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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12-15 06:27
 글쓴이 : 차순혁
조회 : 332  

수태고지



모두가 별 감흥 없이 출근하는 날
철커덩 칙 철커덩 칙 하는 소리에 우스꽝스런 수백 행위예술가들
뮤지컬 단테의 신곡

휘적거리는 팔과 어정쩡한 기마자세 베아트리체를 위한 고행

죄를 씻기 위해 끊임없이 쇳물을 들어 

탐욕스럽게 쿰척대는 기계의 정수리로 부으면 그는 으적거리며 나사를 발라 뱉는다
먹을 것도 없었다는 툴툴거림은 예술가들의 굶주림

그들의 탐욕에 발등을 욱여넣은 어느 단테
가브리엘은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 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할 지어다’
말씀이 그의 태내로 들어가는 순간 이었다
베아트리체가 그를 떠나는 순간 이었다
 


활연 17-12-15 22:51
 
이 시를 읽다가 김언희 시인이 생각났습니다. 아주 인상적이었던,
나에겐 충격적인 느낌조차 있었던.
제재가 유사한 부분이 있어 자료로 옮깁니다. 이 시에 제가 덧붙일 말은 없습니다.
어떤 글은 제게, 읽기만으로 충분할 때가 있거든요.
글을 센터 기준으로 배열하는 게 어떤 미덕이 있는지는 모르겠네요.
개인적인 느낌으로, 제가 자주 뵙는 분의 글이 아닐까 싶지만
시는 텍스트를 읽는 것이지 시인을 읽을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습여성성에 이탈하는 글들은 제겐 어떤 촉매가 되고, 의식의 확장에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시의 태양은 사뭇 다양하고, 인간 의식에 드리우는 두레박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하는, 한번 읽어보자는 참고 자료로 놓습니다.

더럽게 재수 없는

  김언희



더럽게 재수 없는 수태고지
초장부터 똥 밟은 나는

아침저녁 살충제에 제초제를 섞어 마시고
줄담배를 피우며 수음을 하네

(내 눈이 걸려보지 않은 임질이라고는 없지만, 내 입이 걸려보지 않는 매독이라곤 없지만)

징글맞게 재수 없는 수태고지
구역질 구역질 애도의 헛구역질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한번 박혀볼래?
박아줘?
더럽게 지분거리는 벌건 십자가의 이름으로

나는 내 자궁에 불을 지르고
그 불길에 담배를 붙이네



  시인은 극한까지 가보는 자이다. ‘높고 외롭고 쓸쓸하게’ 가는 그 길은 대중들의 시선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진 외진 곳이어서 누구나 쉽게 가는 길은 아니다. 그러나 많은 시들이 그 길 위에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상당수의 시인들이 주저하고 망설이는 곳. 귀신이 나올 것 같아 슬금슬금 피하는 곳. 어릴 적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당집이나 상여집 같은 곳. 그래서 아무도 근접하지 않는 곳. 바로 그 자리에서 시는 죽음을 먹고 태어난다. 주체가 소멸하고, 인습과 관례가 사라지는 낯설고 기이한 곳. 소위 정상적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절대로 근접할 수 없는 곳. 내던지고 저질러야 간신히 도달할 수 있는 곳.
  그곳에서 발아한 시 한 편을 본다. 사회적 통념, 가치 체계와는 먼 시다. 김언희 시인의 「더럽게 재수 없는」은 ‘수태고지’ 자체를 재수 없는 일로 규정한다. 누가복음에 기록된 수태고지의 내용은 “천사가 일러 가로되 마리아여 두려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이다. 그러나 시적 주체는 이러한 종교적 언술에 반기를 든다. 동정녀 마리아는 아이를 유산시키기 위해 제초제를 마시고 “줄담배”와 “수음”을 하며 눈과 입은 이미 임질과 매독에 걸린 상태다. 이러한 진술은 부정하고 타락한 세계에 대한 거부를 전제로 한다. 즉 임질과 매독에 걸렸다는 것은 세계는 이미 구원 가능성이 없을 정도로 부패했다는 것이고 어떠한 희망도 없다는 단호한 판단의 결과이다. 화자는 계속 “징글맞게 재수 없는 수태고지”에 몸서리를 친다. 이러한 내용은 종교적 사실을 시적 상황으로 변이시켜 진술한 것이다. 신성모독과 종교에 대한 왜곡과 폄훼로 지탄받을 수도 있는 내용이지만 시적 주체는 성경 속의 이야기를 통해 현실 종교의 문제를 비판적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 연에서 화자는 통렬한 풍자의 칼을 꺼내든다. “벌건 십자가”가 성기로 묘사된다. 십자가는 그럴듯한 종교적 명분을 내세워 개인에 대한 폭력을 일삼는 하나의 상징물이고, 종교는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더럽게 지분거리는” 대상일 뿐이다. 자유도 사랑도 구원도 아닌 다만 겁탈과 강탈을 저지르는 범죄의 도구로 그려지고 있다.
  이처럼 이 작품의 요체는 종교에 대한 정면적인 비판과 풍자이다. 거룩한 십자가를 세속적 욕망으로 발기된 물건으로 읽고 있는 시적 주체의 시선에 “더럽게 재수 없는 세계”는 거대한 지옥의 형상으로 나타날 뿐이다. ㅡ 홍일표 시인. 1958년 충남 입장 출생. 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차순혁 17-12-16 09:42
 
