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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하고 싶은 시에 간단한 감상평이나 느낌을 함께 올리는 코너입니다

가급적 문예지에 발표된 등단작가의 위주로 올려주시기 바랍니다(자작시는 삼가바람) 

12편 이내 올려주시고, 특정인을 홍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을 

 
작성일 : 18-07-17 08:52
 글쓴이 : 金離律
조회 : 125  
◉만들 것인가, 만들어 낼 것인가

- 글, 김부회(詩人, 評論家)


분실/ 박소미

구두/ 김령

눈물/ 이화영


시를 쓴다고 하기도 한다. 시를 짓는다고 말하기도 한다. 시를 빚는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시를 쓴다는 행위는 문법적으로 볼 때 수동태보다는 능동태의 개념에 더 맞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시를 쓴다와 나에 의해 시가 씌였다의 차이는 시를 보는, 읽는, 양쪽 모두의 관점에서 매우 중요할 것이다. 자동사와 타동사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영문법에 기초하여 볼 때 타동사는 타동사 혼자서는 문장을 완벽하게 구사하기 어려울 것이다. 목적어를 수반해야 문장이 되는 구조이기 때문에 결국 수동태로 갈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갖고 있다. 반면에 자동사는 목적어의 수반 없이 자기 혼자 문장을 완성 시킬 수 있기에 능동태로의 변형이 가능하다. 더 나아가 자동사의 경우 주어에 살을 붙여 더 많은 문장을 덧이어 나가는 것이 수월하거나 단독적인 단어로 문장이 가능하기에 글의 시제도 변형 할 수 있다는 신축성이 생길 것이다. 글제를 만들 것인가, 만들어 낼 것인가로 정한 사전 이유를 영문법의 자동사, 타동사를 인용해 장황하게 피력한다.


시를 쓰는 행위는 분명히 화자가 내가 되는 행위다. 종종 글을 쓰거나 읽다 보면 인위적이라는 느낌을 받을 경우가 많다. 인위적이라는 말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인위적이 없다면 글 역시 매우 단조롭고 지루해지기 때문에 일종의 첨가 조미료라는 개념으로 보면 정확할 것이다. 시놉시스만 갖고는 완성될 글이라고 볼 수 없듯 팩트 혹은 줄거리에 살을 붙이거나 극적 전개를 위해 ‘인위’를 넣어야 한 편의 완성된 글이 될 것이다. 보다 넓은 범위의 글이라면 시도 포함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인위’의 수위를 적절하게 조절한다면 독자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좋은 작품이 될 수 있으나, 수위를 넘는다면 글의 주제를 벗어나 인조 人造가 먼저 생각나는 불편한 작품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당위성 當爲性이라는 말은 ‘인위’의 수위를 매우 잘 조절했다는 것이다. 만들어 낸 흔적이 상당히 자연스럽고 부드럽다는 말이다. 시는 만드는 행위에서 만들어내는 행위로의 전이가 필요한 글짓기 수단이다. 능동태도 될 수 있고 수동태도 될 수 있지만 결국 화자 자신, 시인 자신의 목소리는 능동태로 결론짓고 메시지를 던지는 것이 ‘시’의 형태적 필수요소이기 때문이다. 아주 오래전 회자하는 시작법 중 하나는 몇 가지 제한 사항을 두어 금기시 한 것들이 있다. 가령, 시에서는 욕설을 쓰지 말아야 한다. 시는 반드시 모국어로 써야 한다. 시는 희망적이어야 한다. 등등의 제한적인 시작법은 현대시에서는 최소한 필자에게는 매우 부정적이다. 물론 반드시 지켜야 할 부분도 있다는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금기 사항이 들어가고 그것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것은 시를 제한적이며 수동태로 만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시는 생각과 상상과 자유스러운 영혼의 발현이다. 능동이라는 말은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는 전제가 들어있다. 모두가 같은 레시피로 만든 음식을 섭취해야 한다면 분명 질리게 될 것이다. 시 역시 같은 맥락. 다변화가 심화하는 시대에 시에 관해 규정된 잣대나 논리를 들이밀어 시의 한계성을 스스로 규정짓는다면 시는 가장 즁요한 팩트인 ‘생명’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서 본다. 예를 들어 음식점에서 매식할 때 우리는 종종 조미료 맛이 나는 것 같다는 말을 많이 하게 된다. 음식 맛이 아니라 조미료 맛. 분명 모든 음식에 조미료는 들어간다. 하지만 어떤 음식은 재료 본래의 맛을 감칠맛 나게 살린 음식이 있고, 어떤 음식은 재료의 맛은 전혀 없이 인공 감미료 맛만 풍성한 음식이 있다. 누구나 재료 본연의 맛을 선호할 것이다. 몇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재료 본연의 맛은 쉽게 질리지 않는다는 특성을 갖고 있다. 또한 건강에도 좋다. 단점은 너무 재료 본연의 맛을 살리면 흔히 말하는 감칠맛이 부족하다. 깊은 맛은 있는데 감칠맛이 없다는 단점. 시는 쓰는 시점에서 최대한 깊은 맛을 내야 한다. 동시에 어떤 부분에서는 감칠맛을 내야 한다. 깊은 맛을 능동태라고 가정할 때 감칠맛은 수동태라고 이해하면 좀 더 쉽게 알 것 같다. 보이는 것에 보이지 않는 저 너머의 것, 경계 이전과 경계 이후를 더해 한 편의 시를 완성하는 것이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한 첫걸음일 것이다.


