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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리자 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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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9-10 09:24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709  

분실된 기록

 

    이제니

 

 

  첫 문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슬픔을 드러낼 수 있는, 슬픔을 어루만질 수 있는.

  고통의 고통 중의 잠든 눈꺼풀 속에서.

    

  꿈속에서 나는 한 권의 책을 손에 쥐고 있었다.

    

  펼치자마자 접히는 책

  접힌 부분이 전체의 전체의 전체인 책

    

  너는 붉었던 시절이 있었다

  너는 검었던 시절이 있었다

  검었던 시절 다음엔 희고 불투명한 시절이

  희고 불투명한 시절 다음에는 거칠고 각진 시절이

    

  우리는 이미 지나왔던 길을 나란히 걸었고. 열린 눈꺼풀 틈으로 오래전 보았던 한 세계를 바라보았다.

    

  고양이와 나무와 하늘 속의 고양이

  나무와 하늘과 고양이 속의 하늘과

    

  산책하기 좋은 날씨였다. 잎들은 눈부시게 흔들리고 아무것도 아닌 채로 희미하게 매달려 있었다.

아름다움이란 이런 것인가. 나는 지금 순간의 안쪽에 있는 것인가.

    

  아니요 당신은 지금 슬픔의 안쪽에 있어요.

  슬픔의 안에. 슬픔의 안의 안에.

  마치 거품처럼.

    

  우리는 미끄러졌고 이전보다 조금 유연해졌다.

    

  언젠가 내가 썼던 기억나지 않는 책

  언젠가 내가 읽었던 기적과도 같은 책

    

  지금은 그저 이 고통의 고통에 대해서만 생각하도록 하자. 우주의 밖으로 나갔다고 믿는 자들이

실은 우주 속을 헤매는 미아일 뿐이듯이. 우주의 밖은 여전히 우주일 뿐이니까. 슬픔 안의 슬픔이

슬픔 안의 슬픔일 뿐이듯이.

   

  쓴 것을 후회한다. 후회하는 것을 지운다.

  지운 것을 후회한다. 후회하는 것을 다시 쓴다.

    

  백지와 백치의 해후

  후회와 해후의 악무한

    

  텅 비어 있는 페이지의 첫 줄을 쓰다듬는다.

  슬픔에는 가장자리가 없고 우리에게는 할 말이 없었다.

    

  펼쳐서 읽어라

  펼쳐서 다시 써라

    

  분열된 두 개의 손으로 쓰인 책. 너는 어둠 속에서 다시 나타난다. 극적인 빛을 끌고 나타났다 이내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밤은 길어진다. 손은 어두워진다. 너는 다시 한 발 더 어둠 속으로 나아간다.

    

  무수한 괄호들 속의 무수한 목소리들

  말과 침묵 사이에 스스로를 유폐한 사람들

    

  이름 없는 이름들을 다시 부르면서

  다시 돌아온 검은 시절을 바라보면서

    

 그것은 고통의 고통 중의 잠든 눈꺼풀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흙으로 다시 돌아 가듯이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는 듯이

 

 

이제니 시집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문학과지성사, 2014)에서

 

 

 

leejn.jpg

1972년 부산 출생
2008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
시집 『아마도 아프리카 』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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