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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1-13 01:08
 글쓴이 : 김용호
조회 : 333  
좋고 타령

박희종


평소 앞산은 분명 한 봉우리로 보이나, 안개가 골짜기 타고 오르는 날
겹쳐 보이지 않던 또 하나의 봉우리 있으니
두 손 번쩍 들어 하늘 받치고 있는 모습이 한 폭 동양화 같아 보기 좋고

하는 일 없이 이삼 일 동안 빈둥거리다 좀이 쑤셔
집 안팎과 전답을 돌고 돌아 이 일 저 일 찾아놓으면
내가 이내 필요한 존재가 되어 살아야 할 가치를 느끼니 또한 좋고

흙집 수리하느라 황토 반죽하여 맨손으로 맥질하다 보면
거칠었던 손, 마치 아이 속살인 양 보들보들해져서 좋고

개밥, 닭밥, 고양이밥 주고 산책로 따라 농장에 올라가 염소와 눈맞추고
발걸음 총총 잣나무 숲 한 바퀴 돌다보니 땅 기운 저절로 몸을 적시고
피톤치드 향기로운 기운 시나브로 어지러운 머리에 스미니 또한 좋고

잡초는 관심도 없고 비료도 안 주는데 왜 이리 무럭무럭 자라는지
예초기 둘러메고 구석구석 깎노라면 서로 다른 풀 내음 코끝을 간질이고
일 끝나 돌아보면 사우나에서 땀 빼고 머리손질 한 듯 개운하여 좋고

안 보면 보고 싶고 보면 헤어지기 싫은 친구가 보내온 책 한 권
<기적의 채소>
"옳다구나" 하고 비료 주지 않고 산에서 긁어온 썩은 나뭇잎으로
거름하는 고전압 텃밭에 물주며 입맛 다시다 보니 어느덧 갈증 난
내 목이 촉촉해지는 것 같아 좋고

20년 전 용담댐 수몰지에서 주워온 초등학교 책상과 의자가 삐걱거려
이리저리 손보다 새로 만들고 싶어 시행착오 거듭하며
대패질 못질 또닥거리노라면
은은히 풍기는 나무 냄새 어디에도 비할 데 없이 향긋해 좋고

좋아하는 노래 크게 틀어놓고 겨우내 땔 나무 쾅쾅 도끼질하여
하늘 높이 쌓아 놓은 장작을 보면 올 겨울에도
등 따숩겠다 뿌듯해서 좋고

장작 타는 아궁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 탁탁, 톡톡 말 건네는
불꽃을 보고 있노라면
나도 몰래 태고의 신비 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아 좋고

때때로 밤하늘별을 보며 “여보! 북두칠성이 우리 머리 위에 있어!”
소리 지르는 소녀 같은 마누라가 있어 또한 좋고

가끔 혼자 있고 싶을 때
황토방 툇마루에 앉아 연기에 그을린 시커먼 서까래 올려다보노라면
석유냄새 물씬 풍기던 후지카곤로, 밥 담아먹던 놋주발, 하얀 고무신,
빨간 우체통 등
새록새록 어렸을 적 고향집 생각나 빙그레 미소지으니 좋고

뒤뜰 항아리들보고 있자니 내 무릎 다치면 빨간약 발라주고
심술 난 내 심사 달래주던 어머니 넓고 깊은 품속처럼 푸근해서 좋고

해우소에 앉아 아무 생각 없이 명상에 잠기다 보면
하염없이 가는 시간 붙잡을 수 있어 좋고

오일장에 마누라 따라가 비닐 봉다리 들고 다니며
타일 박힌 그 옛날 선술집에서 잔술 두어 잔 걸치니 또한 좋고

깊은 밤, 요염한 초승달 바라보면
좋아했으나 말 한 마디 못하고 헤어진 옛 여인 생각나 좋고
둥근 보름달 보면 뱃속에 아기 품은 듯 든든하여 좋고

묵은 판때기 놓고 마음 모아 좋은 말과 글을 새기다 보면
이 길이 내 길이구나 싶어 나도 모르게 빠져들어 좋고

저녁 밥상에서 반주삼아 곁들인 두어 잔 막걸리가 아쉬워
술 한 병, 멸치 한 주먹 쥐고 황토방 건너가 꼴짝꼴짝하다보니
지난 일들 파노라마처럼 흐르며 옛 일, 옛 사람 생각나 또한 좋고

농사짓느라 지친 동네 사람들 모셔
차 한 잔, 술 한 잔 대접하면 서로 흐뭇해 좋고
거꾸로 식사 초대받아 이웃집 가면
산에서 따온 귀한 나물밥상에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니 또한 좋고

봄이면 설레는 연초록빛, 한여름엔 쏟아지는 소나기,
가을엔 타오르는 단풍, 겨울엔 함박눈 펑펑 가지마다
눈꽃을 볼 수 있어 좋고

때가 되어 좋은 며느리 들어와 편안해 하는 아들 보니 좋고
해마다 삐악삐악 손자손녀 늘어나 재롱 볼 수 있으니 더욱 좋고

저 홀로 싹 틔우는 머위, 쑥, 민들레 지천에 피어
원하는 이들에게 한 보퉁이씩 싸주고 고맙다는 인사 받으니 좋고

까치가 울면 좋은 친구들 찾아와 차 한 잔 놓고 눈으로 말하고
뜻밖에 말 길어지면 밤새 속내 털어놓을 수 있으니 더욱 좋고

몸 부려 일하고 기분 좋게 뻐근할 때
막걸리 한 잔이면 뭉침과 풀림이 저절로 조화로워
피곤했던 몸 슬슬 살아나고 머리 또한 맑아지니 역시 좋고

씨 뿌리고 물 주어 애써 가꾼 제철 음식 먹으니
황제의 식탁이 부럽지 않고
우리 땅 우리 음식이 우리 가족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것 같으니
또한 좋고

낮과 밤이 만나는 황혼녘이면 산 자와 죽은 자들이
밥 잘 먹었어?
요즘 어때?
난, 잘 있어.
그럼 잘 가.
다음에 보자고.
오순도순 이야기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으니 이 또한 좋지 아니한가

박희종
2001년 창조문학신인상
한국문인협회 회원
진안문인협회 회원
공유갤러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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