활연님의 고평가에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더럽게 재수 없는' 이라는 작품은 사실 처음 보는데 상당히 충격적입니다.
글을 센터로 정렬한 것은 제가 작성과정에서 글자가 겹쳐 보여 이것저것 누르다가 된 것이데, 제목과 시도 붙어버리고 모양이 좀 빠지네요

김언희 시인님의 작품을 보여주신것과, 높은 평가 감사드립니다.
안희선 17-12-16 11:58
 
- 우선, 시제로 동원된 수태고지에 대해

수태고지(受胎告知, ANNUNCIATION)는 성모영보(聖母領報)라고도 하며
대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찾아와 성령이 임하여
처녀의 몸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잉태할 것을 알려주며
마리아가 이를 받아들이는 사건을 말합니다

굳이 이를 부연(敷衍)해 말씀드리는 건

시를 대하는 독자들 중에는
기독교 신앙을 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아예 종교행위 자체를 안 하는
(저같은)무종교인들도 다수 있을 것이기에
시의 효율적 감상과 이해를 위함입니다

특히 시의 경우, 詩題는
시 전체 흐름에 있어 전제적 여건이
되고 있음도 간과할 수는 없겠기에
그러하다고 여겨집니다
(심지어 어떤 시는 시제 자체가 시의 모든 골격과
살을 말하고 있기도 하지요)

현대의 시가 이른바, 상징의 기법을 쓴 이후에
여러모로 난해한 면을 띄우게 된 것 같고
요즘의 시류(詩流) 또한 그 같은 추세에서
벗어나고 있지 않습니다

뭐, 그건 여러 문예사조의 편승과 더불어
현대인의 의식구조 자체가 그만큼
복잡해진 탓도 있겠지요
자연히 시를 표현하는 언어나 이미지도
다양한 면을 갖게 된 것이고..

또한, 시라는 게 숙명적으로 문학장르면에서도
산문보다는 월등히 진보된 형태를 취하고 있어
소설이나 수필보다 어려운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걸 무조건 난해로 치부해서
도맷금으로 싸잡아 말할 건 없겠지요
난해도 難解 나름이니까요
(그것이 담지하는 내용에 따라)

텍스트로 올라온 시를 말하기 앞서
사설(辭說)이 지나치게 길어졌습니다

우선 시의 출발점이 무미(無味)하고 고단한 출근길을
말하고 있어 피부에 와 닿습니다

아침 출근길의 전철 안 풍경은
그 무슨 생뚱한 게 아니라,
바로 현실생활 속에서의
우리들의 창백한 모습이기도 하니까요

그런데 이어지는 다음 聯은
앞선 풍경에 잘 접촉이 안 된다는 느낌입니다

" 죄를 씻기 위해 끊임없이 쇳물을 들어
탐욕스럽게 쿰척대는 기계의 정수리로 부으면 그는 으적거리며 나사를 발라 뱉는다
먹을 것도 없었다는 툴툴거림은 예술가들의 굶주림 "

물론, 시어가 전하는 이미지는 알겠습니다

즉, 현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겪는
무한경쟁의 상황속에서 빚어지는 어떤 회의,고독,또는 자기갈등으로
몸부림치며 툴툴거린다는 것 (산다는 罪를 씻기 위해)

이를 너무 무리하게 예술가라는 존재에
접속시킨 감이 있습니다

- 이 험난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모두 생의 예술가?