글을 읽다 보면 참 이상한 부분이 많다. 쉽게 표현해도 되는 것을 구태여 어려운 한자어를 섞거나 영어를 섞어 누구나 이해하기 쉬운 문장이 아닌, 소위 전문가도 이해 못 하는 문장들이 난무하다. 물론 시 역시 한자어와 영어 단어가 들어가야 정확히 뜻이 전달되고 깊이를 더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닌, 다만 학식이나 지식, 내세움 등의 이유로 떡하니 붙여놓은 단어도 많다. 그것이 잘 못 되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전제하는 것은 있어야 할 자리라는 것이다. 있어야 할 자리를 구분해 내기도 어렵지만 놓아두기도 어렵다. 자칫 제자리가 아닌 본질을 호도하는 자리에 있게 되면 글은 생명을 잃고 표류하는 문장이 된다. 시는 단어의 채집과 선택에 그 승패가 좌우된다. 단어의 채집이라는 것은 사유의 정화,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 자신의 메시지에 가장 적절한 단어를 선택한 시를 대하게 되면 시쳇말로 한 방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본문 모두가 선문답 같은 단어의 선택 및 삽입을 한다면 그 문장은 비만한 문장이 되고,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필자가 집요하게 주장하는 것은 시는 빼는 예술이라는 말이다. 물론 소설 등 여타의 다른 글은 더하는 예술일 수 있다. 가장 좋은 퇴고의 방법은 하고 싶은 말을 모두 쓰고 하나둘 빼는 것이다. 빼다 보면 가장 중요한 핵심만 남게 된다. 그것에 다시 수동이라는 조미료를 첨가할 때 완성을 보게 될 것이다. 7~80년대 철학 서적은 매우 어려웠다. 그 시대에 철학책을 읽으며 본래 철학이 어려운 학문이라 책이 어려운가 보다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번역의 문제였다. 원서를 제대로 혹은 정확히 읽지 못한 번역가가 문장을 문장으로 해석하거나 번역가 스스로 해석이 안 된 채 단어의 뜻만 나열한 것이다. (물론 다 그렇다는 것이 아니다. 또한 철학을 이해 못 한 필자의 과문함에서 비롯된 단순히 필자의 개인적인 의견이라는 점 밝힌다.) 항간에 이런 말이 있다. 영시는 시인이 번역해야 가장 맛이 난다. 시가 그렇다는 말이다. 시인 자신이 자신의 시를 정확히 이해하고 전달하는 과정에서 자칫 발생할 수 있는 위와 같은 오류를 최대한 제어하기 위해 사유를 빼고 빼고 빼야 한다는 말이다. 좀 더 쉽게 좀 더 이해하기 쉬운 가독성을 부여한다는 것은 어쩌면 철학 서적의 대중화에 기여한다는 말과 같은 말일지도 모른다. 서술 + 서술 + 결론 혹은 서술 + 묘사 + 결론의 방식을 시에 입힌다면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정의한다면 만들 것인가에서 출발해 만들어 낼 것인가로 끝내는 것이 시를 좀 더 융성하고 다양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융합이라는 단어가 있다. 融合은 서로 섞이거나 조화되어 하나로 합쳐진다는 말이다. 시는 단어의 콜라보collaboration가 되거나 혹은 사유와 상상의 콜라보가 될 때 아름답다. 한 편의 시 작품을 만들기 위해 생각과 관찰과 묘사와 이미지와 진술과 팩트와 비팩트의 콜라보가 매우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전개될 때 가장 멋진 작품이 된다. 그런 관점에서 몇 편의 시를 소개한다.



