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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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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1-14 09:11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2014  

해탈을 위한 해체론-데리다와 오규원 / 강신주

 

죽고 난 뒤의 팬티

 

오규원

 

가벼운 교통사고를 세 번 겪고 난 뒤에 나는 겁쟁이가 되었습니다. 시속 80킬로미터만 가까워져도 앞좌석의 등받이를 움켜주고 언제 팬티를 갈아입었는지 어떤지를 확인하기 위하여 재빨리 눈동자를 굴립니다.

 

산 자도 아닌 죽은 자의 죽고 난 뒤의 부끄러움, 죽고 난 뒤에 팬티가 깨끗한지 아닌지에 왜 신경이 쓰이는지 그게 뭐가 중요하다고 신경이 쓰이는지 정말 우습기만 합니다. 세상이 우스운 일로 가득하니 그것이라고 아니 우스울 이유가 없기는 하지만.

 

—시집 『이 땅에 씌어지는 抒情詩』(1996)

 

1 죽고 난 뒤의 팬티를 부끄러워하는 시인

 

자본주의 사회의 가장 흥미로운 점은 모든 것이 돈으로 환산될 수 있다는 터무니없는 상상을 곧 사실로 만들어 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를 들어 작가 카프카를 돈으로 환산하면 과연 어느 정도가 될까요? 어느 시인은 작가 카프카에게 800원이란 값을 매긴 적이 있습니다. 그가 바로 <프란츠 카프카>라는 재기발랄한 시를 썼던 오규원吳圭原, 1941~2007 입니다.

그의 시에 따르면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Charles-Pierre Baudelaire,1821~1867도 프란츠 카프카와 마찬가지로 800원의 값어치가 나가는 것으로 책정되어 있습니다. 어쩐 일인지는 잘 몰라도 위르겐 하버마스Jürgen Habermas, 1929~ 같은 철학자는 카프카나 보들레르하고는 다르게 1,200원이라는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책정하고 있지요. 시인은 인문학의 위기, 혹은 인문학을 경시하는 풍조를 미리 예견이라도 했던 것일까요? 어쨌든 그의 시는 "시를 공부하겠다는 미친 제자와 앉아 커피를 마신다. 제일 값싼 프란츠 카프카"라는 구절로 여운을 짙게 남기고 마무리됩니다.

2007년 2월 5일 '시를 배우겠다는 미친 제자들'의 도움으로 시인의 장례식이 강화도 어느 산 소나무 숲에서 수목장으로 치러집니다. 시인은 지인과 제자들에게 자주 자신의 장례를 수목장으로 해달라고 얘기했기 때문이지요. 수목장을 이야기할 때 시인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사실 죽고 난 뒤의 일을 죽는 사람 본인이 왈가왈부한다는 것은 오만한 일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다는 사실만으로도 다른 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져야 하는 건지도 모릅니다. 사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우리는 그 사람보다는 자신이 더 오래 살아야 하는 의무를 가지게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서 생기는 모든 외로움과 고통을 자기 혼자 짊어져야만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어찌 보면 사실 수목장을 원하던 시인의 평소 모습은 시인답지 않은 모습이라고도 할 수 있지요. 과연 시인은 우리가 우려하는 것처럼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이 지켜야 할 최소한의 의무마저도 방기하려고 했던 것일까요?

다행스럽게도 오규원은 마치 우리의 이 같은 의문을 예견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이미 <죽고 난 뒤의 팬티>라는 시를 통해서 죽음과 삶을 대하는 자신의 속내를 피력한 적이 있기 때문이지요. 교통사고를 몇 번 겪은 시인은 겁쟁이가 되었다고 자신의 심경을 토로합니다. 앞좌석의 등받이를 움켜쥐는 것까지는 좋았지만, 자신이 팬티를 언제 갈아입었는지를 걱정하는 시인의 모습은 한편으론 참 우습기도 합니다. 불의의 사고로 사망한다면 육신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타인들의 것이 되고 맙니다. 사고 현장에 도착한 구조대원은 자신의 몸을 함부로 만지며 들것에 옮겨 싣겠지요. 응급실의 의사들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몸에 이리저리 손을 댈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육신을 가리고 있던 옷들마저 누군가가 훌렁 벗기고 말겠지요. 시인은 이때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누군가 혹시 낡거나 혹은 더러운 자신의 팬티를 보고서 인상을 찌푸리면서 불쾌하게 생각할까 잠시 두려웠던 것이지요.

