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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2-17 10:09
 글쓴이 : 찬란한빛e
조회 : 374  

'시와 그리움이 있는 마을' 영상시방 'ssun' 영상작가님 作
詩 봄, 양현근


출처:문화닷컴 http://www.munhwa.com/travel//html/tr_333.html


▲ 차고 맑은 날. 겨울 산의 하늘색이 어찌나 짙던지 검은색에 가까웠다. 
가야산 만물상을 거쳐 당도한 서성재에서 정상 칠불봉을 향해 오르는 길. 
풀어헤친 겨울나무의 흰 가지들이 마치 푸른 하늘에다 실금을 낸 듯하다.

가야산은, 금강산처럼 계절에 따라 부르는 이름이 따로 있습니다. 
겨울 가야산을 두고 ‘동설송(冬雪松)’이라 부릅니다. 겨울 눈이 쌓인 청청한 소나무 한 그루가 
눈앞에 떠오르는 운치 있는 이름이지요. 겨울 금강산을 부르는 이름인 ‘개골산(皆骨山)’에 대면 
풍류가 한 수 위입니다. 금강산과 비교할 수 있는 건 이름뿐만 아닙니다. 가야산에는, 금강산에 
있는 ‘만물상’이 있습니다. 만물상은 이름 그대로 ‘만 가지 형상을 한 바위가 이루는 세상’입니다. 

조선 시대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가야산의 만물상을 일러 ‘석화(石火)’라고 했습니다. ‘돌로 만든 
불꽃’이란 뜻이지요. 그 표현 그대로 가야산의 암봉은 맹렬하게 타오르는 불길의 형상입니다. 
내친 김에 가야산에 바친 이중환의 헌사를 좀 더 들어보시지요. “뾰족한 돌이 줄을 잇달아서 
불꽃같으며 공중에 솟아서 극히 높고 빼어나다…. 나는 듯한 샘물과 반석이 수십 리에 걸쳐 있다.” 

하필 매서운 절정의 겨울 추위에 가야산 얘기를 꺼낸 건, 지금 그곳에 가면 잎을 다 떨군 겨울 산의 
흰 뼈대를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기묘묘한 암봉이 날 선 창끝처럼 서 있는 겨울 가야산은 지금, 
시린 박하 향으로 가득합니다. 가야산 계곡에는 아직 얼지 않은 물소리가 있었고, 산정에는 푸른 빛이 
너무 짙어 검은색에 가까운 하늘이 있습니다.

이런 풍경 속으로 오래전의 사람들이 지나갔습니다. 
가야산에 들어 경관과 풍류를 말했던 이가 많지만, 실의와 절망 끝에 가야산을 찾아들어 마지막을 
의탁한 이도 적지 않았습니다. 좌절한 지식인이었던 신라의 최치원이 그랬고, 대가야의 마지막 태자 
월광도,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의 둘째 아들 김황도 그랬습니다. 

겨울 가야산에 들면 그들이 여기까지 들어온 이유가 짐작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다 내려놓고 본질로 돌아온 것들의 명징함이 겨울 가야산에는 있으니 말입니다. 
눈 쌓인 가야산에는 인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만물상을 거쳐 정상 칠불봉으로 오르는 길. 
선비 한강 정구가 가야산을 드나들며 남겼다는 글을 되새겨 봅니다. 
‘높은 곳에 오르는 뜻은 마음 넓히기를 힘씀이지, 안계(眼界·시야)를 넓히기 위함이 아니다.
’ 그렇습니다. 들숨과 날숨의 흰 입김으로 겨울 산을 가로지르면서 보고, 또 생각해야 하는 것. 
그것은 바로 ‘내 마음’입니다. 


▲가야국의 탄생과 관련한 전설이 깃든 ‘상아덤’으로 오르는 길에서 뒤를 돌아 
가야산 만물상을 바라본 모습. 치솟은 암봉 사이로 길을 잡아 건너왔는데, 
이렇게 돌아보면 지나온 길을 도저히 짐작할 수 없다.



# 합천 가야산인가, 성주 가야산인가

알려지기로는, 그리고 알고 있기로는 ‘합천 가야산’이다. 
‘합천 해인사’가 자연스럽듯이 말이다. 가야산은, 또 그 산자락의 해인사는 경남 합천에 있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지도만 놓고서 따져보면 가야산의 이름은 합천이 아니라 성주가 가져야 마땅하다. 합천은 
경남 땅이고, 성주는 경북 땅이다. 그러니 경남 땅으로 알았던 가야산이 실은 경북의 것이란 얘기다.

가야산의 임자가 성주라는 이유는 정상인 칠불봉이 성주 땅에 있어서다. 무슨 법이 따로 있는 건 아니지만, 
산은 대개 정상이 있는 곳의 지명으로 불린다. 가야산이 합천 땅으로 알려진 건, 합천에 속한 상왕봉(우두봉)이 
가야산 최고봉으로 알려져서다. 18년 전까지는 그랬다. 칠불봉이 가야산 최고봉으로 인정받게 된 건 요즘 
국가정보원 직원의 불법 댓글 공작사건 수사과정에서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는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의 요청이 계기가 됐다.

김 전 청장은 성주경찰서장으로 재직 중이던 1999년 성주군청과 국립공원관리공단에다 칠불봉과 상왕봉의 
높이를 정확히 측정해달라는 공문을 보냈다. 성주서장 재직 중 가야산을 서른 번 넘게 올랐던 김 전 청장은 
공문을 통해 ‘칠불봉과 상왕봉에 올라보면 칠불봉 쪽이 더 높아 보인다’며 의문을 제기했다. 
국토지리정보원이 정밀측정에 나선 결과 김 전 청장의 말대로 칠불봉이 해발 1432.4m로 상왕봉보다 
2.6m가 높은 것으로 계측됐다. 가야산의 최고봉이 합천이 아니라 성주로 옮겨진 것이다. 

가야산 정상이 성주 땅에 있으니 이로써 가야산은 성주의 것이 된 듯했다. 
가야산의 임자가 누구냐를 놓고 성주와 합천이, 경북과 경남은 한바탕 격전을 치렀다. 
논란은 길었지만 결론만 보면 바뀐 건 없었다. 여전히 가야산의 임자는 합천이다. 
최고봉의 타이틀을 칠불봉에 넘겨줬음에도 국립공원은 가야산 주봉을 여전히 상왕봉으로 삼고 있다. 
과학적인 계측의 결과가 켜켜이 쌓인 역사와 전설까지 바꿀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팔만대장경의 해인사도, 최치원이 깃들어 신선이 됐다는 홍류동 계곡도 모두 가야산 합천 쪽에 있으니…. 


▲ 위 사진은 아직 얼지 않은 홍류동 계곡의 모습. 계곡 물이 아직 얼지 않아 물소리가 청량하다. 
사진 가운데는 해인사의 암자 희랑대. 절벽에 자리 잡은 금강산 보덕암의 모습과 닮았다. 
사진 아래는 가야산 만물상에서 가지를 뒤틀고 자라는 소나무. 
만물상에는 이런 소나무들이 암릉 곳곳에 있다. 

# 홍류동의 풍류, 해인사의 삼매
 
매서운 겨울 추위에도 합천의 가야산 홍류동 계곡은 아직 얼어붙지 않았다. 
군데군데 살얼음이 잡혔지만 계곡 곳곳의 노송들은 여전히 싱그러운 초록을 잃지 않았고, 
물소리도 아직 청아하다. 가야산 어귀에서 해인사 입구까지 3㎞ 남짓 이어진 계곡에 붙여진 
‘홍류동’이란 이름은, 이 계곡의 단풍이 짙어 흐르는 물마저 붉다 해서 얻은 것이다. 
그러니 이 계곡의 절정이 가을인 건 두말할 나위 없지만, 
코끝이 아린 겨울 추위 속에도 홍류동의 정취는 모자람이 없다. 

어찌 된 일인지 올해 가야산의 단풍나무는 마치 박제된 것처럼 잎을 가지에 매단 채 말라붙어 버렸다. 
계곡 사이로 볕이 들면 바싹 말랐으되 아직 떨구지 않은 잎들이 온통 붉고 노랗게 반짝인다.

홍류동 계곡은 신분제에 좌절한 신라의 최치원이 홀연히 사라져 신선이 됐다는 전설을 남긴 곳이다. 
홍류동 계곡에는 최치원이 남겼다는 시 한 편이 새겨 전한다. “바위 골짝 치닫는 물 첩첩 산골 뒤흔드니 
/ 말소리는 지척에도 알아듣기 어렵구나 / 세속의 시비 소리 행여나 들릴세라 
/ 흐르는 물로 산을 둘러치게 하였구나.” 겨울의 적막 때문일까. 세속의 시비를 흐르는 
물소리로 막았다는 표현처럼 겨울 홍류동 계곡의 물소리가 유독 크다.

홍류동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면 해인사다. 신라 애장왕 때 지은 절집이라니 거기 깃든 세월만 1200년이 
훌쩍 넘는다. ‘바다 해(海)’에 도장 인(印)’의 이름은 화엄경의 ‘해인삼매(海印三昧)’에서 왔다. 해인삼매란 
풍랑이 일던 바다가 잠잠해지면서 삼라만상이 바닷물이 비치는 것처럼 온갖 번뇌가 끊어진 고요한 상태를 
일컫는다. 풍랑의 바다가 중생의 마음이라면 고요한 바다는 깨달음을 얻은 부처의 바다를 뜻한다. 
그렇다면 절집이 적막에 잠긴 이즈음이야말로 해인사가 가장 해인사다울 때다.

# 만물상… 바위가 불꽃으로 타오르다

합천 가야산이 가진 해인사와 홍류동에 맞서서 성주 가야산이 자신 있게 내놓는 건 타오르는 불꽃 형상의 
기기묘묘한 바위들이 늘어선 ‘만물상’이다. 조선시대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가야산의 기기묘묘한 암봉을 
두고 ‘돌로 만든 불꽃(석화·石火)’이라고 표현했다. 그의 말대로 만물상의 바위들은 불꽃의 형상이다.

가야산은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전국의 산 중에서 탐방코스가 가장 단출하다. 가야산을 오르는 길이라야 
딱 3개뿐이니 말이다. 합천 해인사 쪽에서 오르는 길이 하나 있고, 반대편 성주의 백운동 쪽에서 오르는 
길이 두 개 있다. 택리지에 등장하는 불꽃같은 바위는 성주 쪽에서 오르는 ‘만물상 코스’에서 만날 수 있다. 

‘만물상’이라면 금강산부터 떠오르지만, 가야산 만물상도 못지않다. 그럼에도 ‘가야산 만물상’을 사람들이 
잘 모르는 건, 그곳이 오랫동안 통제구간이었기 때문이다. 만물상은 1972년 10월 가야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됨과 함께 통제됐다가 38년 만인 지난 2010년에야 개방됐다. 만물상을 닫아놓았던 건 성난 짐승의 
갈기처럼 아찔하게 이어지는 암릉 때문이었다. 만물상 코스 대신 암릉 아래 계곡을 따라 오르는 용기골 
탐방로를 택할 수밖에 없었던 등산객들은 만물상의 암릉을 올려다보면서 입맛을 다실 수밖에 없었다.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만물상에다 탐방로를 놓기로 했던 건, 가야산을 제 것으로 삼으려다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성주에 대한 배려이기도 했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성주 입장에서 칠불봉을 가야산 정상으로 
인정받은 게 소득이 영 없었던 것은 아니었던 셈이다. 만물상 암봉에 탐방로를 내고 사다리를 놓아 
탐방코스를 열자마자 전국에서 등산객들이 몰려들었다, 특히 단풍이 물드는 가을철이면 탐방로에 
정체가 생길 정도로 인파로 붐볐다. 그러나, 겨울만큼은 예외였다. 다른 명산들이 산불방지 기간으로 
통제되고 있는 동안에도 가야산만큼은 제한 없이 오를 수 있는데도 그랬다.

# 적막한 겨울 가야산의 바람 

겨울 가야산은 적막했다. 산을 오르고 내리는 내내 단 한 명의 등산객도 만나지 못했다. 
가야산에 그동안 서너 차례 눈이 지나갔다지만, 녹지 않은 눈 위에 찍힌 발자국은 서너 개에 불과했다. 
그나마 만물상 코스에는 사나흘 전쯤에나 지나간 딱 하나의 발자국만 있었다. 산은 텅 비어 있었고 
눈밭에는 산짐승들이 지나간 자취만 뚜렷했다. 

성주 백운동에서 출발하는 만물상 코스의 구간은 3㎞ 남짓. 국립공원관리공단은 탐방 코스별로 등반 
난이도를 매겨놓았는데, 여기 만물상 구간의 경우는 다섯 단계의 난이도 중 최고인 ‘매우 힘듦’이다. 
그러나 실제 올라보면 그 정도까지는 아니다. 3㎞ 구간을 오르는 데 2시간 30분이나 걸리지만, 
긴 등반 시간은 가파른 경사도나 체력의 문제라기보다는 바위를 딛고 오르는 속도 혹은 
안전의 문제 때문이다.