이를 보다 유연하고 좀 더 설득력있는
시적 상황전개로 이끌어가면 어떨까 하는,
(개인적)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연은
우리들로 하여금
진정한 삶의 가치를 묻게하고 있어
매우 인상적입니다

" 그들의 탐욕에 발등을 욱여넣은 어느 단테
가브리엘은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 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할 지어다’
말씀이 그의 태내로 들어가는 순간 이었다
베아트리체가 그를 떠나는 순간 이었다 "

사실, 돌아보면 얼마나 많은 위선과 가식이
알뜰살뜰히 충만한 세상이던가요

그건 오늘 날 사회 전방위(全方位)에 걸쳐 아주 골고루
보여주는 병증(病症)이기도 하고

탐욕에 물들어 사는 황폐한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하니까요

베아트리체는 왜 <어느 단테인 그>를 떠났을까..

즉 그건 현대라는 기계사회 속에서의 탈현실,
나아가 천편일률적 양식(良識)에서의 탈(脫) 양식의
차원을 차지하고, 거기서 우리들로 하여금
새로운 인식의 길을 찾게하는 구원적인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이런 점에서 이 시의 패턴은 자명해 집니다

부분적으로 다소 세련되지 못한 연결점이 일으키는
충돌이 감지되기도 합니다만

전체적으로는 충분히 할 말은 한 시라는
느낌입니다

詩眼도 낮은 제 주제에 비평이라기보다는,
나름의 감상으로 풀어보았네요

혜량하시구요
     
차순혁 17-12-16 14:08
 
우와...안선생님의 혜안이 더 깊은 곳을 꿰뚫어 주셨네요

사실 출근을 해야하는 계층, 그중에서도 공장근로자를 그리고 싶었는데요

'그들의 탐욕에 발등을 욱여 넣은 어느 단테'는 사실 산업재해를 그린 것입니다.
베아트리체를 위해 연옥을 헤매이는 단테, 그 연옥 속에서 기업과 노동자의 관계는
산업재해라는 극단적인 상황에서 더욱 비참해 지는데요

프레스에 발등이 끼어 그는 더이상 노동을 제공할 수 없고, '가브리엘' 은 일방적인 통보를 하게 됩니다.
노동자에게 있어서 '그들'이라 하는 고용주와 기업은 대항할 수 없는 절대자로 보입니다.
그런의미에서 '수태고지'는 어쩌면 신성시 여기는 사건임과 동시에, 가장 불쾌한 통보일 수 있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부조리를 '신성'이라 하는 종교적 수단으로 정중히 비아냥 대는 시를 써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지나친 작가주의적 표현론에 갇혀있었나 봅니다. ㅎㅎ
'철커덩 칙 철커덩 칙' 이라는 의성어는 공장의 기계가 가동되는 소리였는데 지하철의 풍경을 연상케 했네요 ㅎㅎ
공장의 근로자들은 저마다 가장 효율적이고 우스꽝 스러운 자세로 근로하는데 그것을 묘사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모습을 난해한 현대 예술가에 빗대어 보았습니다.