김지녀


주차장에는 많은 선들이 그려져 있다

턱도 없고

늪도 아닌, 선은 글자가 아니고

울타리가 아닌데

그것을 아무도 넘지 않는다


선은 곧고, 기도하지 않아도

길다, 선에는 인생이 빠져 있지만

선을 따라 걸으면 난간 위를 걷는 기분이야

선 위에서 우리는 떨고 대결한다

왼쪽과 오른쪽이 되어 줄다리기를 한다

아무도 불평하지 않아서

선은 공평하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얼었다 녹기를 반복하며

선이 자란다,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며

돌이킬 수 없게 우리에게

선이 생겼어

적당한 거리로 우리는,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나 있다

주차장은 텅 비어 있고


아이들이 선과 선 사이를 뛰어다닌다

건반들처럼 선들이 차가운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한다


주차장에 그어진 구획선에서 삶의 선을 발견한 시인의 시선에 주목해서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가운데 토막


이종원


아내가 자리를 비운 저녁

노모가 생선찌개를 끓인다

동태 한 마리로 만찬을 칼질해 넣고

늦은 허기를 불러낸다

대가리, 몸통, 꼬리 세 조각이

가슴을 에는 사이

실한 가운데 토막이 그릇에 오른다

고백하지 않아도 듣지 않아도

고추장 풀린 양념에서는

화톳불 냄새가 난다

대가리 한쪽을 틀니로 빠는 어머니

살점을 발라주고도 모자라

마른 가슴 덜어 낸 한 세월

생선 가시처럼 부서져 떨어지고

나무토막 같은 나는

두드리면 통통거리는 뱃살이 되어있다


해설할 것도 없다. 본 것 그대로 보이는 그대로를 진솔하게 서술한다. 반성하면서


새벽 4시와 5시 사이


윤성택


기억도 스스로 편애하는 것 있어

이별의 장소도 바꾸고

아슴아슴 상처의 처소도 바꿉니다

감정이라는 것도 기실 분자分子의 작용이라고

믿으면 믿을수록 밑줄 그었던 말들이

지금에 와 화르르 되살아나고 있습니다

생각은 천천히 기억으로 들어왔다 통과하면서

제 무게를 덜고 갑니다

새벽 4시와 5시 사이를 우두커니

아파트 베란다 너머 풍경에 세워두었습니다

빗소리를 들으면 한 켠이

촘촘하게 가로막힌 틈으로 허물어집니다

빗방울에 엮여져 있던 시간이

이제 이곳에 흘러들어 머물게 됩니다

여기에 쉼표를 붙이고 싶습니다


윤성택 시인의 시는 사유와 사유의 콜라보가 명확하다.


모던 포엠 2018년 08월호의 주제, 서두에 언급한 만들 것인가, 만들어 낼 것인가에 적절하게 어울리는 세 작품을 선별하여 소개한다. 첫 번째 작품은 박소미 시인의 [분실]이다. 여하한 이유로 지갑을 분실한 어떤 날, 분실의 심경을 과하지 않고 담담하게 진술한 시 작품이다.