'죽고 난 뒤의 팬티'에서 오규원은 죽은 뒤 자신이 입고 있을 팬티를 걱정했는데, 그렇다면 시인은 죽음 혹은 죽은 뒤의 일들을 표현하려고 했던 것일까요? 아마도 그렇지는 않았을 겁니다. 이미 그는 죽음을 느끼는 순간이 동시에 삶을 가장 강렬하게 느낄 수 있는 순간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경험한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 번의 교통사고를 겪으면서 말이지요. 그래서 80킬로미터로 가는 자동차 속에서도 시인은 자신이 살아 있다는 강렬한 체험을 다시 한 번 반복해서 느낄 수 있었던 겁니다.

아마도 시인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평상시에는 자신이 살아 있다는 강한 느낌을 의식한 적이 별로 없었을 겁니다. 죽음에 직면하지 않고는 삶을 제대로 느낄 수 없는 법이니까요. 죽음은 곧 삶과 직면해 있다는 역설이 여기서 발생합니다. 이런 역설의 중심부에 <죽고 난 뒤의 팬티>란 시가 자리 잡고 있는 셈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이 시가 수목장을 언급했을 때 시인의 마음 상태를 알려 주는 실마리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수목장을 이야기하면서 시인은 자신에게 남겨진 마지막 삶을 가장 열정적으로 보듬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2 죽음이 없다면 살아 있을 수조차 없다

 

"나는 살아 있다!"라는 강렬한 의식은 과연 어느 때 생기는지 한 번 생각해 보세요. 그것은 분명 죽을 상황인데도 죽지 않고 살아난 경우일 것입니다. 조금은 난해하고, 조금은 역설적인 생각일 수도 있습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이런 난해함을 해소해 줄 또 다른 철학자가 우리 곁에 있다는 점입니다. 그 사람이 바로 해체주의자로 유명한 프랑스 철학자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 입니다. 그는 '차이difference' 가 모든 것의 의미를 구성한다고 통찰했던 철학자였지요.

예를 들어 남자라는 개념을 생각해 보세요. 과연 여자라는 개념이 없다면 남자라는 개념을 우리가 생각할 수 있었을까요? 아마도 불가능했을 겁니다. 남자라는 개념에는 이미 '여자'라는 의미가 동시에 전제되어 있으니까 말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에 대해 누군가"남자답다"라고 이야기한다면 이것은 그 사람이 "여자답지 않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의미로 이해될 수 있지요.

남자 혹은 여자와 관련된 이런 논리를 데리다는 죽음과 삶에도 그대로 관철시키려고 합니다. 죽음과 삶은 서로 구별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서로가 서로에 의존해 있다는 겁니다. 이제 직접 그의 말을 들어 보도록 하지요.

 

나의 죽음은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말하는 데 구조적으로 필수적이다.(……) "나는 살아 있다"라는 언표는 나의 죽어 있음을 수반하며, 그것의 가능성은 내가 죽어 있을 가능성을 요구한다. 그리고 거꾸로도 그렇다. 이것은 포E.A Poe의 기이한 이야기가 아니라 언어의 평범한 이야기이다. 위에서 우리는 "나는 존재한다"에서 출발해서 "나는 죽을 자로 존재한다"에 이르렀던 바가 있다. 여기서 우리는 "나는 죽어 있다"로부터 "나는 존재한다"를 이해하게 된다.

—《목소리와 현상La Voix et le Phénomène》

 

데리다의 이야기가 어렵다면 '나는 살아 있다'는 말이나 생각이 어느 경우에 생기는지, 그리고 어떤 조건에서 그렇게 느끼는지 생각해 보세요. 우선 지진 같은 무서운 자연재해가 자신이 사는 지역에서 발생했다고 가정해 보지요. 대다수의 건물들이 붕괴되었으며, 그에 따라 화재가 도처에서 발생합니다. 당연히 수많은 사람들이 죽겠지요. 이 상황에서, 한 사람이 운 좋게도 생존했습니다. 폐허가 된 광경을 보면서 그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이렇게 말하겠지요. "나는 살아 있다!" 이럴 때 "나는 살아 있다"라는 표현에는 죽음이 글자 그대로 하나의 흔적처럼 새겨져 있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죽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 혹은 자신이 용케도 벗어난 죽음에 대한 생각이 미리 전제되어 있지 않았다면, 우리는 이렇게 외칠 수도 없었을 테니까요.