전체적으로 제가 연상한 모습과 독자께서 연상한 모습이 다소 상이하네요 ㅎㅎ
민망하기도 합니다 ㅎㅎ

안선생님의 비평에 '!!!!' 하며 느끼는 바가 많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께서도 건필하십시요 ^^
          
안희선 17-12-16 14:35
 
시는 결국, 체험의 산물이며 의식의 산물인 동시에
고통의 산물임을 다시 한 번 곱씹어봅니다

시인 자신의 시해설을 대하니,
연의 흐름이 순차적으로 매끄럽지 않았다고
생각되었던 부분이 시적 제재 題材(전철, 철공소)에 관한 인식의
차이에서 비롯되었음도 알게 되네요

따라서, 너무 민망해 하실 필요는 없구요

<시읽기>에서 시인의 의도와 달리
독자는 독자의 몫으로 건네지는
것도 분명히 있기에 말입니다

다만, 철공소의 풍경과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노동자들의
비극적이면서 동시에 해학적인 모습이 (시인의 부연설명 없이도, 시 자체만으로 )
공감이 가면 좋았겠다라는 아쉬움이 여전히 남습니다

아무튼, 정신의 갈등이 빚어낸 좋은 연주를 감상했다는 느낌

즉 非現實 (기독교에 말하는 수태고지)와  부조리한 現實 사이를
넘실거리는 연주라고 할까요

저의 부족한 평에도 불구하고 너그럽게 이해를 해 주시니,
감사하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차순혁 17-12-16 14:57
 
아이고 별말씀을요...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해보겠다며 감히 그분들의 모습을 그렸는데
역시나 제 역량으로는 그저 시도였습니다 ㅎㅎ

볼것도 없던 텍스트를 이렇게 여기저기 살펴봐 주시니 어쩔 수 없이 민망하긴 합니다 ㅎㅎ

'소통' 그 쉽고 만연해 있는 단어를 매번 잊어
또 다시 공부해야 하겠네요 ㅎㅎ
문정완 17-12-16 15:17
 
늦게 도착해 많은 이야기가 이미 있고 할말도 없습니다
왔는 김에 몇자 놓습니다

이 시를 접했을 때 난해성을 담고 있다
그 난해성이 가독성을 불러일으키도 했지만 그 가독성이
의미론에 기반을 가진 가독성과는 거리가 멀었고 이게 무슨 뜻일까
하는 가독성에 머물었다는 점이 시의 전개가 일부는 성공했고 일부는
실패했다 싶습니다 (이 공간이 그렇다보니 흠결을 뒤적거립니다)

상징의 영역은 시에서 한단어일수도 있고 한 부분 문장일수도 있고 문장전체일수도
있겠습니다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 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할 지어다’
말씀이 그의 태내로 들어가는 순간 이었다
베아트리체가 그를 떠나는 순간 이었다

마지막 연에서 현대사회를 냉소적으로 비판하는 풍자를 담고 있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상징은 멀수록 좋고 그러나 동일성이 있어하는 전제를 함께 담보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시는 모호성과 시인이 의도한 바를 상당히 비껴가는 현상을 겪게되지요

저는 위 본문이 시라는 텍스트로  읽히기 보다 그냥 하나의 글이란  텍스트에 더 가깝게 읽어 졌습니다
즉 내용적 의미에서 시사하는 것은 존재해도 시의 질감으로서는 함량미달이다 것이죠

탄테는 우리  모두를 상징하고 베아트리체는 이상 꿈 희망 유토피아 사상 등등을 상징한다 할 것입니다


위 안시인님의 말씀처럼 부분 부분 연결에서 파열음이 있고 접지가 되지 않아 문장이 서로 각자의
팔을 흔드는 괴리감이 있습니다 시인이 말한 노동자의 이미지 산업재해는 떠올려 보지 못했고 시 전체적인
분위기에서 메마른 현대사회의 여러가지 부조리에 대한 반항정도로 읽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연에서 왜 시제가 수태고지인가를
짐작했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시는 실험적인 전위적인 시도가 있을 때 한걸음 더 나아간다 점과 기존의 시는 이렇다는 고정관념의 틀을 깨부려는
시도는 저도 배웁니다
단지 시는 내연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외연의 존재성이 함께 거주할 때
더 빛이 난다는 점 간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좁은 시안을 가진 저가 주제넘게
전하고자 합니다 시에서의 지나친 혁명은 역성혁명에 가까운 시란 성씨를 거부하는 사태에 직면할수도 있다는 점도
함께 전합니다

폰으로 댓글 창에서 쓰다보니 눈도 안좋고 부족한 부분과 오타 등 있다면
이해바랍니다

좋은 시 많이 쓰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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