겨울 만물상 탐방로가 텅 비어 있는 이유는 바람 때문이었을까. 암봉의 능선 위에 올라서자 매서운 
바람이 온몸을 두드렸다. 어찌나 바람이 차고 거센지 두통마저 일 정도였다. 바람은 위태롭게 바위 
이곳저곳에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뒤튼 소나무 잎 사이를 빗질하듯 지나가면서 소리를 만들었다.
 ‘쏴아~.’ 차갑고 매서운 겨울바람은 정신을 번쩍 들게 한다. 겨울이면 산악인들이 겨울바람을 
맞는다며 소백산을 찾는 것도 이런 이유다.
 소백산의 겨울철 칼바람이 얼마나 시퍼렇게 날이 서 있는지 아는 이들은 안다.

그만큼은 아니었지만 만물상의 바람도 정신이 번쩍 들게 하기 충분하다. 위태로운 암릉 구간에 눈이 
쌓여 있으면 어쩔까 싶었는데, 거센 바람 때문일까. 눈이 다 날아가서 능선에는 자취도 없다. 
군데군데 눈이 쌓인 곳이 있긴 했지만, 아직은 아이젠을 꺼내지 않아도 될 정도다. 만물상의 미덕은 
오를수록 점입가경의 풍경을 보여준다는 것. 점점 더 속도가 늦춰지고 감탄사가 길어지다가 마침내 
만물상의 가장 훌륭한 조망대이자, 스스로도 명승의 경관인 ‘상아덤’에 당도했다. 

# 천신과 산신이 만나 가야를 이루다

‘상아덤’이란 이름은 
달에 산다는 미인을 뜻하는 ‘상아(嫦娥)’에다 ‘바위 암(巖)’을 뜻하는 ‘덤’을 합친 이름이다. 풀면 
‘하늘의 여신이 사는 바위’란 뜻이다. 상아덤에는 가야의 시작을 알리는 상징으로 빛나는 전설이 있다. 

상아덤에 가야산의 여신인 ‘정견모주(正見母主)’가 깃들여 있었는데, 백성들에게 살기 좋은 터전을 
닦아주기 위해 힘을 얻고자 하늘에 기도를 드리니 하늘의 신 ‘이비가지(夷毗訶之)’가 오색구름 수레를 
타고 내려왔다. 천신과 산신은 가야산에서 부부의 연을 맺고 아들 둘을 두었는데 큰아들이 대가야의 
첫 왕이 됐고, 둘째 아들은 금관가야의 수로왕이 됐다는 얘기다.

상아덤의 바위 무더기 앞에 놓아둔 나무덱에 올라서면 옛사람들이 왜 그곳을 고대 국가의 시작으로 
삼았는지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다. 상아덤에서는 만물상의 모든 것을 다 내려다볼 수 있다. 
칼날처럼 날이 선 바위도, 뾰족한 창끝이나 톱니 같은 바위도, 부드럽게 둥글어진 바위도 모두 발밑이다. 
사방이 벼랑인 암봉 어디쯤을 지나서 여기까지 왔을 텐데 지나온 길을 도무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지금은 아찔하게 현기증 나는 바위와 바위 사이에다가 계단과 사다리를 놓아두어 오를 수 있지만, 
그 전까지는 이곳에 발을 디디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으리라. 그러므로 상아덤의 공간은 오랫동안 
신의 영역이었을 것이고, 상아덤에서 보는 경관 역시 신들의 시선이었을 것이었다. 겨울 산의 능선을 
지나는 칼바람의 정점에 서서 그 풍경을 본다. 


가야산 국립공원에는 해인사 뒤의 가야산과 해인사 앞쪽의 남산제일봉이 함께 속해 있다. 
가야산을 오르는 탐방코스는 세 개. 
해인사 쪽에서 오르는 코스가 하나 있고, 반대편 백운동에서 오르는 코스가 두 개 있다. 

백운동에서 오르는 코스는 
암봉능선을 타고 넘는 만물상 코스와 계곡 사이로 이어진 용기골 코스 두 가지다. 
8분 능선인 서성재에서 합류한다. 
서성재까지는, 만물상 코스를 택하면 2시간 30분 정도가 걸리지만 용기골 코스로 오르면 
1시간 30분이면 된다. 서성재에서 정상 칠불봉까지는 1시간 남짓 소요된다. 
해인사 쪽에서 상왕봉을 거쳐 칠불봉까지는 2시간 50분 정도 걸린다. 
제자리로 돌아오는 원점회귀의 산행이라면 만물상을 거쳐 정상에 올랐다가 용기골 쪽으로 
내려오는 코스를 택하는 것을 추천한다. 만물상을 오르는 게 힘이 들긴 하지만, 
내린 눈이 쌓여 있는 암릉구간은 하산길보다는 등산길로 잡는 게 낫기 때문이다. 

만물상 코스와 용기골 코스의 출발지점인 백운동에는 가야호텔(054-931-3500)이 있다. 
다양한 종류의 객실을 갖추고 있다. 부대시설로 대중탕도 운영하고 있다. 
가야호텔은 성주에 있지만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고령 시외버스터미널에 
내려 찾아가는 편이 더 빠르다. 고령 시외버스터미널에서 호텔까지는 택시로 30분 거리다. 

성주에서는 이렇다 할 맛집을 찾기 어렵다. 
청국장을 내는 성주읍의 ‘왜관식당’(054-932-9554)이 제법 이름난 곳. 
성주 시외버스터미널 옆의 감골식당(054-931-3100)의 정식도 괜찮다. 

이웃 고령에는 시원한 복국을 끓여 내놓는 ‘월산복어’(054-956-8600)가 있다. 
해물찜도 좋고, 복국 솜씨도 괜찮은 편이다.


성주·합천= 글·사진 박경일기자 (문화닷컴)
게재 일자 : 2017년 12월 13일 수요일


재구성:
찬란한 빛/김영희


찬란한빛e 18-02-17 10:19
 
새봄이 기다려지는 겨울 막바지를 설 연휴와 함께 보냅니다.
연휴 3일째로 모레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게 되지요.
강남갔던 제비가 돌아오는 춘삼월이 코 앞으로 당도했고요.
그리고 여기저기에서 또 어김없이 피어나는 봄꽃들로
우리들 마음이 화사해 질테지요.
손에 손잡고 봄마중 준비도 하시면서 봄꿈 많이 꾸세요.
요즘은 몸조리중 방콕에서 이렇듯 인터넷여행을 즐기며 지냄도 좋군요.
건강에 유의 하시며 늘 행복하세요.
함동진 18-02-22 17:29
 
(국내사찰)  해인사  -경남 합천 가야산
 

해인사  -경남 합천 가야산


가야산 해인사海印寺 

  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10에 소재한  법보종찰法寶宗刹 해인사는 불보사찰佛寶寺刹 통도사, 승보사찰僧寶寺刹 송광사와 더불어 한국의 삼대 사찰로 꼽힌다. 해인사海印寺는 한국 화엄종의 근본 도량이자 우리 민족의 믿음의 총화인 팔만대장경을 모신 사찰로서 한국인의 정신적인 귀의처요, 이 땅을 비추는 지혜의 등불이 되어 왔다.
 해인사는 신라시대에 그 도도한 화엄종의 정신적인 기반을 확충하고 선양한다는 기치 아래, 이른 바 화엄십찰華嚴十刹의 하나로 세워진 가람이다.
 화엄종의 근본 경전인 화엄경은 4세기 무렵에 중앙아시아에서 성립된 대승 경전의 최고봉으로서, 그 본디 이름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며 동양문화의 정수라고 일컬어진다.  이 경전에 해인삼매海印三昧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해인사 이름은 바로 이 '해인삼매'에서 비롯되었다.
 해인삼매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한 없이 깊고 넓은 큰 바다에 비유하여, 거친 파도 곹 중생의 번뇌 망상이 비로소 멈출 때 우주의 갖가지 참된 모습이 그대로 물 속에(海)에 비치는(印) 경지를 말한다. 이렇게 여실如實한 세계가 바로 부처님의 깨달음의 모습이요 우리 중생의 본디 모습이니, 이것이 곧 해인삼매의 가르침이다.
이러한 정신을 바탕으로 하여 해인사는 해동 화엄종의 초조初祖 의상대사(義湘大師, 625~702)의 법손인 순응順應화상과 그 제자인 이정理貞화상이 신라 제40대 임금 애장왕 3년에, 곧, 서기 802년 10월16일에 왕과 왕후의 도움으로 지금의 대적광전에 자리에 창건하였다.
 이리하여 화엄종은 개화기를 맞던 신라시대를 거쳐, 해인사를 중심으로, 희랑希朗대사를 위시하여 균여均如, 의천義天과 같은 빼어난 학승들을 배출하기에 이르른다.
 해인사는 한국불교의 성지이며 또한 세계문화유산 및 국보 보물 등 70여 점의 유물이 산재해 있다. 국내 최대 사찰로서 명산인 가야산 자락에 위치하여, 가야산을 뒤로하고 매화산을 앞에 두고 있어 그 웅장한 모습과 주변 경관이 어우러져 경의로울 뿐 아니라  송림과 산사가 어울어져 연출하는 설경을 보는 이로 하여금 신비경에 젖게 한다.

