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OME
  • 문학가 산책
  • 내가 읽은 시

    (운영자 : 네오)

 

소개하고 싶은 시에 간단한 감상평이나 느낌을 함께 올리는 코너입니다

가급적 문예지에 발표된 등단작가의 위주로 올려주시기 바랍니다(자작시는 삼가바람) 

12편 이내 올려주시고, 특정인을 홍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을 

 
작성일 : 17-11-15 08:48
 글쓴이 : 강북수유리
조회 : 509  

 

수화기 속의 여자

 

  이명윤

 

 

  어디서 잘라야 할 지 난감합니다. 두부처럼 쉽게 자를 수 있다면 좋을 텐데요 . 어딘지 서툰 당신의 말, 옛 동네 어귀를 거닐던 온순한 초식동물 냄새가 나요. 내가 우수고객이라서 당신은 전화를 건다지만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우수고객이었다가 수화기를 놓는 순간 아닌. 우린 서로에게 정말 아무것도 아닌.

 

  `선생님, 듣고 계세요?'

  `.....................'

  `이번 보험 상품으로 말씀 드리면요'

 

  나와 처음 통화 하는 당신은 그날 고개 숙이던 면접생이거나 언젠가 식당에서 혼이 나던 종업원이거나 취업신문을 열심히 뒤적이던 누이. 당신은 열심히 전화를 걸고 나는 열심히 전화를 끊어야겠지요. 어떡하면 가장 안전하게, 서로가 힘 빠지지 않게 전화를 끊을 수 있을까요? 눈만 뜨면 하루에게 쉼 없이 전화를 걸어야 하는 당신. 죄송합니다. 지금 저 역시 좀처럼 대답 없는 세상과 통화중입니다. 뚜뚜뚜뚜.

 

 

 

―《2006 전태일문학상 수상작

시집수화기 속의 여자(삶이보이는창, 2008)

 

 

 

  시의 내용처럼 이런 전화 많이 받아보았을 것이다. 내게도 어떤 때는 하루에 몇 통씩 걸려오는데 내 정보가 어디서 어떻게 새나갔는지 알 수가 없다. 사기 당할 정도의 딱히 가진 거 있지도 않지만 어리숙하게 피싱사기라도 당하면 어쩌나 싶을 때가 있기도 하다. 그래서 이런 전화를 받으면 보통은 그냥 끊어버리는데 어떤 때는 좀 듣다가 중간에 바빠요 하며 다 들어주지를 못한다. 아마 대게는 나처럼 이렇게 매정하게 끊어버릴 것이다. 그러나 바쁜 와중에 너무 자주 이런 전화를 받으면 화가 벌컥 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시의 화자는 다르다. 어렵게 전화기를 버턴을 누른 상대방의 마음 때문에 끊기를 매우 주저한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이런 일을 하는 알바 같은 비정규직 직업이 있다는 것이다. 하루에 몇 통의 전화를 걸어야 하고 기본급은 얼마이며 만약 성사가 되면 따로 인센티브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전화를 거는 사람이 주위의 잘 아는 사람이거나 또는 가족 내 누이가 저런 일을 한다면 그래도 매정하게 끊어버릴 수 있을까. 이런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감정 노동자라고 한다는데 견디기 힘들 정도의 언어폭력과 냉대에 거의 오래하지 못하고 중도에 그만 둔다고 한다.

   

