽃나무 곁에서 시 쓰기 / 양현주 관리자 01-09 1520
1108 개밥바라기 / 김종태 관리자 01-09 1318
1107 마음의 문신 / 정공량 관리자 01-08 1395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