 
▶ 해인사海印寺 창건

  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10에 소재한 해인사는 신라 의상대사의 법손인 순응(順應), 이정(利貞) 두 스님이 신라 제40대 애장왕 3년(802) 10월16일 왕과 왕후의 도움으로 창건 되었다.
 해인사에 관한 종합적인 문헌으로 「가야산 해인사고적(伽倻山海印寺古籍)」이 있는데, 이는 해인사의 연기(緣起), 실화(失火)와 중창의 역사, 대장경의 인경(印經)에 관한 여러 사적과 문헌들을 모아 고종 11년(1874)년에 판각한 것이다. 이「가야산해인사고적」에 수록된 문헌가운데 똑같은 이름의 「가야산해인사고적」(고려 태조 26년에 이루어진 것)과 신라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신라가야산해인사선안주원벽기(新羅伽倻山海印寺善安住院璧記)」의 두 기록은 해인사의 창건에 대하여 비교적 소상하게 전해주고 있다.
우선 최치원은「신라가야산해인사선안주원벽기」에서 해인사의 창건연기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전략) 조사(祖師)인 순응대덕은 신림(神琳) 석덕에게 법을 배우고, 대력(大曆) 초년(766, 신라 혜공왕 2년)에 중국에 건너갔다. 마른 나무에 의탁하여 몸을 잊고 고성이 거처하는 산을 찾아서 도를 얻었으며, 교학을 철저히 탐구하고 선(禪)의 세계에 깊이 들어갔다. 본국으로 돌아오게 되자 영광스럽게도 나라에서 선발함을 받았다. 곧 탄식하여 말하기를 "사람은 학문을 닦아야 되며 또한 세상은 재물을 간직함이 중하다. 이미 천지의 정기를 지녔고 또한 산천의 수려함을 얻었으나, 새도 나뭇가지를 가려서 앉는데 나는 어찌 터를 닦지 아니하랴"하고 정원(貞元) 18년(802) 10월 16일 동지들을 데리고 이곳에 절을 세웠다. 산신령도 묘덕(妙德)의 이름을 듣고 청량한 형세의 땅을 자리잡아 주었으며 오계를 나누어 꾸며서 일모(一毛)를 다투어 뽑았다.
  이때에 성목왕태후(聖穆王太后)께서 천하에 국모(國母)로 군림하시면서 불교도들을 아들처럼 육성하시다가 이 소문을 듣고 공경하며 기뻐하시어 날짜를 정하여 귀의하시고 좋은 음식과 예물을 내리셨다. 이것은 하늘에서 도움을 받은 것이지만 사실은 땅에 의하여 인연을 얻은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이 안개처럼 돌문으로 모여들 때 스님은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다. 그리하여 이정 선백(利貞禪伯)이 뒤를 이어 공적을 세웠다. 중용의 도리를 행하여 절을 잘 다스렸고 주역 대장(大壯)의 방침을 취하여 건축을 새롭게 하였다. 구름처럼 솟아오르는 듯, 노을이 퍼지는 듯, 날마다 새롭고 달마다 좋았다. 그리하여 가야산의 좋은 경치는 도를 성취하여 터전에 알맞게 되었으며, 해인의 귀한 보물은 지대한 가치를 가지게 되었다. (하략)
 이 기록에 의하면 순응은 신림의 제자였는데 766년, 당나라로 구법의 길을 떠났다가 돌아온 뒤 신라 애장왕 3년(802)에 가야산에 해인사를 창건하기 시작했다. 이 소식을 들은 성목왕태후가 불사(佛事)를 크게 도왔는데 갑자기 순응이 입적하게 되자 그의 뒤를 이어 이정이 이 절을 크게 완성하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한편 최치원의 이 「가야산해인사선안주원벽기」보다 43년 뒤인 천복(天福) 8년(943, 고려태조 26년)에 지어진 「가야산해인사고적」에는 해인사의 창건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사람의 잘되고 못 됨은 곳에 달려 있고, 땅의 성하고 쇠함은 시절에 관계되는 것이다. 가야산(일명 牛頭山) 해인사는 해동의 명찰이다. 옛날 양나라 때, 보지공이 임종할 때에  「답산기」를 제자들에게 주면서 유언하기를  "내가 죽은 뒤에 고려의 두 스님이 와서 법을 구할 것이니 그때 그들에게 이 「답산기」를 전해주라"고 하였다. 그 뒤에 과연 신라의 순응, 이정 두 스님이 중국에 가서 법을 구하였는데, 보지공의 제자가「답산기」를 내어 주면서 공이 임종할 때 하던 말을 전하였다. 두 스님이 그 말을 듣고 공의 묘소에 찾아가서 "사람은 고금이 있거니와 법에야 어찌 앞뒤가 있겠습니까?" 하면서 밤낮 이레동안을 선정에 들어 법을 청하였다. 어느날 묘문이 저절로 열리면서 공이 나와서 법을 말씀하고 의발과 신발을 전해 주면서 말하기를 "너희 나라 우두산 서쪽에 불법이 크게 일어날 곳이 있으니, 너희들은 본국에 돌아가 별비보대가람 해인사를 세우라."하고는 다시 묘문 안으로 들어갔다.
 두 스님이 신라로 돌아와 우두산 동북쪽으로 고개를 넘고 다시 서쪽으로 내려가다가 사냥꾼들을 만나 "그대들이 이 산을 두루 다녀 잘 알 것이니, 어디 절을 지을 만한 곳이 없던가?"하고 물었다. 사냥꾼들은 "여기에서 조금 내려가면 물 고인 데(지금의 바로 대적광전자리)가 있고 또 거기에는 철와(지금은 비로전 지붕에 있음)가 많으니 거기에 가서 보시오"하고 대답하였다. 두 스님은 물 고인 곳에 이르러 보니 마음에 흡족하였다. 풀을 깔고 앉아 선정에 들었는데, 이마에서 광명이 나와 붉은 기운이 하늘에 뻗쳤다.
 그때 마침 신라 제 39대왕(40대의 잘못임) 애장왕의 왕후가 등창병이 났는데, 어떠한 약을 써도 효력이 없으므로 임금이 신하들을 여러 곳에 보내어 고승 석덕의 구호를 찾고 있었다. 사신이 지나가다가 하늘에 치솟는 붉은 기운을 바라보고, 이상한 사람이 있는가 여겨, 산 아래에 이르러 숲을 헤치면서 수십리나 들어갔으나 시내가 깊고 골짝이 좁아 더 나아갈 수가 없었다. 한참 망설이고 있었는데, 때마침 여우가 바위 위로 지나가는 것을 보고 신기하게 여겨 따라가다가 두 스님이 선정에 들어 방광하는 것을 보았다. 공경하여 예배하고 왕궁으로 함께 가기를 청하였으나 두 스님은 허락하지 아니 하였다. "이 실 한끝은 궁전 앞에 있는 배나무에 매고, 다른 한 끝을 아픈 곳에 대면 병이 곧 나으리라"고 하였다.
 사신이 돌아가 임금에게 여쭈었더니 그대로 시행하였다. 과연 배나무는 말라 죽고 병은 나았다. 임금이 감격하여 나라 사람들을 시켜 이 절을 짓게 하였으니, 때는 애장왕 3년(802) 임오(壬午), 당(唐)의 정원(貞元) 18년이다. 임금이 친히 이 절에 와서 전답 2천 5백결을 시납하고 경찬하였다.(하략)
  이 「가야산해인사고적」은 누구에 의해 지어진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끝의 '천복팔년계묘시월의판성적'이란 간기에 의해 이 글이 고려 태조 26년에 이루어졌다는 것만 알 수가 있을 뿐이다.
 어떻든 이 「가야산해인사고적」과 앞에 인용한 최치원의 「신라가야산해인사서안주원벽기」의 두 기록을 통하여 해인사의 창건과 그에 얽힌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가 있을 것이다.
 첫째, 서두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해인사는 신라 제40대 애장왕 3년(802) 10월 순응, 이정 두 스님에 의해 창건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거의 모든 기록과 일치하는 것이다.
 둘째, 순응은 신림의 제자였다. 그런데 신림은 의상의 제자였으므로 결국 순응은 의상의 손제자가 되는 셈이다. 이런 점에서 「삼국유사에서」말하는 이른 바 화엄십찰의 하나로 해인사가 포함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하겠다.
 셋째, 순응은 당나라에 유학을 다녀왔던 스님이었다. 그가 중국으로 건너갔던 때는 대력 초년으로 766년의 일이었다. 그러나 순응과 이정 두 스님이 보지공의 제자로부터 「답산기」를 전해 받고 또 이미 250여 년 전에 죽은 보지공으로부터 우두산에 별비보대가람 해인사를 창건하라는 부촉을 받았다고 하는 「가야산해인사고적」의 기록은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아무래도 이것은 해인사의 창건을 신비화시키고자 한 후세인들 심리적 표현의 결과라고 하겠다.
 넷째, 해인사의 창건에는 신라 왕실의 각별한 도움과 후원이 있었던 것을 알 수가 있다. 이에 대하여 「해인사선안주원벽기」에서는 성목왕 태후의 귀의와 대시주를 말하고 있고, 「해인사고적」에서는 애장왕비의 난치병 치유가 인연이 되어 애장왕이 크게 도움을 주었다고 하여 양자 사이에 차이가 있기는 하나, 왕실의 도움이라고 하는 점에서는 일치하는 것이다. 애장왕은 서기 800년에 13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숙부인 언승이 섭정을 하였다. 그리고 왕 3년에 아찬 김주벽의 딸을 후궁으로 맞아들였고 6월 정월에 비 박씨를 왕후로 했다고 하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있으므로 왕 3년에 왕후의 병을 고쳐 주었다는 「해인사고적」의 기록은 납득이 가지 않는다. 그러므로 불심이 강했던 애장왕의 할머니인 성목왕 태후가 해인사 창건의 대시주였다는 최치원의 기록을 따르는 것이 순리일 것으로 생각된다.


▶ 해인사海印寺창사정신

 해인사 창건의 참뜻은 해인이라는 낱말에 응집되어 있다.
해인이라는 말은 화엄경의 해인삼매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인삼매는 일심법계의 세계를 가르키는 말이며 부처님 정각의 세계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곧 있는 그대로의 세계, 진실된 지혜의 눈으로 바라본 세계, 객관적인 사상의 세계이니 바로 영원한 진리의 세계이다. 해인삼매는 또한 오염됨이 없는 청정무구한 우리의 본디 마음을 나타내는 말이며, 우리의 마음이 명경지수의 경지에 이르러 맑고 투명해서 있는 그대로의 세계가 그대로 비치는 세계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러한 모습을, 한 없이 깊고 넓으며 아무런 걸림 없는 바다에 비유되어 거친 파도 곧, 우리들 마음의 번뇌망상이 비로소 멈출때 우주의 갖가지 참된 모습이 그대로 물속에 비치는 경지를 해인삼매라 하였다. 이러한 여실한 세계가 바로 부처님의 깨달음의 모습이요, 중생의 본 모습이니 이것이 곧 해인삼매의 가르침인 것이다. 청정도량 해인사, 이곳은 우리들 마음의 고향이다. 그래서 황량한 대지를 방황하는 현대의 이방인들을 다정한 고향의 손짓으로 부르고 있다. 팔만대장경, 높은 탑, 자연의 그윽함이 있다고 그런 것이 아니다. 해인삼매의 한 생각, 맑은 마음 그 거룩한 도량이 바로 해인사이기 때문이다.


▶ 해인사海印寺중창기

  창건 이후 해인사의 중창에 관한 기록은 최치원이 쓴 「신라 가야산 해인사 결계장기(結界場記)」에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해인사는 창건 당시 터가 험하고 규모가 작았는데 약 100년이 지난 효공왕 1년(897) 가을 다시 중창할 것을 합의하고 90일 동안 참선한 뒤에 3겹의 집을 세우고 4급의 누(樓)를 올려서 사역을 확정하였다고 한다. 또한 해인사 중수에 관한 기록은 창건으로부터 130여년이 지난 고려 건국 초기의 『균여전』에 보인다. 이곳 기록에 의하면 해인사의 희랑(希朗)대사는 신라말 왕건을 도와 견훤을 물리치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에 대한 대가로 경중봉사(敬重奉事)하여 전지(田地) 500결(結)을 시사(施事)하고 옛 사우(寺宇)를 중신(重新)하였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고려 태조 때 해인사는 창건 이후 희랑대사에 의해 확장되고 새로워진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하였다. 그 때가 바로 930년 경이였다.  그 후 고려시대에 들어와 해인사는 균여(均如)대사, 대각(大覺)국사 등 많은 고승대덕을 배출하였다. 그러나 사우(寺宇)의 중수에 관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실록을 보관한 일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태조 2년(1393)에 정중탑을 중영(重營)하고 해인사는 여러 차례 중수를 한다. 이는 조선 왕실이 해인사에 힘을 기울인 결과라 생각된다. 특히 태조 때 고려대장경판이 해인사에 봉안 되었다. 태조실록 7년(1398)에는 강화에 보관되어 있던 대장경을 서울의 지천사(支天寺)로 옮겼다는 기록이 나오고 정종실록 원년(1399)에는 해인사에 대장경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태조 때 장경판이 해인사로 이운(移運)되고 이때부터 법보종찰로 유명하게 되었다. 또한 기록에 의하면 세조 3년(1458)에 임금이 죽헌(竹軒)에게 명하여 대장경 50벌을 인경(印經)하고 신미(信眉), 학조(學祖) 두 스님에게 장경판전을 시찰하게 하고 그 결과 보고에 따라 판고가 비좁고 허술하므로 경상감사에게 명하여 판전 40칸을 다시 짓게 하였다고 한다. 그 후 세조가 1468년 승하하자 정희(貞熹)왕후는 해인사를 중건하기 위한 원력을 세우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1483년 세상을 떠난다. 해인사가 현재의 규모로 확장된 시기는 대체로 성종 12년(1481)에서 21년(1490) 사이라고 본다. 성종 19년(1488) 덕종의 비 인수(仁粹)왕비와 예종의 계비 인혜(仁惠)왕비가 선왕의 뜻을 받들어 도목수 박중석(朴仲石) 등을 보내어 학조(學祖)대사로 하여금 판전 30칸을 짓게 하고 보안당이라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1490년까지 많은 전각과 요사 등 160여칸을 완성하여 사찰의 면모를 일신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들은 성종 22년(1491) 조위(曺偉)가 쓴 『해인사 중수기』에 기록되어 있다.
 그 후 해인사는 임진왜란 때도 전화(戰禍)를 면했으나 그 후 여러 차례 화재를 입었다. 그 내용을 보면 아래와 같다.
 * 숙종 21년(1695) : 동쪽의 많은 요사와 만월당, 원음루 화재.
 * 숙종 22년(1696) : 서쪽의 여러 요사와 무설전 화재.
 * 영조 19년(1743) : 대적광전 아래 수백칸 당우 화재.
 * 영조 39년(1763) : 화재
 * 정조  4년(1780) : 무설전 화재.
 * 순조 17년(1817) : 수백칸 당우 화재.
 * 고종  8년(1871) : 법성요 화재.

 이와 같이 1695년 이후 1871년까지 해인사에는 일곱 번의 큰 화재가 있었으나 판전 건물은 피해가 없었다. 해인사에서 비교적 오랜 건물은 대적광전, 응진전, 퇴설당, 구광루, 해탈문 등이며 대장경판전 외에는 모두 순조 17년(1817) 직후의 건물이고 나머지 건물은 훨씬 후의 건물들이다.

 
▶ 해인사선원

  강원, 선원, 율원을 두루 갖춘 총림이지만 한국 불교의 주류가 선(禪)인 만큼 해인사의 중심은 선원(禪院)이다.그래서인지 해인사 선원은 오랫동안 사찰 중심부에 위치한 퇴설당, 선열당, 사전을 사용했다.현재 해인사 선원은 사찰 동쪽 숲속의 소림원에 들어있다.이 건물은 원래 고려대장경을 보관하기 위해 만들었지만 1984년부터 선원으로 이용되고 있다.단일 건물 선방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소림원에는 안거철이면 40~50명의 선승들이 모여들어 하루 14시간씩 참선에 정진한다. 해인사는 소림원 뿐 아니라 산 전체가 선방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산내 암자인 삼선암, 약수암, 보현암의 비구니 선원에서는 100여 명의 스님들이 참선을 한다.또 용탑선원과 원당암에는 재가불자를 위한 선원이 자리잡고 있다.
해인사 선원의 가장 큰 특징은 총림의 대중이 하나로 움직이며 부처님 가르침대로 수행을 한다는 점.예불과 공양을 단체로 하는 것은 물론 보름마다 한 자리에 모여 계율을 되새기는 포살을 하고 방장의 법문을 듣는다.해인사 선원장 원융스님은 “중다운 중 노릇을 위해서는 대중 생활이 필요하고 이를 가장 제대로 실천하고 있는 것이 해인사”라고 말했다.해인사 선원 역시 시발은 한국 근대 선불교의 중흥조 경허스님으로부터 비롯됐다.
1899년 봄 해인사의 조실로 추대된 경허 스님은 그 해 겨울 퇴설당에서 17명 스님들의 참선을 이끌었고 이를 위한‘결사문’도 만들었다.경허 스님이 1904년 북방으로 떠난 후 해인사 선원은 용성, 경봉, 동산스님이 차례로 이끌었다.
해방 후 해인사는 1946년 효봉스님이 조실로 추대되면서 100명이 넘는 스님들이 모여들어 일제시대를 거치며 피폐해진 불교를 중흥시키는 터전으로 자리잡는다.그러나 갑자기 일어난 6 · 25와 오랫동안 계속된 비구,대처분규 때문에 제 역할을 할 수 없었다.해인사가 다시 한번 한국 불교의 중심으로 부상하는 것은 1967년 조계종에서 처음으로 방장(方丈) 체제의 총림이 설치되면서이다.
해인총림에는 초대 방장 성철스님을 위시하여 청담, 자운, 일타, 지관스님 등 기라성같은 인물들이 포진했다.해인총림은 성철 스님에 이어 고암,혜암스님등 역대 방장들이 조계종 종정을 역임하며 종단 전체에 큰 영향을 미쳤다.
 

