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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9-12 08:55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904  

누군가 나를 읽고 있다

    

    배영옥

  

  

움직임이 정지된 복사기 속을 들여다본다

사각형의 투명한 내부는 저마다의

어둠을 껴안고 단단히 굳어있다

숙면에 든 저 어둠을 깨우려면 먼저 전원 플러그를

연결하고 감전되어 흐르는 열기를 기다려야 한다

예열되는 시간의 만만찮음을 견딜 수 이어야 한다.

불덩이처럼 내 온몸이 달아오를 때

가벼운 손가락의 터치에 몸을 맡기면

가로 세로 빛살무늬, 스스로 환하게 빛을 발한다

복사기에서 새어나온 불빛이 내 얼굴을 핥고 지나가고

시린 가슴을 훑고 뜨겁게 아랫도리를 스치면

똑같은 내용의 내가 쏟아져 나온다

숨겨져 있던 생각들이, 내 삶의 그림자가 가볍게 가볍게

프린트되고, 내 몸무게가, 내 발자국들이

납작하고 뚜렷하게 복사기 속에서 빠져나온다

수십 장으로 복제된 내 꿈과 상처의 빛깔들이

말라버린 사루비아처럼 바스락거린다

살아서 꿈틀거리는 어떤 삶도 다시 재생할 수 있으리

깊고 환한 상처의 복사기 앞을 지나치면

누군가 지금 나를 읽고 있는 소리,

 

1999<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시인동네20189월호 <영옥> 특집 재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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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대구 출생(2018년 지병으로 별세)
1999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
시집 『뭇별이 총총』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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