우리는 사실 무의식적으로나마 이 같은 의미들을 이미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친구가 만약 전화로 "나는 살았어!"라고 말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이 말을 듣고 여러분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무슨 일이니? 도대체 너 지금어디에 있는 거야?" 아마 십중팔구 다급한 목소리로 이렇게 대응할 겁니다. 이런 다급한 반응의 이면에는 무엇이 전제되어 있는 걸까요? 우리는 이미 친구가 한때는 죽음과 삶의 기로에 서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다행히도 죽음으로부터 벗어나 생존을 유지했다는 사실을 무의식적으로 직감하고 있는 겁니다. 만약 "나는 살았어!"라는 친구의 목소리를 듣고 누군가가 "넌 당연히 살아 있잖아. 그러니까 지금 나에게 전화를 걸 수 있는 거 아니야. 도대체 무슨 일로 전화한 거야?" 하고 대답한다면, 여러분은 과연 어떤 생각이 들 것 같나요? 아마도 대개의 경우 이 상대방 친구가 제정신인가 하는 생각마저 들지 모릅니다.

 

3 해체에서 해탈로

 

'삶'은 '삶'일 뿐이기 때문에 죽음과는 어떤 관계도 없다고 생각하는 '동일성identity'의 사유에 대해 데리다는 해체deconstruction의 칼날을 들이댑니다. '나는 살아 있다'는 표현 혹은 생각은 결국 '나는 죽는다'라는 것과의 차이에 의해서만 의미를 지닌다고 보았기 때문이지요. 이 점에서 데리다는 '차이'의 철학자라고 말할 만합니다. 그는 동일성에서 차이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차이에서 동일성이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했으니까요. 그렇지만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차이différance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차이'를 나타내는 프랑스어로는 'différence'가 이미 있는데도 데리다가 'différance'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쓴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실 'différence'나 'différance'는 소리로는 구별되지 않고, 단지 글자로만 구별될 뿐입니다. 이런 말장난을 통해서 데리다가 의도했던 것은 무엇일까요? 진정한 차이란 목소리의 상태에서는 드러나지 않고 목소리를 넘어선 차이의 체계에서만 드러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애인이 갑자기 "사랑해"라고 평소에 하지 않던 말을 일부러 이야기한다면 감이 없는 멍청한 사람은 "나도 사랑해" 하고 대답하는 것으로만 만족할 겁니다. 그렇지만 현명한 사람이라면 애인이 지금 무언가에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직감하겠지요. 데리다라면 "사랑해"라는 이야기에 "나도 사랑해"라고 답하는 멍청한 사람이야말로 현재 발화되는 음성언어나 목소리만을 중시하는 사람이라고 이애할 겁니다. 이제 데리다의 입장은 좀더 분명해졌습니다. 그는 음성언어는 차이의 체계로 이루어진 문자언어의 흔적을 결코 벗어날 수 없다고 본 것입니다. 결국 어떤 문장을 목소리로 발화한다고 할지라도, 그 문장은 결국 문법적 구조 혹은 차이의 체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데리다가 'différance'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낸 이유를 알겠지요. 목소리나 현재의 발화만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데리다가 'différance'라고 이야기해도 그냥 똑같이 'différence'로 들을 겁니다. 결국 현재의 목소리만으로는 모든 것을 분명히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을 데리다는 알려주고 싶었던 겁니다. 목소리 중심주의에 대한 데리다의 비판은 현재를 절대적으로 긍정하는 현전의 형이상학을 비판하는 데까지 이르게 됩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른바 각각의 '현재' 계기, 즉 현전의 장에 나타나는 각각의 계기들은 자신이 아닌 다른 것과 관계를 맺을 때만 의미가 가능하다. 다시 말해 현재 계기들은 자신 속에 과거 계기의 표시를 가지고 있으며 미래 계기와의 관계로 손상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흔적은 미래나 과거와 아무런 관계도 없지만, 미래나 과거와 같이 현재가 아닌 것과의 관계에 의해 현재를 재구성한다. 이것은 모두 차이différance 때문이다.

—《목소리와 현상》

 

누군가 "나는 살아 있다"고 말하면 그 목소리speech는 바로 내 앞에서 현재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이것을 보통 현전presence이라고 부릅니다. 보통 현재를 'the present'라고 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현재란 무엇인가 바로 지금 내 앞에 있다는 시제를 의미하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현전은 어떤 것이 '이 순간 바로 내 앞에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렇지만 "나는 살아 있다"라는 표현이 순수하게 현전할 수 없다고 보는 것이 데리다의 입장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이 표현 안에는 조금 직전에 내가 죽을 뻔했다는 시제가 함께 함축되어 있으니까 말입니다. 다시 말해 '나는 죽을 수도 있었는데 다행히도 살아 있다'라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지요. 이 때문에 데리다는 장난스럽게 새로운 신조어를 만들어서 목소리와 현전을 강조하는 입장을 조롱했던 것입니다.