▶ 율원

  ▷ 연혁
 1968년 성우·청엽·철오·통광·혜엽 스님 등이 총림에 율원 개설을 발의하며 1970년까지 율장을 열람하였고, 불기2521(1977)년 4월 15일에 선원 유나 도견 화상과 강원 강주 보광 화상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퇴옹성철 방장 대화상의 재가를 받고 홍봉주 주지와 대중의 협력하에 동곡일타 대율사를 율주로 하여 한국불교 최초로 총림 내에 율원이 개설되었으니, 이로써 선교율이 병행하는 여법한 총림의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이후 1978년 2월 제1회 졸업생 8명을 배출한 이래 지금까지 많은 율사를 배출하며 한국불교의 청정가풍을 지켜오고 있다.


  ▷ 율원요람
 
  * 율원의 정의
종단 기본 교육 과정을 이수한 비구로 하여금 율장을 전문적으로 연구케하며, 청정 지계의 가풍을 확립하고자 하는 전문교육기관이다.
  * 설립 목적
본종 승려로 하여금 불조의 유훈을 엄준히 계승하여 철저한 수행에 전력을 다하게 함으로써 지덕을 겸비한 출가중을 양성 · 종풍을 진작하고 중생교화에 기여하고자 함을 목적으로 한다.
  * 설립 목표
    1. 대소율장의 전문적연구  2. 습의와 예참의 올바른 전승  3. 율학을 전승할 율사의 양성
  * 율원 원훈
    1. 신심견고          2. 지율청정        3. 원력광대
  * 이수과정
1999년 8월 31일에 종단에 2년 과정의 전문교육기관으로 등록 인가를 받아서, 첫해는 『사분율장』을 중심으로 광율을 비교하고, 『청정도론』을 중심으로 교학체계를 정리하며, 『불교문화사』로 율장의 이해의 폭을 넓히도록 하고, 둘째 해에는 『범망경』을 중심으로 대승율을 익히고, 『선원청규』를 중심으로 청규를 정리하며, 동안거를 선원에서 정진하고 졸업한다.

 
  ▷ 승가대학
    * 교훈
      신심信心  원력願力  수신修身
    * 교육목표
      속불혜명續佛慧命하여 전법도생傳法度生하는 근본이념根本理念 아래 출가수행자出家修行者로 하여금 전미개오轉迷開悟하고 보살도菩薩道를 실천實踐하여 불국토佛國土의 실현實現에 이바지할 인재人材를 양성養成함에 있다.
        * 해인사 홈페이지


▶ 해인사대장경판(海印寺大藏經板)

  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10에 소재한 해인사대장경(海印寺大藏經板국보32호1962.12.20.지정)은 경(經)·율(律)·논(論)의 삼장(三藏)을 말하며, 불교경전의 총서를 가리킨다. 이 대장경은 고려 고종 24∼35년(1237∼1248)에 걸쳐 간행되었다. 이것은 고려시대에 간행되었다고 해서 고려대장경이라고도 하고, 판수가 8만여 개에 달하고 8만 4천 번뇌에 해당하는 8만 4천 법문을 실었다고 하여 8만대장경이라고도 부른다.
 이것을 만들게 된 동기는 현종 때 의천이 만든 초조대장경이 몽고의 침략으로 불타 없어지자 다시 대장경을 만들었으며, 그래서 재조대장경이라고도 한다. 몽고군의 침입을 불교의 힘으로 막아보고자 하는 뜻으로 국가적인 차원에서 대장도감이라는 임시기구를 설치하여 새긴 것이다. 새긴 곳은 경상남도 남해에 설치한 분사대장도감에서 담당하였다.
 원래 강화도 성 서문 밖의 대장경판당에 보관되었던 것을 선원사를 거쳐 태조 7년(1398) 5월에 해인사로 옮겨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 현재 해인사 법보전과 수다라장에 보관되어 있는데 일제시대에 조사한 숫자를 보면 81,258장이지만 여기에는 조선시대에 다시 새긴 것도 포함되어 있다. 경판의 크기는 가로 70㎝, 세로 24㎝내외이고 두께는 2.6㎝ 내지 4㎝이다. 무게는 3㎏ 내지 4㎏이다.
 구성을 보면 모두 1,496종 6,568권으로 되어있다. 이 대장경의 특징은 사업을 주관하던 개태사승통인 수기대사가 북송관판, 거란본, 초조대장경을 참고하여 내용의 오류를 바로잡아 대장경을 제작하였다고 한다.
 이 대장경판은 현재 없어진 송나라 북송관판이나 거란의 대장경의 내용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것이며, 수천만 개의 글자 하나 하나가 오자·탈자없이 모두 고르고 정밀하다는 점에서 그 보존가치가 매우 크며, 현존 대장경 중에서도 가장 오랜 역사와 내용의 완벽함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지니고 있는 문화재이다.
 

▶ 해인사장경판전(海印寺藏經板殿국보52호1962.12.20.지정)

 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10의 가야산 중턱에 자리잡은 해인사는 통일신라 애장왕 3년(802)에 지은 사찰로, 왕후의 병을 부처의 힘으로 치료해 준 것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지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3대 사찰 중 하나이며, 8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기 때문에 법보사찰이라고도 부른다.
 해인사장경판전(海印寺藏經板殿국보52호1962.12.20.지정)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8만여장의 대장경판을 보관하고 있는 건물로, 해인사에 남아있는 건물 중 가장 오래 되었다. 처음 지은 연대는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조선 세조 3년(1457)에 크게 다시 지었고 성종 19년(1488)에 학조대사가 왕실의 후원으로 다시 지어 ‘보안당’이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산 속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어 임진왜란에도 피해를 입지 않아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며, 광해군 14년(1622)과 인조 2년(1624)에 수리가 있었다.
 앞면 15칸·옆면 2칸 크기의 두 건물을 나란히 배치하였는데, 남쪽 건물은 ‘수다라장’이라 하고 북쪽의 건물은 ‘법보전’이라 한다. 서쪽과 동쪽에는 앞면 2칸·옆면 1칸 규모의 작은 서고가 있어서, 전체적으로는 긴 네모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대장경판을 보관하는 건물의 기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장식 요소는 두지 않았으며, 통풍을 위하여 창의 크기를 남쪽과 북쪽을 서로 다르게 하고 각 칸마다 창을 내었다. 또한 안쪽 흙바닥 속에 숯과 횟가루,소금을 모래와 함께 차례로 넣음으로써 습도를 조절하도록 하였다.
 자연의 조건을 이용하여 설계한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점 등으로 인해 대장경판을 지금까지 잘 보존할 수 있었다고 평가 받고 있다. 장경판전은 15세기 건축물로서 세계 유일의 대장경판 보관용 건물이며, 1995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해인사장경판전(海印寺藏經板殿국보52호)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10의 해인사 장경판전은 13세기에 만들어진 세계적 문화 유산인 고려 대장경판 8만여장을 보존하는 보고로서 해인사의 현존 건물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장경판전은 정면 15칸이나 되는 큰 규모의 두 건물을 남북으로 나란히 배치하였다. 장경판전 남쪽의 건물을 수다라장, 북쪽의 건물을 법보전이라 하며 동쪽과 서쪽에 작은 규모의 동·서사간판전이 있다
 건물을 간결한 방식으로 처리하여 판전으로서 필요로 하는 기능만을 충족시켰을뿐 장식적 의장을 하지 않았으며, 전·후면 창호의 위치와 크기가 서로 다르다. 통풍의 원활, 방습의 효과, 실내 적정 온도의 유지, 판가의 진열 장치 등이 매우 과학적이며, 합리적으로 되어 있는 점은 대장경판이 지금까지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라고 평가받고 있다.
  장경판전의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조선 세조 3년(1457) 어명으로 판전 40여 칸을 중창하였고 성종 19년(1488) 학조대사가 왕실의 후원으로 30칸의 대장경 경각을 중건한 뒤 보안당이라 했다는 기록이 있다. 광해군 14년(1622)에 수다라장, 인조 2년(1624)에는 법보전을 중수하였다. 장경판전은 가야산 중턱의 해인사에 위치한 관계로 서기 1488년 조선 초기에 건립된 후 한번도 화재나 전란 등의 피해를 입지 않았으며, 보존 가치가 탁월한 팔만대장경이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는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장경판전은 세계유일의 대장경판 보관용 건물이며, 해인사의 건축기법은 조선 초기의 전통적인 목조건축 양식을 보이는데 건물 자체의 아름다움은 물론, 건물내 적당한 환기와 온도·습도조절 등의 기능을 자연적으로 해결할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이 판전에는 81,258장의 대장경판이 보관되어 있으며, 글자 수는 무려 5천2백만자로 추정되는데 이들 글자 하나 하나가 오자·탈자없이 모두 고르고 정밀하다는 점에서 그 보존가치가 매우 크며, 현존 대장경 중에서도 가장 오랜 역사와 내용의 완벽함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지니고 있는 문화재이다.
 대장경판은 고려 고종때 대장도감에서 새긴 목판이다. 대장경은 경(經)·율(律)·논(論)의 삼장(三藏)으로서 불교경전의 총서를 가리키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해인사 대장경판은 고려시대에 판각되었기 때문에 고려대장경이라 하며 또한 판수가 8만여 판에 이르고 8만4천 법문을 수록했다 하여 8만대장경이라고도 한다.
 고려 현종(1009~1031, 재위) 때 새긴 초조대장경은 몽고의 침입에 불타버려 다시 새겼다하여 재조대장경이라 일컫기도 한다. 이 대장경판은 초조대장경이 불타버리자 고려 고종 19년(1232)에 몽고의 침입을 불력으로 막기위하여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고 국가적인 차원에서 대장도감을 설치하여 대장경판을 다시 조각하기 시작하였다.
 대장경판은 당초 경상남도 남해에서 판각하여 강화도 대장경판당으로 옮기고 보관하였으나 고려말 왜구의 빈번한 침범으로 조선 태조 때인 1398년 현재의 해인사 장경판전에 옮겨 보관 중이다. 이 대장경판은 개태사의 승통인 수기(守其)가 북송관판과 거란본 및 우리의 초조대장경을 대조하여 오류를 바로잡은 대장경이다.
 이규보가 지은 <대장각판군신기고문>에 보면 현종 2년(1011)에 거란병의 침입때 대장경을 새겨 거란병이 물러갔음을 상고하고, 몽고의 침입으로 이 대장경판이 불타버려 다시 새기니 몽고의 침입을 불력으로 물리치게 하여 달라는 염원을 기록하고 있다. 대장경판은 고종 24년(1237)부터 35년(1248)까지 12년 동안 판각하였는데 준비기간을 합치면 모두 16년이란 기간이 걸려 완성 된 것이다.
 해인사 동·서사간판전에 봉안되어 있는 불교 경전은 국가에서 새긴 고려대장 경판과는 달리, 고려시대에 사찰에서 새긴 고려각판이다. 팔만대장경은 불교의 경·율·논 삼장을 집대성하였기에 세계불교연구의 귀중한 문헌으로, 이 대장경은 일본이 신수대장경을 만들때 표준으로 삼았으며, 중국에도 역수입되고, 영국·미국·프랑스·독일 등 서구 선진국에도 전해져 세계불교 연구에 매우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있다.
 해인사 장경판전은 국보 제52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소장 문화재로서는 대장경판 81,258판(국보 제32호), 고려각판 2,725판(국보 제206호), 고려각판 110판(보물 제734호)이 있으며, 1995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 해인사고려각판(海印寺高麗刻板국보206호1982.05.22.지정)