분실


박소미


퇴근길 살 바람 일으키며 탄 버스

두 다리로 간신히 지탱하고서야

눈치챘다

쇼퍼백을 손 갈퀴로 훑어보아도

잡히지 않는다

돈 부른다며, 부자로 살아보자고 건네던 남편 프러포즈

이제는 검붉게 반질거리는 지갑


손잡이 바투 쥐고 목록을 바꿔본다

생태는 동태로 불고깃감 한우는 호주산 쇠고기로

벼르던 딸 아이 나이키 운동화는 시장표로 바뀌는데

무사통과 카드는 새로 받으면 되는데


호흡을 고르다 더 이상 위로받지 못한다

납작 머리 박은 채 서리새벽토록 울고 있을

부모님 흑단 머리칼과 젓니 빠진 딸아이

웃음 박힌 시간들은

어디로 접수하나


분실의 사전적 설명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물건이나 기타 어떤 것을 잃어버린다는 말이다. 알고 당하는 것과 모르고 당하는 것은 분명 그 충격의 크기가 다를 것이다. 권투 시합에서 빤히 보이는 상대의 펀치는 충격을 상당 부분 흡수하지만, 전혀 의식하지 못한 강력한 스트레이트 한 방은 문자 그대로 느닷없는 한 방에 다운되는 것처럼 같은 펀치라도 알고 맞는 것과 모르고 맞는 것이 차이는 매우 크다. 어느 날 버스에 타고 지갑은 분실한 것을 알게 되었을 때의 황당함은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분실한 지갑이야 다시 찾거나 그 속의 현금이야 다시 채우거나 벌거나 하면 간단히 해결될 일이지만, 그 지갑이 부자로 살아보자며 쥐여 준 남편의 약속이 담긴 지갑이거나, 뭔가를 사야 하는데 사야 할 품목의 질을 저하한다면 부수적으로 따라 올 다른 피해, 요즘 흔히 말하는 2차 피해의 여파는 누가 지게 되는지?


/부자로 살아보자고 건네던 남편 프러포즈/

/불고깃감 한우는 호주산 쇠고기로

벼르던 딸 아이 나이키 운동화는 시장표로 바뀌는데/


분실한 지갑과 내용물의 껍질은 채우면 되는데, 중요한 것은 프러포즈한 날 남편의 표정과 진심은 지갑을 바꿔도 채워지지 않을 것이다. 분실의 본질은 지갑이 아닌 그 날, 그때의 감정조차 어쩌면 분실 했다는 생각을 시인이 한 것은 아닐까 싶다. 이러한 생각은 시의 결구 부분에서 더 짙은 혐의를 보인다.


/서리새벽토록 울고 있을

부모님 흑단 머리칼과 젓니 빠진 딸아이

웃음 박힌 시간들은

어디로 접수하나/


지갑을 분실한 행위, 즉 만들 것인가에서 출발한 시는 웃음 박힌 시간이라는 만들어 낼 것인가로 종결짓는다. 하나의 행위 또는 시점에서 출발한 시는 분실이라는 행위에서 삶의 분실, 삶에 박혀 있는 이야기의 분실, 좀 더 거시적으로 진행하는 삶과 삶의 본질과 허울 사이에 놓인 내 것과 관계 지어진 내 것에 대한 분실을 이야기하고 있다. 우린 살면서 많은 것을 분실하고 산다. 나이가 먹었다는 이유로 깜박하기도 하고, 잠시 넋 나갔다는 이유로 손에 쥔 것을 잃어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분실은 자신이 자신을 잃어버리게 되는 분실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신이 자신을 잃는다는 것은 자신만 잃는 것이 아니라 관계된 모든 사람에게서 나를 잃게 되는 것이다. 생태는 동태로 바꾸면 된다. 카드는 새로 발급받으면 된다. 나는? 내 기억은? 그날의 프러포즈는? 웃음 박힌 기억은? 느닷없이 어느 날, 알츠하이머에 걸려 내가 나를 잃는다면? 정작 소중한 것들에 대한 경종을 갖게 되는 좋은 작품이다.


