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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6-19 15:09
 글쓴이 : 길벗514
조회 : 308  
"저기요."
뒤에서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였다.
버스에는 나 포함 두 명이 탔으니까, 저건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소리다. 몸을 움찔거리려는데,
"저기...커피 한 모금만... 주실 수..."
(이건 무슨 개코 원숭이같은 수작이지?')
얼굴만 살짝 뒤로 돌려보니 대각선 뒷 자리에 앉은 남자가 내 쪽을 향해 상체와 고개를 내밀고 있다.
(이럴 수가...)
무조건 반사작용도 아니고 최면에 걸린 것도 아닐터인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나의 뇌가 어떤 의사결정 회로를 작동하기도 전에, 커피를 든 내 팔이 그냥 그 남자 쪽으로 움직인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ㅠㅠ) 두 손으로 커피를 받아드는 남자는 30대 아니면 40대로 보였고, 결혼을 했거나 하지 않은 것 같았다. (내 예측은 거의 빗나간 적이 없다.)

버스는 겨우 시내를 빠져나와 자동차 전용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소도시인 K읍에서 대도시인 C시로 가는 시외버스는 대략 한 시간당 한 대 정도 있었고, 소요 시간도 한 시간 정도 걸렸다. 이번 버스는 승객이 거의 없어 좋기는 하지만 출근 시간보다는 조금 이르고, 다음 버스는 출근 시간에 맞기는 한데 사람들이 너무 붐빈다. 완벽한 시간대의 버스는 없다. 그러면 버스가 아니지.

버스가 달리면서 나의 두뇌도 작동을 시작했는지 약간의 쪽 팔림이 밀려왔다.
(아! 내가 뭔 짓을 한거야?)
(근데, 도대체 몇 모금을 마시는 거야? 뻔뻔하기도 하네.) 
남자가 호로록 호로록 소리를 내며 커피를 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안 돌려줘?)

"저기요."
라는 또 한번의 부름에 뒤 돌아보니 남자는 한 손에 커피를 들고, 다른 손 검지로는 컵 가장자리를  가리키며,
"이 쪽으로 마셨습니다." 했다.
남자는 술기운이 남아있는 듯 얼굴 빛이 약간 붉어서 코카서스인종 같았고, 어제 걸 또 입은 것 같은 와이셔츠 위에 회색 콤비자켓을 걸치고 있었다.
다리를 포개고 앉는 것이 자연스럽게 보이는 것으로 미루어, 밉지는 않으나 제 잘난척 좀하는 직장인이나 전문가 혹은 자영업자 또는 기타 직종 종사자로 보였다. (내 예측은 거의 빗나간 적이 없다.)

근데 이건 뭐지? '커피 한잔 하실래요?' 하는 것이 통상적인 작업의 정석일 진대, '커피 한 모금 주실래요?'라니,  이 자식이 나를 호구로 봤고 나는 스스로 호구가 된 멍청한 여자인거야?

좀 따져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그러자면 일단 몸을 비틀고 얼굴을 135 °까지 돌려야 되는데, 그럼 얼굴도 좀 이그러질거고 목에 힘줄도 생길꺼라 모양 안나오겠는데. 멀미도 좀 쏠릴거 같고...관두자. 관두자니 부화가 나고,
"근데 한 모금 달래 놓고 왜 다섯 모금이나 마셔요?"
천천히 우아하게 고개를 돌렸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135°는 무리였다.
눈알이 막 튀어나오려고 했다.
"세 모금 마셨습니다. 두 번은 뜨거워서 불었던 거고요."
(그랬구나.)
참 유익한 문답이었다. 남자는 인중이 뚜렷한게 가장 큰 특징이었고, 성실해 보인다는 걸 무기로 삼지는 않을 정도로 순수해 보이기는 했다. 천천히 몸과 고개를 원상태로 돌렸다. 남자가 마신 쪽으로든 반대 쪽으로든 커피를 마실 입장은 아니게 되었다. 버스는 새로이 번져가는 아침 햇살을 가르면서 시원스럽게 달리고 있었다.

"저기요."
남자가 세 번째로 나를 불렀다. 지난 2년 반 동안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출근 버스안에서 오늘은 세 번씩이나 누가 나를 부르는 것이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도 아니고 세 번을.
"커피 안드실 거면 제가 좀... "
"상가집에서 급하게 버스타러 오느라 목도 마르고 술도 덜 깨고 해서요."
(유흥상가는 아니겠지?)
"다 드세요."
줬다 받은 커피를 다시 반납했다.
남자는 피곤한 기색이면서도, 태어날 때부터 부여받은 것 듯한 온화한 눈 빛으로 고맙다고 말했다. 최소한 나를 가지고 놀자는 뜻은 없는 것으로 인정해주기로 했다.

이윽고 버스는 K시 입구로 진입했다.
"커피가 이렇게 맛있는 건 줄 몰랐습니다. 너무 감사해서 어쩌죠?"
이번에는 남자가 고개를 쭈욱 빼서 최대한 내 뒤통수 쪽 가까이에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내가 또다시 몸과 고개를 돌려 남자를 바라보자,
"이 버스로 매일 출근 하시는 거지요?"
라고 했다. 나는 물음에 대답을 하지 않고 그냥 천천히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렸는데, 사실은 내가 '^^' 이렇게 살짝 웃었더라고, 나중에 이 남자가 말해주었다.

예기치 않은 일이 생겨나면 사람들은 그것을 우연이라고 부른다. 나중에 그것이 필연으로 변하는 경우에는, 사실은 거기에 인간의 의지가 개입되어 있는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 우연은 한 번 밖에는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늘 그랬듯이 K시 입구의 간이 승하차장에서 내렸고 그는 종점까지 간다고 했다. 그로부터 사흘쯤 뒤인가 그 남자는 C읍에서 다시 이 버스를 탔다. 이번에는 커피 한 잔을 손에 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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