  ▷ 부속문화재 
  묘법연화경 (국보 206-1)
  화엄경관자재보살소설법문별행소 (국보 206-2)
  대불정여래밀인수증료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 (국보 206-3)
  대방광불화엄경세주묘엄품 (국보 206-4)
  금강반야바라밀경 (국보 206-5)
  금강반야바라밀경 (국보 206-6)
  화엄경보현행원품 (국보 206-7)
  법화경보문품 (국보 206-8)
  인천보감 (국보 206-9)
  불설예수십왕생칠경 (국보 206-10)
  삼십팔분공덕소경 (국보 206-11)
  불설아미타경 (국보 206-12)
  대방광불화엄경략신중 (국보 206-13)
  화엄경변상도<주본> (국보 206-14)
  대방광불화엄경<정원본> (국보 206-15)
  대방광불화엄경<진본> (국보 206-16)
  대방광불화엄경<주본> (국보 206-17)
  대방광불화엄경소 (국보 206-18)
  대방광불화엄경수소연의초 (국보 206-19)
  금강반야바라밀경 (국보 206-20)
  불설장수멸죄호저동자다라니경 (국보 206-21)
  대각국사문집 (국보 206-22)
  대각국사외집 (국보 206-23)
  남양선생시집 (국보 206-24)
  백화도장발원문약해 (국보 206-25)
  당현시범 (국보 206-26)
  약제경론염불법문왕생정토집 (국보 206-27)
  십문화쟁론 (국보 206-28)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10의 해인사에 소장되어 있는 해인사고려각판(海印寺高麗刻板국보206호1982.05.22.지정) 등은 고려시대의 불교경전, 고승의 저술, 시문집 등이 새겨진 목판이다. 이 목판은 국가기관인 대장도감(大藏都監)에서 새긴 해인사대장경판(국보 제32호)과는 달리, 지방관청이나 절에서 새긴 것이다. 현재 해인사 대장경판전 사이에 있는 동·서 사간판전(寺刊板殿)에 보관하고 있다.
 후박나무를 짠물에 담가 지방기를 빼고 나무결을 삭혀 잘 말린 다음 판각하였기 때문에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되었다. 이 목판에는 『금강경』, 『화엄경』 등의 대승경전과 신라·고려·중국의 고승이나 개인의 시문집 및 저술들이 있는데, 경전류는 대부분 간행기록이 있어 고려시대 불교경전의 유통 등 불교신앙의 경향을 알 수 있다. 고승이나 개인의 시문집 및 저술 등은 비록 간행기록이 없고 전권을 갖추지 못한 것이 많으나, 그 내용이 전하지 않거나 역사적으로 희귀한 자료들이다.
 고려시대 판화 및 판각기술은 물론이고, 한국 불교사상 및 문화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 해인사고려각판(海印寺高麗刻板)

  ▷ 부속문화재 
  금광명경 (보물 734-1)
  불설보문경 (보물 734-2)
  불설예수십왕생7경<Ⅰ> (보물 734-3)
  불설예수십왕생7경<Ⅱ> (보물 734-4)
  대방광불화엄경정행품 (보물 734-5)
  불설범석사천왕다라니경 (보물 734-6)
  대반야경과 (보물 734-7)
  불설천존각온황신주경<대> (보물 734-8)
  불설천존각온황신주경<소> (보물 734-9)
  불정심관세음보살대다라니경 (보물 734-10)
  불설십이마가반야바라밀다경 (보물 734-11)
  보살상 (보물 734-12)
  화엄경변상도<진본> (보물 734-13)
  불설상천왕천제석청명장생경 (보물 734-14)
  보살계본지범종요 (보물 734-15)
  대방광불화엄경관음지지품 (보물 734-16)
  지자대사권수서방정업의병발원문 (보물 734-17)
  기신론필삭기 (보물 734-18)
  대방광불화엄경여래현품 (보물 734-19)
  역대연표 (보물 734-20)
  화엄소 (보물 734-21)
  화엄경수소연의초 (보물 734-22)
  기신론초 (보물 734-23)
  기신효소 (보물 734-24)
  기신론과 (보물 734-25)
  화엄신중 (보물 734-26)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10에 위치한 해인사에서 보관하고 있는 고려시대의 불교경전과 유명한 승려들의 저술, 시문집 등이 새겨진 목판이다. 해인사에 있는 목판은 모두 54종 2,835판인데 이 중 28종 2,725판이 국보 제206호로 지정되어 있고, 26종 110판이 보물 제734호로 지정되어 있다.
 해인사고려각판(海印寺高麗刻板보물734호1982.05.22.지정)은 국가기관인 대장도감에서 새긴 해인사 대장경판과는 달리 사찰이나 지방관청에서 새긴 것이며, 현재 해인사 대장경판전 사이에 있는 동·서 사간판전(寺刊版殿)에 보관되어 있다.
 이 목판들은 금강경·화엄경 등의 대승불교 경전과 신라·고려·중국의 유명한 승려, 개인의 시문집 및 저술들이다. 이곳의 불교경전들에는 대부분 간행한 연대와 목적 등이 남아 있어서 고려시대 불교경전의 간행과 유통 등 불교신앙의 경향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고승 및 개인의 시문집과 저술 등에는 간행기록이 남아있지 않고 일부분이 훼손된 것들이 많다. 하지만 그 내용이 전하지 않거나 역사적으로 희귀한 자료들로서 당시의 불교사상과 문화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해인사 고려각판은 자체가 우리나라가 목판인쇄술의 실증적 자료이며 그 시대의 문화를 상징하는 예술품으로 주목된다.


▶ 대방광불화엄경<진본>(大方廣佛華嚴經<晋本>)

  대방광불화엄경<진본>(大方廣佛華嚴經<晋本>국보206-16호1982.05.22.지정) 목판은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12에 위치한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는 해인사고려각판 중의 하나로, 모두 728판으로 되어있다. 해인사고려판각은 불교경전 및 고승의 저술서, 시문집 등을 나무판에 새긴 것으로, 총 28종 2,725판이 전해 내려온다. 현재 해인사 대장경판전 사이에 있는 동·서 사간판전(寺刊版殿)에 보관되어 있다.
 대방광불화엄경은 줄여서 ‘화엄경’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을 기본사상으로 하고 있다. 화엄종의 근본경전으로 법화경과 함께 한국 불교사상 확립에 크게 영향을 끼친 불교경전 가운데 하나이다. 이 목판은 동진의 불타발타라(佛馱跋陀羅)가 번역한 『화엄경』 진본 60권의 내용을 새긴 것으로, 끝부분의 기록으로 보아 고려 숙종 3년(1098)에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후박나무를 짠물에 담가 기름기를 빼고 나무결을 삭혀 잘 말린 다음 새겼기에 나무의 뒤틀림 등이 없이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다.
 고려시대의 판화와 판각 기술 및 한국 불교사상과 문화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 대방광불화엄경<주본>(大方廣佛華嚴經<周本>)

  대방광불화엄경<주본>(大方廣佛華嚴經<周本>국보206-17호1982.05.22.지정)목판은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12에 위치한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는 해인사고려판각 중의 하나로, 모두 941판으로 되어있다. 해인사고려판각은 불교경전 및 고승의 저술서, 시문집 등을 나무판에 새긴 것으로, 총 28종 2,725판이 전해 내려온다. 현재 해인사 대장경판전 사이에 있는 동·서 사간판전(寺刊版殿)에 보관되어 있다.
 대방광불화엄경은 줄여서 ‘화엄경’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을 기본사상으로 하고 있다. 화엄종의 근본경전으로 법화경과 함께 한국 불교사상 확립에 크게 영향을 끼친 불교경전 가운데 하나이다. 이 목판은 당나라의 실차난타(實叉難陀)가 번역한 『화엄경』 주본 80권의 내용을 새긴 것이다.
 후박나무를 짠물에 담가 기름기를 빼고 나무결을 삭혀 잘 말린 다음 새겼기에 나무의 뒤틀림 등이 없이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다.
 고려시대의 판화와 판각 기술 및 한국 불교사상과 문화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 대방광불화엄경소(大方廣佛華嚴經疏)

  대방광불화엄경소(大方廣佛華嚴經疏국보206-18호1982.05.22.지정)목판은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12에 위치한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는 해인사고려판각 중의 하나로, 모두 57판으로 되어있다. 해인사고려판각은 불교경전 및 고승의 저술서, 시문집 등을 나무판에 새긴 것으로, 총 28종 2,725판이 전해 내려온다. 현재 해인사 대장경판전 사이에 있는 동·서 사간판전(寺刊版殿)에 보관되어 있다.
 대방광불화엄경은 줄여서 ‘화엄경’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을 기본사상으로 하고 있다. 화엄종의 근본경전으로 법화경과 함께 한국 불교사상 확립에 크게 영향을 끼친 불교경전 가운데 하나이다. 이 목판은 당나라의 실차난타(實叉難陀)가 번역한 『화엄경』 주본 80권에 대하여 송나라의 정원(淨源)이 해설을 단 것으로, 전체 120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목판의 양 끝과 판 사이에 베를 바른후 그 위에 옻칠을 하였고, 무늬를 넣은 함석판을 양쪽 위에 대어서 잇고 있어 매우 정성들여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후박나무를 짠물에 담가 기름기를 빼고 나무결을 삭혀 잘 말린 다음 새겼기에 나무의 뒤틀림 등이 없이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다.
 고려시대의 판화와 판각 기술 및 한국 불교사상과 문화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 당현시범(唐賢詩範)

  당현시범(唐賢詩範국보206-26호1982.05.22.지정)목판은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12에 위치한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는 해인사고려각판 중의 하나로, 모두 5판으로 되어있다. 해인사고려각판은 불교경전 및 고승의 저술서, 시문집 등을 나무판에 새긴 것으로, 총 28종 2,725판이 전해 내려온다. 현재 해인사 대장경판전 사이에 있는 동·서 사간판전(寺刊版殿)에 보관되어 있다.
 판의 서문에는 희녕 개원(고려 문종 22년, 1068)으로 되어 있고, 간행기록에는 병오(丙午)년에 판을 제작하였다고 되어 있으나 언제인지 확실하게 알 수 없다. 1판에 6장씩 새겨져 있는데, 전체적으로 마멸이 심하여 몇 장이 빠져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고려시대의 판화와 판각 기술 및 한국 불교사상과 문화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 해인사대적광전(海印寺大寂光殿)

 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10에 위치한 팔만대장경이 보관되어 있는 해인사는 통일신라 애장왕 3년(802)에 지어졌다. 중심 법당인 대적광전(海印寺大寂光殿시도유형문화재256호1985.11.14.지정)은 2층 건물로 비로전이라 불리다가, 조선 성종 19년(1488)에 다시 지으면서 대적광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 뒤 여러 차례의 화재가 있어 옛 모습을 찾아 볼 수 없고 지금의 건물은 순조 17년(1817)에 다시 지은 것을 1971년 대폭 수리한 것이다.
 앞면 5칸·옆면 4칸 규모로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내부에는 중앙의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지장보살과 보현보살을 모시고 있다.

 
▶ 해인사석조여래입상(海印寺石造如來立像)

  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산1-1에 위치한 해인사석조여래입상(海印寺石造如來立像보물264호1963.01.21.지정)인, 광배(光背)와 대좌(臺座)를 잃은 이 불상은 목이 절단되는 등 전체적인 손상이 심하지만 통일신라(統一新羅) 말기(末期)의 불상계통을 보여주고 있는 중요한 작품이다.
 육계(肉)가 낮은 소발(素髮)의 머리에 갸름한 얼굴로 코가 짧고 입이 작다. 머리에 비해 왜소한 불신(佛身)은 각진 좁은 어깨, 몸에 밀착된 두 팔, 허리 등의 몸의 굴곡이 표현되지 않은 네모진 신체는 마치 석주(石柱)와도 같다. 여기에 새겨진 넓은 띠주름식의 법의(法衣) V자로 흐르다가 허리부근에 U자형으로 바뀌어 두 다리에 물결무늬를 형성한 점 등은 당시 유행하던 통일신라말 석불상들에 나타나던 특징을 따른 예라 하겠다.
 이처럼 이 불상은 평판적이며 경직된 특징이 나타나기 시작한 신라말 내지 고려초(高麗初)의 석불상인 것이다.
 
 
▶ 해인사원당암다층석탑및석등(海印寺願堂庵多層石塔및石燈)

  해인사원당암다층석탑및석등(海印寺願堂庵多層石塔및石燈보물518호1970.06.24.지정)은 팔만대장경이 보관되어 있는, 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10에 위치한 호국신앙의 요람인 해인사의 원당암 안에 있는 다층(多層) 석탑이다. 탑신(塔身)을 점판암으로 만든 청석탑(靑石塔)으로, 점판암은 벼루를 만드는데 주로 사용되는 석재이다.
 땅과 맞닿아 탑의 토대가 되는 바닥돌은 화강암을 이용하여 3단으로 쌓았으며, 그 위에 탑신을 받치는 기단(基壇)과 지붕돌은 점판암으로 구성하였다. 기단은 1단으로 밑면에는 돌아가며 연꽃무늬를 장식하였고, 윗면은 네 모서리에 대리석 돌기둥을 세웠으며, 맨윗돌에는 연꽃무늬를 새겼다. 탑신의 몸돌은 남아있지 않고 지붕돌만 10층이 쌓여 있다. 지붕돌은 경사진 4면이 매우 평평하고 얇으며 밑면엔 낮은 3단의 받침이 새겨져 있고 처마는 네 귀퉁이에 이르러 위로 살짝 들려 올라갔다. 탑의 꼭대기에는 화강암으로 만든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이 낮게 있고, 그 위로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 모양의 장식)만이 높직하게 남아 있다.
 청석탑은 대체로 고려시대에 본격적으로 유행하게 되지만 이 석탑은 신라 말에 만들어져 청석탑의 선구라 할 수 있다.
 석등은 탑의 옆에 있으며, 탑과 거의 동일한 시대의 작품이다. 땅과 맞닿은 6각형의 바닥돌 위에 아래받침돌과 중간받침돌, 지붕돌로 이루어졌는데, 아래받침돌과 지붕돌이 점판암으로 되어 있고 다른 부재는 화강암이다. 현재는 지붕돌 밑의 불을 밝히던 부분인 화사석(火舍石)이 남아 있지 않다. 중간받침돌은 가늘고 긴 편으로 아래위에 상(上)·하(下)의 글자가 움푹하게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6각형으로 윗면은 편평하며, 머리장식은 원기둥 모양의 돌 하나가 얹혀있을 뿐이다.
 