  식물의 씨는 조건이 맞지 아니면 백 년이 있어도 싹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시의 씨앗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아무리 씨가 우수 품종이고 종자가 좋다 하더라도 적당한 습기와 온도와 주변 환경이 조성되지 않으면 발아될 수 없을 것이다. IMF 가 터지고 한동안 보험을 권유하는 전화가 상당히 많았다. 아무런 감정도 없이 그냥 끊었다면 저런 시를 절대 쓸 수 없을 것이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따스한 원초적 마음이 저런 시를 낳은 것이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공지 내가 읽은 시 이용안내 조경희 07-07 16307
1234 소 / 강신애 湖巖 05-20 33
1233 뻐꾸기 둥지(변주) / 김신용 강북수유리 05-19 35
1232 사과 속의 달빛 여우 / 윤정구 湖巖 05-18 43
1231 시, 풍경, 풍경화[달동네의 손금을 읽는 오후/ 송병호]외 2 金離律 05-17 74
1230 어쩌자고 제비꽃 / 안영희 湖巖 05-16 93
1229 모래 여자 / 김혜순 湖巖 05-13 141
1228 버리긴 아깝고/박철 (1) 金離律 05-12 134
1227 금서(禁書) / 오정국 湖巖 05-11 115
1226 붉은 포도주 / 김진수 湖巖 05-09 124
1225 인(印) /함순례 金離律 05-07 136
1224 시래기 / 이기인 湖巖 05-07 122
1223 종이의 나라 / 김양아 湖巖 05-05 119
1222 고양이는 간간 상황 너머에 있다 / 조정인 湖巖 05-03 116
1221 절/ 전동균 金離律 04-30 177
1220 내게 새를 가르쳐 주시겠어요 / 최승자 湖巖 04-30 165
1219 이불 / 유병록 湖巖 04-28 165
1218 빛의 경전 / 손병걸 湖巖 04-26 176
1217 소를 웃긴 꽃 / 윤희상 湖巖 04-24 192
1216 혀의 가족사/ 하종오 金離律 04-23 167
1215 달과 북극 / 이날 湖巖 04-20 180
1214 지난 겨울의 강설(降雪) / 배정웅 안희선 04-18 176
1213 축약, 리얼리즘/로댕과 반가사유상/권상진외 2 金離律 04-17 160
1212 무명시인 / 함명춘 湖巖 04-17 192
1211 선운사에서 / 최영미 湖巖 04-15 245
1210 그대 生의 솔숲에서 / 김용택 안희선 04-14 276
1209 봄, 본제입납 / 허영숙 안희선 04-13 230
1208 저녁에 이야기 하는 것들 / 고영민 湖巖 04-13 212
1207 머나먼 동행 / 홍수희 안희선 04-10 283
1206 소금창고 / 이문재 湖巖 04-10 259
1205 시, 기도, 약속[무한 질주/ 이진환 외 2] 金離律 04-09 198
1204 모든 그리운 것은 뒤쪽에 있다 / 양현근 서피랑 04-08 295
1203 돌지 않는 풍차 / 송찬호 湖巖 04-08 185
1202 사과나무에게 묻다 / 김규진 湖巖 04-06 240
1201 소금 / 이경록 안희선 04-04 251
1200 삼겹살 / 김기택 湖巖 04-04 268
1199 사랑이 있는 풍경 / Saint-Exupery 안희선 04-03 263
1198 늑대와 여우 / 오정자 안희선 04-03 249
1197 아침의 한 잎사귀 / 송종규 金離律 04-02 245
1196 기억 꽃잎 / 최하연 湖巖 04-02 262
1195 격언 / Jacques Prevert 안희선 04-02 187
1194 목련이 필 때면 / 유영훈 안희선 03-31 327
1193 소금창고에서 날아가는 노고지리 / 이건청 湖巖 03-30 203
1192 자줏빛 연못 / 김선향 湖巖 03-28 251
1191 장마 / 배한봉 湖巖 03-26 269
1190 타자에서 내가 되는 순간─이성복 『그 여름의 끝』, 『호랑가시나무의 기… 이기혁 03-26 248
1189 서랍이 있는 풍경 / 정수경 湖巖 03-24 283
1188 그대 무사한가 / 안상학 안희선 03-21 395
1187 달의 뒷면을 보다 / 고두현 湖巖 03-21 293
1186 비에도 지지 않고 (雨にもまけず) / 宮沢賢… 안희선 03-19 319
1185 불 켜진 고양이 / 홍일표 湖巖 03-19 257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