두 번째 작품은 김령 시인의 [구두]다. 구두의 관점과 화자의 관점을 절묘하게 오버랩하는 형태로 빚은 작품이다. 이 시는 진술과 서술보다는 관점과 관점의 콜라보를 주목해서 읽으면 더 맛이 날 것 같다. 관점은 생각의 차이다. 생각의 차이는 삶을 보는 눈의 차이이며, 상대방에 대한 가치관의 정체성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드는 힘이다. 구두라는 시제의 첫 연은 /지금 나는 패배의 명백한 증거이다/로 시작한다. ‘지금 나는’의 주체는 ‘나’이면서 ‘구두’이면서 동시에 나의 관점과 구두의 관점일 수 있다. 다분히 중의적이며 다분히 의도적인 몰입을 시도한 듯해서 매우 참신하게 읽힌다.


구두


김령


지금 나는 패배의 명백한 증거이다


반짝이는 유리 구두에 몸을 구겨 넣는 건 언제나 실패했다 구두를 신고

호흡을 멈추어도 살들은 끊임없이 비어져 나왔다


물이었다면 나는 행복했을까 앙증맞은 구두에 꼭 맞는 물이었다면


잘했어, 조금만 더 노력하면 너는 구두에 꼭 맞는 몸을 갖게 될 거야


삐져나온 살들을 깎아냈지요 피가 흐르고 고통으로 비명을 질렀지만 구두 안에

몸을 넣는 데 성공했어요 하룻밤이 지나자 살들은 부풀은 반죽처럼 구두 바깥으로

흘러내렸어요


오른쪽을 조금만 깎으면 되겠어, 아니야 왼쪽을 자르는 게 낫겠어 아, 뒤꿈치를

더 미는 게 모양이 예쁘지 않겠니?


흘러나온 살을 다시 깎아내요 그러나 자고 나면 구두 밖으로 넘치는 살, 구르는 돌을 따라 내려오고 다시 내려온 시지프스는 돌을 굴리며 행복했을까요


너는 너무 눈치가 없어, 이제 알아서 할 때도 되지 않았니?


요구는 끝도 없이 이어지요 삐져나온 살을 깎고 조금만 더 노력하면 언젠가 나는, 구두에 꼭 맞는 몸을 갖게 될까요?


행과 연은 문장의 연속과 이어물기를 바탕으로 전개하면서도 관점과 관점을 대비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나’ 이면서 동시에 ‘구두’ 나 + 너, 이런 관점의 콜라보는 문장을 대하는 독자로 하여금 초점을 흐리게 하는 듯하면서 자신의 초점으로 끌고 들어가게 하는 장점을 갖고 있다. 몰입도라는 말은 어떤 대상에 깊이 파고들거나 빠지는 정도를 이야기한다. 시인은 첫 연에서 메시지 아닌 메시지를 던진다.


/지금 나는 패배의 명백한 증거이다/


패배. 증거가 암시하는 것은 무엇인지 궁금하게 만드는 첫 행을 던져두었다. 독자로 하여금 퍼즐의 문제를 제시하면서 너무 친절하지 않을 정도로 단서를 툭툭 던져둔다. 물론 쉽게 아무나 풀 수 있는 단서가 아닌 관점과 관점을 바꿔가면서 목적 불일치를 염두에 두고 쓴 듯하다.


1.물이었다면 나는 행복했을까 앙증맞은 구두에 꼭 맞는 물이었다면

2.너는 구두에 꼭 맞는 몸을 갖게 될 거야

3.살들은 부풀은 반죽처럼 구두 바깥으로/흘러내렸어요

4.다시 내려온 시지프스는 돌을 굴리며 행복했을까요

5.너는 너무 눈치가 없어

6.구두에 꼭 맞는 몸을 갖게 될까요?