▶ 해인사석등(海印寺石燈)

  해인사석등(海印寺石燈시도유형문화재255호1985.11.14.지정)은 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10에 위치한 해인사 대적광전 아래쪽의 3층 석탑 앞에 자리하고 있는 석등으로, 불교의식을 행할 때 불을 밝혀두는 기구이다.
 등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에 3단의 받침을 두었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었다. 높직한 4각 바닥돌은 한 면에 2개씩의 안상(眼象)을 새겼다. 그 위의 아래받침돌은 6㎝가량 층을 둔 다음 8잎의 연꽃무늬를 두었다. 가운데기둥은 후대에 와서 새로 만든 것으로 옛 모습을 찾을 수 없음이 안타깝다. 윗받침돌은 아래와 대칭되는 모습의 연꽃무늬를 새겼다. 8각 화사석은 4면에 4천왕상(四天王像)을 도드라지게 새기고, 나머지 4면에 창을 뚫었다. 지붕돌도 역시 8각으로, 경사면이 움푹하여 처마도 곡선처리 되었다. 꼭대기에는 몇개의 보주(寶珠:작은 공모양 장식)가 올려져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바닥돌을 제외한 각 부분이 8각을 이루고 있는 전형적인 양식으로,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이다.


▶ 해인사길상탑(海印寺吉祥塔보물1242호1996.05.29.지정)

  해인사길상탑(海印寺吉祥塔보물1242호1996.05.29.지정)은 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10에 위치한 해인사 절 입구의 일주문에서 남쪽으로 약 50m 지점에 서 있는 탑으로, 일반적인 절의 건물 배치와는 무관하게 길가에 세워져 있다. 2단의 기단(基壇) 위로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구조로,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석탑 양식을 갖추고 있다.
 바닥돌 위에 아래층 기단을 받고, 윗면에 얇은 괴임을 새긴 후 위층 기단을 얹었다. 위층 기단은 하나의 돌로 짜여져 다른 탑에서 보기 힘든 독특한 모습이다. 탑신은 1층의 몸돌이 2·3층의 몸돌보다 크며, 지붕돌 밑면의 받침수는 각 층 모두 5단이다. 지붕돌의 처마는 반듯하다가 네 귀퉁이에서 뚜렷하게 치켜올려져 전체적으로 경쾌한 느낌을 준다.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네모난 받침돌만 남고 모두 없어진 상태이며, 받침돌 윗면에 쇠꼬챙이를 꽂았던 구멍이 뚫려 있다.
 탑에서 나온 유물들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그 중 조그만 탑이 157개가 있으나, 소탑은 원래 99개, 77개를 두는 것이 원칙이므로 19개는 없어진 듯 하다. 탑에 대한 기록인 탑지(塔誌)는 4장인데, 통일신라 후기 대문장가인 최치원이 지은 것으로 유명하다. 이 글에는 신라 진성여왕 8년(895) 통일신라 후기의 혼란 속에 절의 보물을 지키려다 희생된 스님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서 탑을 건립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전체적으로 단아하면서도 소박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통일신라 후기의 대표적인 소탑(小塔)으로, 탑지의 기록은 당시의 사회경제적 상황을 밝히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 해인사삼층석탑<정중탑>(海印寺三層石塔<庭中塔>)

  해인사삼층석탑<정중탑>(海印寺三層石塔<庭中塔>시도유형문화재254호1985.11.14.지정)은 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10에 위치한 해인사의 대적광전 아래 서 있는 석탑으로, 넓은 뜰 한가운데에 자리잡고 있어 일명 ‘정중탑(庭中塔)’이라고도 불린다.
 탑은 3층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리고 머리장식을 갖춘 모습이다. 원래 기단은 2층이었으나 1926년 수리시에 기단을 넓히고 한 층을 더 얹음으로써 통일신라 탑의 전형인 2층 기단의 모습을 깨뜨렸다. 위층 기단의 모서리와 가운데, 탑신부의 각 층 몸돌 모서리에는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다. 지붕돌은 밑면에 5단씩의 받침을 두었고, 네 귀퉁이가 약간 위로 들려 있다. 또한 각 지붕돌에는 네 귀퉁이마다 바람에 흔들리는 작은 종이 매달려 있는데 이것은 후대에 와서 설치한 것이다. 꼭대기에는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 보륜(寶輪:수레바퀴모양 장식), 보주(寶珠:구슬모양 장식) 등이 차례로 올려져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1926년 6월 탑의 수리할 때 위층 기단에서 아홉 개의 작은 불상이 발견되었는데 이 불상들은 수리후 다시 석탑 안에 넣어두었다. 탑은 원래 2층 기단이었다는 점과 5단의 지붕돌받침 등 통일신라 석탑의 기본형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으나, 기단의 가운데기둥 조각을 하나만 두는 등 각 조각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의 것으로 추측된다.


▶ 해인사목조희랑대사상(海印寺木造希朗大師像)

  해인사목조희랑대사상(海印寺木造希朗大師像보물999호1989.04.10.지정)은 해인사 조사였던 고려시대 희랑대사의 진영상(眞影像)으로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10의 해인사에 모셔져 있다. 고려 건국 당시 해인사 승려들은 견훤을 지지하는 남악파(南岳派)와 왕건을 지지하는 북악파(北岳派)로 나뉘어 있었는데 희랑은 북악파의 종주(宗主)였다. 이 상은 화엄종 북악파의 진면목을 적절하게 묘사하여 화엄종의 진리를 무언(無言)의 형상을 통해서 지금까지 끊임없이 설법하고 있는 우리나라 초상의 최고 걸작이다.
 몇 토막의 나무에 조각하여 이은 이 상은 체구에 비해 머리가 다소 큰 편이다. 얼굴은 길고 이마에는 주름살이 깊이 파였으며, 자비로운 눈매, 우뚝 선 콧날, 잔잔한 입가의 미소는 노스님의 인자한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다. 여윈 몸에는 흰 바탕에 붉은 색과 녹색 점이 있는 장삼을 입고 그 위에 붉은 바탕에 녹색 띠가 있는 가사를 걸치고 있는데 그 밑에 금색이 드러나는 것으로 미루어 원래 모습에는 금빛이 찬연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생략할 곳은 과감히 생략하고 강조할 곳은 대담하게 강조하여 노스님의 범상하지 않은 위용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나무를 쪼고 깎아 만들었기 때문에 목조에서 풍기는 인간적인 따뜻한 정감을 느낄 수 있다.
 만들어진 연대는 고려 초인 930년경 이전으로 추정되며, 진영 조각의 진수를 가장 잘 묘사함으로써 10세기 중엽 조각 가운데 최고의 걸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유일한 승려의 목조진영이라는 점에서도 미술사적 가치가 큰 작품이다.

 
▶ 해인사대적광전“홍치4년”명동종(海印寺大寂光殿“弘治四年”銘銅鐘)

  해인사대적광전“홍치4년”명동종(海印寺大寂光殿“弘治四年”銘銅鐘보물1253호1997.06.12.)은 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10에 위치한 해인사의 대적광전 안에 있는 높이 85㎝, 입지름 58㎝, 두께 6㎝의 종이다.
 꼭대기에는 사실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두마리의 용이 종을 매다는 고리인 용뉴 역할을 하고 있고, 어깨부분에는 연꽃을 새겼다. 밑으로는 돌출된 9개의 유두가 사각형모양의 유곽안에 있으며, 유곽 사이사이에는 보살상이 있다. 종 중앙에는 3줄의 굵은 가로줄을 돌리고 그 위쪽에는 꽃무늬를, 아래로는 용무늬를 새겨 종 전체가 무늬로 가득 차 매우 화사한 느낌을 주고 있다. 아랫부분에는 다시 2줄의 가로줄을 돌리고, 윗쪽에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8괘를, 아랫쪽에는 아무런 무늬를 새기지 않았다.
 유곽 아래에는 조선 성종 22년(1491)에 만들었다는 글이 있다. 이 종은 시대적 변천과정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으며, 불교 공예품으로도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 해인사영산회상도(海印寺靈山會上圖보물1273호1997.08.08.지정)

  해인사영산회상도(海印寺靈山會上圖보물1273호1997.08.08.지정)는 석가가 영축산에서 설법하는 장면을 묘사한 영산회상도이다. 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10에 위치한 해인사에 있는 이 불화는 비단 바탕에 채색하였고, 길이 334㎝, 폭 240㎝이다.
 이 그림은 본존인 석가불을 중심으로 주변에 여러 무리들을 적절히 배치하여 영산회상의 법회 장면을 자세히 묘사하였다. 중앙에 있는 석가는 손가락을 땅으로 향하게 하여 마귀를 물리치는 의미를 지닌 항마촉지인의 손모양을 하고 앉아 있다. 다른 무리들에 비해 유난히 신체가 크며, 떡 벌어진 어깨로 인해 보는 이를 압도하는 듯하지만 둥근 얼굴과 엷은 미소로 부드러움과 넉넉함도 느끼게 한다. 중앙의 석가불을 중심으로 많은 무리들이 대집단을 이루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데, 그 모습이 서로 닮아 도식적인 느낌이 들기도 한다. 채색은 밝은 홍색과 녹색 바탕에 흰색과 금칠을 해서 전체적으로 밝고 화사한 분위기가 느껴지고 옷과 대좌 등에 표현된 색상과 문양에서 정교함과 꼼꼼함을 엿볼 수 있다.
 영조 5년(1729) 승려화가 의겸이 참여한 그린 그림으로 주변에 무리들이 많지만 적절하게 배치하여 시선을 탁 트이게 해주는 구도와 격조 높은 색채와 문양, 정교한 필치 등이 주목되는 작품이다. 그림에 기록된 글로 화가와 제작시기를 정확히 알 수 있어 조선 후기 불교회화 연구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 해인사대적광전비로자나불삼존상(海印寺大寂光殿毘盧舍那佛三尊像)

  해인사대적광전비로자나불삼존상(海印寺大寂光殿毘盧舍那佛三尊像시도유형문화재38호1972.02.12.지정)은 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10에 위치한 신라 애장왕 때 창건된 경남 합천 해인사의 대적광전에 있는 불상이다. 대적광전은 팔만대장경을 지니고 있는 법보사찰(法寶寺刹) 해인사의 중심법당이다. 불상은 원래 금당사(金塘寺)에 있었던 것이며 고종 1년(1897)에 현재 위치로 옮겨서 모시고 있다.
 본존불은 머리에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이마 위에는 반달 모양이 표현되어 있다. 옷은 양 어깨에 걸쳐 입고 있으며, 넓게 파인 가슴에는 옷자락을 집어넣고 있고 양 다리에는 물결 모양의 옷주름이 표현되어 있다. 손은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는 모습으로 비로자나불이 취하는 일반적인 손모양이다.
 본존의 왼쪽에는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이, 오른쪽에는 실천을 통한 자비를 상징하는 보현보살이 위치하고 있다.
 자세가 장중하고 온화한 가운데서도 위엄이 갖추어진 조선 초기의 작품으로 보인다.

 
▶ 해인사법보전비로자나불좌상(海印寺法寶殿毘盧舍那佛坐像)

  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10에 위치한 해인사는 신라 애장왕 때 순응과 이정이 세운 사찰로 의상의 화엄 10찰 중 하나이며,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법보사찰(法寶寺刹)로서 유명하다.
 해인사법보전비로자나불좌상(海印寺法寶殿毘盧舍那佛坐像시도유형문화재41호1972.02.12.지정) 불상은 팔만대장경이 보관되어 있는 장경각 뒤편에 있는 법보전의 본존불로서 이마에는 반달 모양이 표현되었고, 얼굴은 갸름한 편이다. 귀는 어깨까지 길게 내려오고 목에는 3개의 주름인 삼도(三道)가 뚜렷하다. 불상이 입고 있는 옷은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있고, 주름은 평행 계단식으로 표현되었다. 손은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는 모습으로 비로자나불이 취하는 일반적인 손모양이다.
 좌우에는 높이 47㎝의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아담한 크기로 배치되어 있는데, 조선 초기 보살상의 특징을 잘 표현하고 있다.

 
▶ 해인사경학원(海印寺經學院)

  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10에 위치한 해인사는 우리나라 3대 사찰 중 하나로 통일신라 애장왕(재위 800∼809) 때 순응과 이정이 세웠다고 전하며 팔만대장경판을 보관하고 있다.
 해인사 경학원(海印寺經學院시도유형문화재329호1997.01.30.지정)은 원래 경홍전이라고도 불렀는데 왕과 태자의 만수무강을 비는 건물이다. 고종 29년(1892) 민형식의 뜻에 따라 범운화상이 지었고 경홍전이라 불렀다. 그 뒤 1946년 주지스님인 환경이 이름을 경학원으로 바꾸고 해행당에 모시고 있던 역대 고승들의 영정을 이곳에 모셨다.
 지금은 해인승가대학의 도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 해인사봉황문(海印寺鳳凰門)

  해인사는 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가야산 서남쪽 기슭에 있는 절이다. 의상의 화엄 10찰 중 하나이고, 팔만대장경판이 보관되어 있는 법보 사찰로, 신라 애장왕 때 순응과 이정이 세웠다.
 해인사봉황문(海印寺鳳凰門문화재자료154호1985.11.14.지정)은 해인사의 두번째 문이며 천왕문, 금강문이라고 불리는 봉황문은 지은 시기를 알 수 없으나 여러 차례 고쳐 지은 기록이 있다. 지금 있는 건물은 순조 21년(1821)에 고쳐 세운 것이다.
 앞면 3칸·옆면 2칸의 규모로, 옆면 지붕선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또한, 지붕처마를 받치기 위한 공포가 새날개모양인 익공양식으로 내부에는 사천왕 탱화가 모셔져 있다.