'현전'을 비판하는 데리다의 논리가 잘 이해되지 않는다면, 그냥 단순히 이렇게 생각해 보아도 됩니다. '현재'라는 것은 그 자체로 순수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나 '미래'와 구분되면서 비로소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이지요.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가 아닌가요? 만약 "지금 밥을 먹고 있어"라고 친구가 말한다고 해 보지요. 이것은 분명 현재시제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말하거나 듣는 순간, 친구는 자신이 조금 전까지의 과거에는 밥을 먹지 못했다는 사실을 이야기한 셈이고, 동시에 우리는 그가 조금 뒤에 배가 부를 것이라는 점을 에견합니다. 이제 왜 데리다가 현전을 비판하는지 어느 정도 드러나지 않나요? 순수한 현재가 불가능하다면, 그것을 토대로 해서 가능해지는 '이 순간 바로 내 앞에 있음'이라는 생각, 즉 '현전'이라는 생각도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데리다가 현전을 그렇게 비판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실 데리다의 비판은 '현전' 개념에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그는 서양철학이 강조했던 모든 개념들도 절대적인 근거가 없다고 비판했기 때문이지요. 데리다의 사유를 해체주의deconstructivism라고 규정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 겁니다. 그렇지만 그가 지적인 즐거움을 위해 비판과 해체를 일삼고 있다고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자명해서 조금도 의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되는 모든 것을 해체함으로써, 데리다는 고질적인 편견을 깨뜨려 우리를 구체적인 삶의 세계 속으로 다시 되돌리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데리다의 논리에는 불교의 전략과 유사한 것이 있습니다.

모든 것이 공空, śūnyatā으로 귀결된다고 주장한 나가르주나 Nāgārjuna, 150?~250?라는 철학자를 들어보았나요? 그는 절대적으로 존재한다고 여겨지는 모든 것이 사실 '의존적으로 발생한다緣起, pratityasamutpada'는 점을 논증합니다. 이에 따르면 결과적 모든 것들은 자기동일성自性, svabhava이 없는 것, 즉 '공'한 것으로 판명되지요. 그런데 공을 이해한 사람은 허무주의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이제 편견을 벗어나서 세상을 있는 그대로 새롭게 본다는 점에서 데리다의 비판은 나가르주나의 정신을 공유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오규원은 죽고 난 뒤 팬티를 걱정하는 것이 우스운 일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우스운 이야기라기보다 무서운 이야기라고 해야 될 것 같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죽은 뒤의 팬티를 생각하면서 시인은 삶에 대해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던 것이니까요. '죽고 난 뒤의 팬티'를 읽었다면 데리다는 팬티를 걱정하는 시인의 말에 이미 과거나 미래의 흔적이 차이로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래서 시인의 시는 우습다기보다는 오히려 심각하기까지 한 겁니다. 살았다는 생각이나 느낌이 시인의 시를 통해 죽음과 떨어지지 않고 항상 함께 울려 퍼지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이로써 보면 우리는 오규원이 수목장을 원했던 이유를 짐작할 만합니다. 여기서 '수목'이 '삶'을 의미한다면 '장'은 장례식, 그러니까 '죽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시인은 수목장을 통해 '삶'이 항상 '죽음'과 같이 있다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요? 이런 생각이 적절하다면, 시인은 수목장을 통해 마지막 시, 데리다 그리고 나가르주나와 공명하는 가르침을 담고 있는 시 한 수를 더 읊었던 셈이지요. '시를 배우겠다는 미친 제자들' 앞에서 말입니다.

 

—강신주『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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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 / 1967년 경남 함양 출생. 사랑과 자유의 철학자. 그는 강단에서 벗어나 대중 강연과 책을 통해 우리 시대의 인문학자가 되었다. 새로운 철학적 소통과 사유로 모든 사람이 철학자인 세상을 꿈꾼다. 연세대학교 대학원 철학과에서 「장자철학에서의 소통의 논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강단철학에서 벗어나 대중 아카데미 강연들과 책을 통해 자신의 철학적 소통과 사유를 가능한 많은 사람들과 나누기를 원한다. 동양철학 전공자이면서 서양철학의 흐름에도 능한 그는 쉽게 읽히는 철학을 지향하고, 철학과 문학을 동시에 이야기하며 이성과 감성을 만족시키는 철학자다. 저서로 『철학, 삶을 만나다』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 『상처받지 않을 권리』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 『철학 VS 철학』 『감정수업』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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