어딘가 맞지 않는, 일관성이 아닌 듯 행과 행이 이어지면서 구두와 나와 살, 대립과 절충과 의견이 각을 세우면서도 아귀가 맞아 들어가는 구성이 매우 돋보이는 작품이다. 또한 자칫 지루해질 때쯤 시지프스를 인용한 재치까지 보여주는 것에 매력을 느낀다. 김령 시인의 시를 접하면서 시인이 기고한 또 다른 작품 한편을 눈여겨 살펴보게 되었다. 현대시의 바람직한 모델이라는 생각이 든다. 김령 시인이 자신의 작품의 말미에 진술한 시인의 말을 인용하고 맺는다.


살을 깎고 조금만 더 노력하면 언젠가 나는, 구두에 꼭 맞는 몸을 갖게 될까요?


마지막 작품은 이화영 시인의 [눈물]이다. 하루에 일어난 일을 일기처럼 서술하고 있다. 나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 그 눈물의 의미를, 만들 것인가. 만들어 낼 것인가로 마무리한 작품이다.


눈물


이화영


나는 젊었다가 다시 늙었다


읽다 남긴 페이지 속에는 내 젊은 날의 저녁이 있고 자음이 접혀 팽개쳐진 말들의 따순 날숨의 눈물을 누淚라고 발음하고 있었다


나가는 일보다 들어와 글썽이던 너의 방

그 적요를 잠그고 우린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꽃잎 한 장에도 넘치는 나의 안에서 팽팽한 혈관이 튄다


팔을 괴고 모로 누우면 귀 귀밑으로 번지던 얼굴 나는 젊었다가 다시 돌아오며 오래 너를 생각하였다 길이 주춤 서 있다 가고 또 한동안 멈춰 서서 가지 않았다


낮달을 삼킨 해처럼 종일 목젖이 아팠다


가령, 눈물을 사람이나 짐승의 눈알 위쪽에 있는 누선에서 나와 눈알을 적시거나 흘러나오는 투명한 액체로 읽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눈물이 가진 의미는 지극히 관념적이면서도 지극히 단순하다고 표현해도 될 듯하다. 사람이 갖고 있는 감정의 표현 중에서 가장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 눈물이다. 기쁘거나 슬프거나 때론 졸리거나 할 때도 눈물은 흐른다. 많은 시에서 눈물은 소재이면서 동시에 주제가 되고 주어이면서 대명사가 되기도 한다. 눈물 한 방울이 때로는 한 나라의 역사를 통째로 바꾸기도 하고, 타인의 목숨을 좌지우지 하는 경우도 역사를 통해 배웠다. 이화영 시인의 눈물은 서두를 젊었다가 늙었다로 시작한다. 어쩌면 그날, 시인이 흘리거나 담지한 눈물의 의미일 것이다. 도입부에 주제를 던져두고 이하의 본문에서 주제에 대한 당위성을 풀어나가는 방식의 시는 참신하지만 동시에 시적 긴장감을 감소하게 만드는 단점도 갖고 있다. 하지만 이화영 시인은 그 단점을 2연에서 팽팽하게 당겨 놓았다.


읽다 남긴 페이지 속에는 내 젊은 날의 저녁이 있고 자음이 접혀 팽개쳐진 말들의 따순 날숨의 눈물을 누淚라고 발음하고 있었다


한 방울의 눈물이 아닌, 뚝뚝 떨어지는 눈물, 뚝뚝 흘리는 눈물, 날숨의 눈물이다. 그치고 마는 눈물이 아닌 흘러내리는 눈물이다. 떨어지는 방울마다 사연이 있고 시간이 있고 어떤 날의 기억이 있고 어떤 날의 상처가 있고, 어떤 날의 위안이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젊은 날의 영상이 아롱져 있다. 한 번 더 정의하면 다가올 어떤 날의 내가 있다. 눈물은 젊었다가 다시 늙는 감정의 매개체라는 말이다.