 
▶ 해인사홍제암(海印寺弘濟庵)

  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21에 위치한 해인사홍제암(海印寺弘濟庵보물1300호2000.09.28.지정)은 해인사에 속해 있는 암자로 임진왜란(1592)과 정유재란 때 승병장으로 큰 공을 세운 사명대사가 수도하다 세상을 떠난 곳이다. ‘홍제암’이라는 이름은 사명대사 입적 후 광해군이 내린 ‘자통홍제존자’라는 시호에서 따왔다. 광해군 6년(1614)에 혜구대사가 사명대사의 초상을 모시기 위해 건립하였으며, 1979년 10월에 해체·보수공사를 실시하였다.
 법당과 생활공간의 기능을 겸한 인법당(因法堂) 형식의 건물 1동으로 되어 있으나 일반적인 인법당과는 달리 사명대사와 관련이 있는 여러 기능의 공간들이 한 곳에 모여있는 특이한 형태를 이루고 있다. 기본 평면은 工자형으로 가운데 법당을 중심으로 조사전, 영각, 홍각, 조실, 시자실 등이 있으며, 각각의 공간은 툇마루를 통해 모두 연결되고 있다.
 경사진 대지를 이용하여 홍각과 지장전은 돌출된 누각형으로 만들고, 법당 및 다른 공간은 단층의 구조로 만드는 재미있는 공간 배치를 보여준다. 또한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윗부분에 구성한 공포의 수법도 각 공간의 위계에 따라 달리 표현하였으며, 기둥과 기둥의 간격인 칸의 크기도 각 공간의 기능에 따라 각기 달리 하였다. 밖으로 노출된 기둥은 둥근기둥을 사용하고 안에 있는 기둥은 사각기둥으로 처리한 점도 특이하다.
 사명대사 부도 및 석장비(보물 제1301호)와 영정이 모셔져 있는 홍제암은 여러 기능의 공간이 하나의 건물 안에 모여있는 특이한 형태의 암자로, 각 공간의 위계와 기능에 따라 건물구조나 양식의 수법을 여러 형태로 표현하고 있어 역사적 의의 뿐만 아니라 건축적인 가치가 크다.
 

▶ 해인사사명대사부도및석장비(海印寺四溟大師浮屠및石藏碑)


  해인사사명대사부도및석장비(海印寺四溟大師浮屠및石藏碑보물1301호2000.09.28.지정)는 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21에 위치한 해인사 홍제암에 있는 사명대사의 부도 및 비(碑)이다. 사명대사는 임진왜란(1592)과 정유재란 때 승병장으로서 큰 공을 세운 승려로, 이곳 홍제암은 사명대사가 수도하다가 세상을 떠난 곳이다. 홍제암이라는 암자 이름은 사명대사 입적 후 광해군이 내린 ‘자통홍제존자’라는 시호에서 따온 것이다.
 홍제암의 북동쪽 약 20m 지점의 산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사명대사 부도는 조선 후기를 대표할 수 있는 거대한 종 모양의 부도로, 당당한 형태와 조형미를 보여주고 있다. 기단은 하나의 돌로 2단을 이루었는데, 아랫단은 사각형이고 윗단은 둥근 형태를 보이고 있으며, 그 위에 종 모양의 몸돌을 올려놓은 모습이다. 부도의 꼭대기에는 연꽃 봉오리 모양의 보주(寶珠)를 올려 놓았다.
 사명대사 석장비는 대사의 일대기를 기록한 비석으로, 광해군 4년(1612)에 세웠으며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이 비문을 지었다. 일제시대(1943년) 때, 비문의 내용이 민족혼을 불러일으킬 우려가 있다 하여 일본인 합천 경찰서장이 네조각으로 깨뜨린 것을 1958년에 다시 접합하여 세웠다. 이 석장비는 현존하는 사명대사비 가운데 가장 먼저 건립되었으며, 문장이 매우 빼어날 뿐 아니라 비문에 대사의 행적이 비교적 소상하게 적혀 있어 역사적인 가치도 높다.
 사명대사의 부도와 석장비는 본래 하나의 짝을 이루고 있던 것으로, 이러한 형식은 신라시대 이래의 전통이 계승되고 있다는 점에서 학문적인 의의가 있다.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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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야산 1,430m
 
  경남 합천군, 거창군, 경북 성주군에 아우르며 위치한 가야산{1,430m)은 조선8경의 하나로 주봉인 상왕봉(1,430m)을 중심으로 톱날 같은 암봉인 두리봉, 남산, 비계산, 북두산 등 해발 1,000m가 넘는 고봉들이 마치 병풍을 친듯 이어저 있다.
 가야산은 동서로 줄기를 뻗고 있으며 남북으로 경상북도 성주군과 경상남도 합천군의 경계를 이룬다. 합천 쪽으로 드리운 산자락은 부드러운 육산을 이루고 성주군 쪽은 가파르고 험하다.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기암괴석과 어울어진 가을 단풍은 자연의 신비로움을 느끼게하고, 눈 덮인 가야산 설경은 한 폭의 풍경화를 보는 듯하다.
 가야산은 오묘하고 빼어난 산세를 지니고 있어 사시사철 많은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매표소에서 해인사까지 이어지는 홍류동계곡 주변에는 소나무뿐만 아니라 활엽수가 우거져 있어 그 아름다움이 해인사와 함께 가야산의 백미로 손꼽힌다.
 해인사 초입의 갱맥원에서부터 정상의 우비정까지 19개의 명소가 있다. 가야산 골짜기에서 발원한 홍류동계곡은 계절마다 경관을 달리하여 주위의 천년 노송과 함께 제3경 무릉교로 부터 제17경 학사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절경이 10리 길에 널려있다.
 가을의 단풍이 너무 붉어서 계곡의 물이 붉게 보인다 하여 홍류동이라 불리어 웠고 여름에는 금강산의 옥류천을 닮았다 해서 옥류동으로도 불리운다.
 이 계곡의 아름다움은 봄이나 가을에 으뜸을 이룬다. 그밖에도 가야산에는 무릉교, 홍필암,음풍뢰, 공재암, 광풍뢰, 제월담, 낙화담, 첩석대 등의 명소가 있다.
 가야산 남쪽자락에 자리잡은 해인사는 14개의 암자와 75개의 말사를 거느리고 있다. 특히 해인사는 국내 3보사찰중 법보사찰로 유명하다.
 우리나라 3보 사찰중 하나인 가야산 해인사는 불교의 성지이다. 조선시대 강화도에서 팔만대장경을 옮겨온 후 불보사찰 통도사, 승보사찰 송광사와 함께 법보종찰로서의 명성을 얻게 된 것이다.
 가야산 능선은 곰취, 더덕, 잔대, 두릅, 미나리 등 많은 종류의 산나물 산지로 봄철의 산나물산행으로도 인기 있다. 해인사 입구에서 주민들이 직접 채취한 산나물을 판다.
 현대에 들어와서 가야산은 백련암에서 수도했던 성철스님으로 말미암아 더욱 유명하게 됐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법어는 홍류동계곡의 맑은 물과 더불어 가야산을 찾는 이들의 마음에 항상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킨다.


 * 산행길잡이
 
산행기점은 해인사가 있는 신부락 쪽에 3개, 경북 성주군 수륜면 쪽에 2개이다. 대표적인 코스는 해인사에서 용탑선원을 거쳐 정상에 오르는 코스이다.
 신부락 집단시설지구 주차장에서 시작한다. 해인사와 용탑선원을 거쳐 1시간30분쯤 오른다. 소의 잔등 같은 밋밋한 정상 바로 밑의 능선에서 40분쯤 오르면 정상이다.
 가야산 정상부에는 우비정이라는 샘이 있다. 하산은 능선 갈림길까지 내려선 후 마애불입상을 거쳐 해인사로 한다.
 해인사 쪽으로 난 등산로가 봄, 가을에 좋으며 수륜면 쪽은 겨울에 좋다. 가야산 북쪽의 등산로는 계곡의 앙상한 뼈대와 얼어붙은 골짜기 등으로 겨울산의 모든 것을 느낄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 한국의 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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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님이여, 청산 좋다 이르지 말게'


  가야산 만큼 걸출한 고승대덕(高僧大德)을 많이 배출한 산도 드물다. 균여와 대각국사 의천은 해인사에서 도(道)를 깨쳐 사풍(寺風)을 선양했고, 사명대사 유정은 해인사 홍제암에서 3년을 머물다가 입적했다. 근세말 최고의 선승으로 손꼽히는 경허스님 또한 노년기를 해인사에서 보냈다.
 1993년 남루한 가사 한 벌만을 남긴 채 입적한 성철스님은 해인사에서 동산 큰스님으로부터 계(戒)를 받고 주로 가야산에서 참선수행하여 '살아있는 부처'로 알려질 만큼 큰 족적을 남겼다. 성철스님은 가야산에 있는 암자 중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백련암에서 기거하다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장경각 옆의 퇴설당에서 입적하였다.
 이렇듯 가야산이 고승대덕을 많이 배출한 데에는 가야산의 산세와 무관치 않은 듯하다. 이중환은 택리지에 '가야산은 끝이 뾰족한 바위들이 나란히 늘어서서 불꽃이 공중에 솟는 듯하고 대단히 높으면서도 수려하다'고 적고 있다. 동국여지승람에서는 '가야산의 모양새는 천하의 으뜸이요 지덕(地德)이 또한 비길 데 없다'고 했다. 그리고 가야산은 옛날부터 정견모주(正見母主)라고 하는 산신이 머무는 신령스러운 산으로도 여겨졌다.
 빼어난 산치고 대찰(大刹)을 품고 있는 산이 없는데 가야산만은 빼어나면서도 해인사와 같은 큰 절을 끼고 있다. 이는 가야산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산세 때문일 것이다. 빼어나면 안온하지 못하고 안온하면 빼어나지 못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인데 가야산만은 몸은 넉넉함으로, 머리는 우아함으로 뭉쳐있다.
 가야산이 이러할 진데 해인사와 같은 대찰을 거느리지 않을 수 없고, 경허와 성철같은 큰 스님중의 큰 스님을 낳을 수 밖에. 한편으로 가야산이라는 육체는 해인사라고 하는 영혼이 결합되어 그 생명력을 키워왔는지도 모른다. 결국 가야산은 해인사를 품에 안음으로써 불법(佛法)의 향기가 진동하는 성산(聖山)이 되었다. 가야산의 이 골짜기 저 등성에 14개의 암자가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따지고 보면 가야산의 싹수는 신라 말 고운 최치원선생이 이곳을 찾으면서부터 이미 짐작이 되었는지 모른다. 최치원은 열두 살 나이에 당나라로 유학하여 열여덟에 급제하고 거기에서 10년 동안 벼슬을 지냈다. 스물여덟에 귀국한 최치원은 신라에서 한림학사까지 지내다가 서른여덟 나이에 가야산에 입산해 버린다. 유학의 대성가 최치원은 나중에 가족까지 가야산 홍류동 계곡으로 데리고와 평생을 이곳에서 살았다 한다.

