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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1-08 02:08
 글쓴이 : 김용호
조회 : 278  

금물결 은물결(金銀波)

 

           김재환



조종간操縱杆 계기판 너머 프로펠러 아래로 은물결이
보석처럼 반짝인다.
오드리 헵번이 기웃거리며 눈요기하던 <티파니>보석점
진열대보다 더 눈부시다.
긴 장마 끝 오랜만에 아침 날기[飛行]를 한다.
윈도를 스치는 발아래 8월의 산하山河는 푸르다 못해 거무죽죽하다.
바람에 흐르며 스치는 목화솜 뭉게구름은 갓난아기 뺨처럼
보드랍고 포근하다.
물안개 피어오르는 동트는 호수에 한 가닥 바람이 스친다.
은물결은 크고 빠르게 출렁대며 반짝인다.
한 여름밤 은하수 속에서 현란히 춤추는 별무리들의
댄스파티장처럼 황홀하다.
아침 은물결은 차분한 설렘의 희망이다. 보름 전후 청아한 달밤,
달빛에 어리는 강변의 은물결은 처연한 외로움이다.
어슴푸레한 달빛과 산 그림자가 신비로운 분위기로 우리의 추억을
깊은 물 속으로 가라앉힌다.
저녁놀 붉게 타는 해 질 녘 비행은 내게 또 다른 서러움을 준다.
강물 위에 금물결은 휘황찬란한 왕의 금관처럼 눈부시게 찰랑댄다.
호화로움 뒤편엔 서러운 연민의 회한이 괸다.
강물은 서서히, 때론 쏜살같이 흐른다.
그의 의지意志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낮은 곳으로 낮은 곳으로,
길고 혹은 짧은 여행을 한다.
우리네 삶도 마찬가지. 태어난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말없이 조용히
발걸음을 내딛는다.
금물결 은물결金銀波은 내 아호雅號 은파銀波와 성인 김金을
우리말로 푼 이름인데 아름답고, 다분히 로맨틱하고 낭만적이며
감성적인 단어다.
해·낮·남성·강함을 상징하는 金(쇠김, 성김), 달·밤·
여성·연약·아름다운 무드와 뉘앙스를 살포시 내는 銀(은은). 波
(물결파)는 움직임과 감쌈, 포용과 변화를 갈구하는 언어라
좋아하는 단어이다.
부모님과 떨어져 큰집에서 얹혀 살던 감수성 예민했던 열 살 남짓
하던 때, 지독히 외로웠을 때, 비단 강[錦江] 강가에서 소매고
소 꼴베며 아침저녁으로 보던 강물의 반짝임.
쓸쓸함이 뭔가도 모르면서 센티멘털한 소년은 그렇게 이름을 지었었다.
그리고 반세기가 흘렀건만 버리지 못하는, 전혀 싫증나지 않는 닉네임이다.
물은 저 스스로 결을 일지 못한다.
바람의 도움이 있어야 한다.
셈과 약함, 방향에 따라 모양새를 만든다.
햇빛이냐 달빛이냐에 따라 금물결이 되고 은물결이 되기도 한다.
빛의 명암과 강도에 따라 맵시가 결정되고 분위기가 달라진다.
이세상 모든 일은 혼자 힘으로 되는 것이 없음을, 평범한
진리를 가르쳐준다.
고여 있는 잔잔한 호수와 흐르는 강여울의 반짝임은 사춘기 소녀와
소년의 모습이다.
금물결 은물결은 계절, 시간, 때, 장소, 주위의 자연적 조건에 따라
느낌과 뉘앙스가 다르다.
느끼는 사람의 마음 자세에 따라 천차만별 색깔이 눈에 보이고 느껴진다.
한때, 높고 빛나는 이상과 목표의 푯대를 찾아 정열을 불사르고
혼신을 다했던 일들이 욕심과 아집이었던 것을 이상과 현실의
부조리 속에 나와 생각이 다른 자들을 증오하고 불신한 내 허물을
뉘 탓이라 원망하랴.
비록 지나온 내 삶이 만족스럽진 못했어도 내 아호 ‘은파’,
금물결 은물결처럼 조용하고 차분하게, 은은하게 빛나는
그런 사람으로 살고 싶다.
그렇게 남고 싶다.
그저 미세한 바람에 물결치는 아침 호숫가 파랑波浪처럼,
저녁노을 붉게 타는 황금색 물결처럼, 멋과 맛을 즐기며 살아가리라.
고독에 휘감겨 한축寒縮을 느끼듯 외로운 달밤에 어슴푸레 이는
은물결처럼 추하지 않고 우아하게, 요란치 않고 고결하게, 화려함보다
소박하게 살아가련다.
늘 금 물결 은물결의 작지만 강렬한 반짝임을 멈추지 않으면서…….
≪수필과비평≫ 2009년 9/10월호(103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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