나가는 일보다 들어와 글썽이던 너의 방

그 적요를 잠그고 우린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꽃잎 한 장에도 넘치는 나의 안에서 팽팽한 혈관이 튄다


감정의 대상은 상대가 아닌, 시인 자신일 것이다. 내면의 세계와 현실의 내가 부딪히고 대응하면서 발생하는 눈물의 깊이는 그리움이나 애증이라는 어떤 형체적 목적물이 아닌 생의 전반에 걸친 알 수 없는 이유라는 심증이 굳어진다. 때론 우리들은 구체적 이유 없이 눈물을 흘린다. 하지만 정말 구체적 이유가 없을까? 아마 구체적을 붙인다는 것이 구차하기에 구체적이지 아닐 것이다. 구체적이어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눈물은 나이를 줄였다 늘렸다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젊었다가 다시 돌아오며 오래 너를 생각하였다 길이 주춤 서 있다 가고 또 한동안 멈춰 서서 가지 않았다


‘너’는 ‘나’ 다. 젊은 나와 늙을 나 사이의 간극에 눈물이 있다. 어느 날 어디만큼 왔는지 의식하지 못하고 살다, 어디만큼의 정의를 분명히 알게 될 때가 있다. 그 자리가 너무 생각과 다르게 멀리 혹은 깊이 혹은 다르게 놓여 있을 때 우린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시인의 결구를 인용해 정의를 내려본다.


낮달을 삼킨 해처럼 종일 목젖이 아팠다


세 편의 작품을 읽으며 드는 생각이 동일점은 시적 편향이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이다. 시는 인위적이어야 한다. 시는 인위적이지 않아야 한다. 시는 율격을 갖춰야 한다. 시는 비율격적이어야 한다. 시는 일반적이어야 한다. 시는 일반적이지 않아야 한다. 시는 수동이다. 시는 능동이다. 시는 한 방이 있어야 한다. 시는 한 방이 없어야 한다. 모두 정답이면서 오답이다. 그래서 시가 어렵다. 하지만 한가지는 동일하다. 쓰는 사람의 영혼이 담겨야 한다. 인공 감미 하지 않은 순수한 자기 목소리가 담겨 있을 때 가장 아름다운 시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 된다. [김부회 시인/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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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6 갈꽃이 피면 / 송기원 나싱그리 08-04 105
1325 벼루 / 이수정 鵲巢 08-04 76
1324 시의 시대 / 이창기 강북수유리 08-04 70
1323 백야 / 남길순 湖巖 08-02 116
1322 다시 /박노해 강북수유리 07-31 162
1321 장대와 비 사이 / 조영란 湖巖 07-31 106
1320 남으로 창을 내겠소/김상용 강북수유리 07-28 92
1319 캉캉치마 / 김미령 湖巖 07-28 96
1318 털 난 꼬막 /박형권 강북수유리 07-27 102
1317 달북 / 문인수 湖巖 07-26 149
1316 길 / 김기림 湖巖 07-24 207
1315 외롭다는 것은 / 박일 성율 07-22 262
1314 호랑이는 고양이과다 / 최정례 湖巖 07-21 90
1313 입산한 내가 하산한 너에게 - 이기와 푸른행성 07-20 171
1312 북 항 / 권대웅 湖巖 07-19 132
1311 지평 - 강경우 푸른행성 07-18 170
1310 만들 것인가, 만들어 낼 것인가[분실/박소미 외 2] 金離律 07-17 126
1309 고사목 / 최을원 湖巖 07-17 129
1308 기염 / 정 문 푸른행성 07-16 129
1307 우포에 비가 내린다 / 송하 푸른행성 07-15 182
1306 살아남아 고뇌하는 이를 위하여 / 칼릴 … 푸른행성 07-14 171
1305 운우지정(雲雨之情) /이선이 강북수유리 07-14 139
1304 국립낱말과학수사원 /함기석 활연 07-13 139
1303 튤립 / 송찬호 湖巖 07-13 161
1302 모닥불 / 백석 푸른행성 07-12 199
1301 가죽나무 /도종환 강북수유리 07-11 175
1300 불광천 / 홍일표 湖巖 07-11 99
1299 길 위의 식사 / 이재무 푸른행성 07-11 156
1298 핏덩어리 시계 / 김혜순 활연 07-10 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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