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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8-20 11:43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1029  

천적

 

    김학중

 

 

폐차장에 들어선 차들은

죽음에 이르러서 자신의 천적을 알게 된다고 해요

차를 부숴본 사람들만이 아는 비밀을

살짝 알려드릴게요, 앞 유리를 부수고

보닛을 찌그러뜨릴 때쯤이면

태어나 그처럼 맞아본 적 없는 차들은

백미러를 보며 길을 그리워한대요

길이 키우던 그 시절

세상 그 어디에라도 달려갈 수 있을 것 같던 그때를

회상에 빠진 헤드라이트가 그렁거리는 순간

차의 숨통을 끊어주는 게 폐차장에서 하는 일이래요

그러면 찌그러진 차체에 천적의 무늬가 떠오른대요

길의 무늬가 소름 돋듯이 뜬대요

계기판의 주행거리가 단지

오랫동안 길에게 쫓겼다는 증거였던 거죠

질주를 충동질하는 길이

후미등을 흉내낸

빨간 신호등으로 자신을 길들여왔던 거죠

먹지도 못하는 깡통을 만들어내는 천적 따위는

천적 축에 못 낄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폐차를 해본 사람은 잊지 않는대요

언제나 길은 제 위를 달릴 새 차가 필요하단 걸 말이에요

은밀한 포식을 즐기고 있는 아스팔트 도로

그 헛바닥 위로 당신도 막 걸음을 옮기고 있군요.

 

- 김학중 시집 창세』(문학동네, 2017)에서

 

 

kimhakjoong-180.jpg

1977년 서울 출생

2009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 창세

18회 박인환 문학상, 8회 김만중 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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