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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5-10 09:07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689  

한 걸식자의 비망록


   권순진


 

먼지 눈발이 날리기 시작한 동네 어린이 놀이터

시소 옆에 빨랫감처럼 구겨져 웅크린 채

딱딱하게 굳어져간 한 걸인의 손에서

모서리 너덜너덜 닳고 해졌으나

침 바른 흑연 자국 선명한 수첩 하나 발견되었다


빼곡 누구네 환갑 아무개 칠순 잔칫날이

대차대조표상의 채권처럼

차변에 길게 적혀있었고

오른쪽엔 그만이 알았을 방식으로

간단히 주소와 위치를 표시해 두었다

그 밑에 이런 푸념도 굴림체로 갈겨져 있다

“요즘은 잔치가 없어 이 짓도 못 해 먹겠다”


그로서는 요긴한 밥줄이자

집문서나 예금통장에 버금가는 중요 장부인 셈이다

그가 이 겨울 살아남기만 하였어도

돌아오는 삼월 초순에는

희수네 칠순잔치 하객으로

이백처럼 단순한 행복에 겨울 수 있을 것이고

디오게네스의 원통만 있었더라면

알렉산더를 부러워하지 않아도 무방했을 터인데


달은 높아 어둠이 익어가고

움직임 없이 까맣게 접혀진 몸

손아귀에 꼭 쥔 수첩만은

뿌연 미세먼지 속에서 최선을 다해 펄럭였다

생을 전부를 걸었던 그의 유일한 증빙인

 

- 권순진 시집『낙타는 뛰지 않는다』2018. 학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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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성주 출생

2001문학시대로 등단

시집 낙법』 『권순진의 맛있게 읽는 시1』 『낙타는 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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