    스님이여 청산 좋다 이르지 말게
    산이 좋다면 왜 다시 나오나
    먼 훗날 내 종적 눈 여겨 보게
    청산에 들면 다시는 나오지 않으리

그리고 최치원은 다시는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렇게 홍류동에 은거하며 살던 최치원이 어느날 숲 속에 갓과 신발만 남겨둔 채 홀연히 자취를 감춰 사람들은 그가 마침내 신선이 되었다고 여겼다.
 최치원이 신선이 되었다는 가야산은 들어서는 순간부터 우리들의 눈을 현혹시킨다. 88고속도로 해인사 인터체인지를 빠져나와 가야산으로 방향을 돌리자 톱날 같은 봉우리들이 병풍처럼 펼쳐진다. 들어가면서 볼 때 왼쪽의 봉우리가 매화산(1,010m)인데 조금은 여성스럽고, 오른쪽 봉우리는 가야산(1,430m)인데 매화산에 비하여 남성다운 느낌을 준다.
 매표소를 지나 해인사로 들어가는 길을 따라 구불구불 이어지는 홍류동 계곡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홍류동 계곡에서 매화산 쪽으로 펼쳐지는 풍광이 마치 실경 산수화 한 폭을 보는 것 같다. 불꽃처럼 솟아오른 바위와 용틀임하듯 서 있는 소나무의 환상적인 어울림. 여기에 울창한 수림과 맑디 맑은 계류. 그 누가 선경이라 하지 않을손가. 예로부터 가야산을 조선 8경의 하나요, 전국 12대 명산의 하나로 꼽아온 사실이 설득력있게 다가온다.
 주차장에 차를 주차시키고 해인사 쪽으로 발길을 재촉한다. 상가를 지나 넓게 닦인 길을 따라 걷는다. 기념품 파는 가게들에서도 성철스님의 향기가 물씬 풍긴다. '물은 물이요, 산은 산이다'는 큰 스님의 말씀을 판각한 벽걸이들이 여기저기서 눈에 띈다. 어디 그뿐인가. 전통찻집의 이름도 스님의 화두 '이 뭐꼬?'다.
 주차장에서 해인사 일주문까지는 15분 거리. 아름드리 참나무, 느티나무와 소나무들로 이루어진 이곳 숲은 사뭇 장엄하다. 나무룰 남벌하지 않은 수백 년의 노력이 가져다준 자연의 선물이다. 홍류동 계곡에서 다소 고조되었던 가슴이 착 가라앉으면서 금방 차분해 진다. 아름드리 나무들 사이에 낀 단풍나무들은 가야산의 가을 풍경을 한층 격조높게 가꾸어줄 듯 싶다.
 해인사는 내려오면서 들르기로 하고 '정상 4km'라는 푯말을 따라 곧 바로 용탑선원을 지나 정상가는 길로 빠져든다. 일주문에서 5분 정도만 가면 마애불로 가는 길과 정상으로 곧바로 오르는 길이 갈린다. 마애불 또한 내려올 때 몫으로 남겨두고 마치 오솔길 같이 경사가 완만한 길을 따라 가야산의 내음을 맡으며 산행을 계속한다.
 해인사 일주문을 지난지 40분쯤 되었을까, 서서히 가파른 길이 시작된다. 가파른 길을 15분 정도 오르니 능선 삼거리다. 해인사에서 2.5km, 정상까지는 1.5km 거리를 두고 있는 이곳은 마애불을 거쳐 올라오는 길과 만나는 곳이다.
 마치 수탉의 벼슬같이 솟아오른 가야산의 봉우리들이 발가벗은 나무가지들 사이로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다. 오롯하게 앉아있는 정상 일대의 봉우리들이 그지없이 아름답다. 여기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정상을 향하여 출발한다. 돌 계단으로 된 오르막 길이 꽤 가파르다. 여전히 나무들이 우거져 숲을 이루고 있다.
 능선 삼거리에서 15분 거리인 대피소에 도착하니 가야산의 암봉들이 머리 위를 누를 듯 웅장하게 서 있다. 암봉 밑으로는 작달막한 나무들이 온갖 풍상을 이겨낸 듯 서 있다. 대피소에서는 음료수, 막걸리 등을 판매하고 있다.
 대피소를 지나면서부터 본격적인 암봉 산행이 시작된다. 때로는 바위를 타고 올라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돌자갈 길을 걸어야 했다. 지금까지는 흙만 밟고 걷다가 돌을 밟는 산행이 계속되면서 다리에 힘이 훨씬 더 들어간다.
 다른 산 같았으면 여기저기에 철사다리 등을 놓을 법도 하지만 비교적 자연 상태를 그대로 보존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역력해 보인다. 이러한 노력은 상가에서 해인사까지 들어가는 차도(여기에는 차도와 인도가 따로 나 있음)를 포장하지 않은 데에서도 드러난다. 이 길도 원래 포장을 하려고 했는데 성철스님의 만류로 오늘의 비포장 길로 유지되었다 한다.
 다만 홍류동 계곡 상류 해인사 주차장 위쪽에 여관촌과 상가를 조성하여 이곳 분위기를 깨뜨린 점에 대하여는 눈살이 찌뿌려진다. 해인사를 찾는 사람들에 대한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이로 인하여 빼앗겨버린 경건한 분위기나 훼손된 경관은 무엇으로 보상받을 것인가?
 대피소 바로 위쪽의 암봉을 뒤로 돌아 오르니 가야산 정상이 지척이다. 근처에는 아직도 잔설이 곳곳에 남아 있다. 장갑을 벗고 슬며시 아직도 남아있는 눈을 만져본다. 불과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금방 잊혀져가던 겨울의 느낌을 다시 맛보는 것 같아 새롭다. 8부 능선까지는 완연한 봄이건만 이곳은 가는 겨울을 붙잡고 있다. 먼 거리에서 볼 때 불꽃같고 톱날 같던 봉우리는 근처에 와 보니 오히려 무뚝뚝한 모습이다.
 이윽고 산행을 시작한지 2시간만에 해발 1,430m인 가야산 정상인 상왕봉에 도착한다. 경상남도 합천군과 경상북도 성주군을 가르고 있는 가야산은 본디 인도의 부다가야(Buddha gaya)에 있는 가야산으로부터 따왔다고 전해진다. 또한 이 지역이 대가야국의 영역이었으므로 가야라고 하는 국명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상당한 설득력을 갖고 주장되기도 한다.
 범상치 않은 모양을 가진 가야산은 여러가지 이름으로 불리워지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많이 알려진 별명은 우두산(牛頭山)이다. 이 산의 바위가 소머리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란다. 정상의 바위 위에는 1∼2평 됨직한 웅덩이가 있어 물이 고여 있다.
 정상인 상왕봉 동쪽 100m쯤에는 칠불봉이 있고, 칠불봉에서 동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말 그대로 불꽃이 튀는 모양의 크고 작은 봉우리들이 길게 이어진다. 역시 머리는 빼어남으로 몸체는 넉넉함으로 뭉친 가야산의 진수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조물주의 전능한 조형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서쪽으로는 두리봉이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가야산의 북쪽으로 자리잡은 경상북도 성주 땅의 논 배미와 농촌 가옥들이 평화롭게 앉아 있다. 남서쪽으로는 우리가 올라왔던 골짜기 곳곳에 암자들의 지붕이 보이기도 한다.

날씨가 화창하면 멀리는 지리산과 덕유산에서부터 의상봉에 이르기까지 시야에 들어온다는데 일정 거리만 벗어나면 구름덩어리인지 산봉우리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전망이 좋지 않다.
 오르면 내려가야 하는 것이 자연의 법칙. 우리는 다시 오던 길을 되돌아 하산을 한다. 대피소를 지나 능선 삼거리에서 해인사로 곧 바로 내려가는 길을 버리고 마애불 쪽으로 향한다. 이쪽 길은 국립공원 등산로 치고는 사람들의 통행이 많지 않은 듯 길도 좁고 울창한 숲이 우거져 호젓하다. 빛 바랜 단풍나무 잎들이 유난히도 많은 산등성을 10분 정도 내려오니 계곡이다.
 여기에서 조그마한 계곡을 건너 왼쪽으로 산비탈을 올라서니 해발 960m 지점에 '초인리 마애불상'이 자애로운 표정으로 자리잡고 있다. 높이가 약 7.5m나 되는 한 장짜리 얇은 판암(板岩)에 고부조(高浮彫)로 새겨진 불상은 그 옷자락에 비하여 유달리 손발이 섬세하게 다듬어진 것이 인상적이다.
 마애불상을 출발한 우리는 해인사를 향하여 발길을 재촉한다. 산행을 할 때면 산길을 걸으면서 산 그 자체에 취해 보기도 하지만 때로는 꼭 보아야할 곳이 있으면 발길이 빨라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생리일 게다. 그 장본인은 바로 해인사다.
 마애불상을 출발한지 50분만에 해인사 경내에 도착한다. 불보사찰 통도사, 승보사찰 송광사와 더불어 한국의 삼보사찰 중의 하나인 법보사찰 해인사는 무릇 엄숙하다. 법보(法寶)란 불교교리인 부처님의 가르침을 집대성한 불전을 말하는데 해인사를 법보사찰이라 부르는 이유는 팔만대장경판을 보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해인사의 종파적 이념인 화엄종은 화엄경을 근본 경전으로 삼고 있는데, 이 화엄경에는 화엄사상의 요체를 암시하는 '해인삼매(海印三昧)'라는 개념이 나타난다. 법(法)을 관조함이 마치 바닷가 만상을 비추는 것과 같다는 비유가 곧 '해인'의 의미이다. 따라서 해인삼매란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고 걸어 들어간 선정의 경지를 뜻한다. 여기에서 해인사라는 이름은 비롯되었다.
 해인사의 가람 배치는 빼어난 정형의 완결성으로 돋보인다는 평을 듣고 있다. 일주문, 해탈문으로부터 화엄종의 주존불인 비로자나불을 비롯한 일곱 부처님이 모셔진 대적광전에 이르는 주요 당우들이 대체로 일직선상에 배열되었다. 해인사는 용케 임진왜란의 전화는 모면했지만 창건 이래 일곱차례의 큰 불을 만났다. 그 때마다 거듭 중창되었는데 현재의 건물들은 대개 조선 말엽에 중건하였다.
 웅장한 건물들이 세인들을 압도해 버린다. 일단 우리의 관심은 팔만대장경. 부처의 은덕으로 나라를 수호하려고 제작된 대장경판은 현존하는 해인사의 것 이전에도 있었는데 그것을 초조대장경이라 한다. 그러나 고려 현종 때 만들어진 그 경판들은 1232년 몽고족의 침입으로 모조리 불타 버렸다.
 이후 고려 고종이 1236년부터 16년에 걸쳐 다시 완성시킨 것이 오늘의 팔만대장경이다. 81,340판에 이르는 불가사의한 이 대장경판은 간절한 불심으로 나라를 수호하려는 고려왕조의 몸부림이 빚은 산물로서 세계적인 보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 대장경판은 원래 강화도 선원사에 소장되었다가 조선 태조 8년(1399년)에 지금의 해인사 장경각으로 옮겨졌다. 대장경판이 수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원형대로 보존되고 있는 이유는 장경각의 독특한 설계 때문이라 한다. 온도, 통풍, 방습이 자연적으로 조절되는 등 오늘날의 과학으로도 풀기 힘든 불가사의한 건축기법은 우리를 또 한번 놀라게 한다.
 불국사 석굴암이 그렇듯이 장경각의 건축도 그 때 당시의 건축기술이 지금보다 뛰어나서가 아니라 '혼'을 가지고 임했던 당시와 돈벌이를 우선적인 가치로 생각하는 요즈음의 차이가 아닐까? 해인사가 일곱 차례의 화재를 당하면서도 장경각 만큼은 불길이 미치지 않아 사람들은 이 구역을 삼재불입지처(三災不入之處)라 믿었다.
 해인사를 나와 우리는 '이 뭐꼬?' 찻집에서 녹차를 마신다. 찻집의 벽면에는 중광스님의 그림 몇 점이 눈에 띈다. 부처님 앞에 결가부좌하고 수행중인 스님 왈 '알지 못합니다'라고 말하는 그림이 눈에 와 닿는다.
"이 뭐꼬?"
"알지 못합니다."
  *  (1997. 3. 22 http://www.chosun.ac.kr/~gsjang/spring/mounsp7.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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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해인사
 
  해인사 일주문에 이르기 전에 우람한 사적비와 안내판에 대조되어 초라해 보이는 3층탑이 있다. 표면의 이끼를 긁으면 거무튀튀한 표층이 부스럼처럼 일어나는 가려진 이 탑이, 싱그러운 신라정신이 손이 시리게 와닿는 해인사에서 가장 오래된 묘길상탑(妙吉祥塔)이다.
이 탑의 정체가 밝혀진 것은 겨우 40여년 전 체포된 도굴꾼에 의해서였다. 그 탑 속에서 신라 최고의 문장 최치원(崔致遠)이 쓴 지석(誌石) ‘해인사 묘길상사탑기(妙吉祥寺塔記)’가 나온 뒤부터다.
  거기 보면 이 탑은 진성여왕 9년(895)에 세운 승군(僧軍)의 호국 진혼탑으로, 전사한 56명의 법명이 적혀 있다. 신라정신의 기틀이요, 우리나라 애국 정신의 원천인 원광스님의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실천한 최고(最古)의 정신문화재인 것이다.
  해인사를 역사의 눈으로 돌아보고 나면 아쉬운 점은 해인사의 근원을 이룬 신라 말 진성여왕의 유적이 미비하다는 것이다. 결혼 못 하는 신분으로 각간 벼슬의 위홍(魏弘)을 사랑했고, 그가 죽자 북궁해인수(北宮海印藪)에 원당(願堂)을 지어 혼백을 살렸다.
  왕위를 물리고 이 북궁에 들어와 혼백과 더불어 살다가 죽어서는 황산(黃山)에 묻혔다. 서까래에서 나온 해인사 중창기에 보면 북궁이 바로 해인사요, 원당은 지금의 부속 암자인 원당암(願堂庵)이며, 황산은 원당암에서 바라보이는 가야산 동구다.
  동서고금에 죽어서까지 사랑을 연장시킨 이만한 큰 사랑이 있었던가 싶은 정신문화재들이 확인되지 않은 채 흩어져 있다. 중국 양저우(揚州)에서는 그곳에 유학했다는 그 한 가지만으로 최치원의 추모사업이 대대적으로 벌어지고 있다던데 그의 사적이 배어 있지 않은 곳 없는 해인사에선 그 체취를 접할 현장이 미흡하다.
  지금 해인사는 신도나 관광객이 접하게 될 중간 공간으로 산사체험관·숙소·도서관 등을 갖추게 될, 제2의 해인사랄 수 있는 ‘문화도량’ 건설을 두고 사찰측과 국립공원 훼손이라 주장하는 환경단체들 간에 갈등을 빚고 있다 한다.
  새삼 해인사의 정신자원들에게 각광을 대보는 것은 양적인 확대도 좋지만 질적인 충실이 선행되는 것이 순리일 것 같아 해인사가 품고 있는 개발 가능성에 각광을 대보았다. (조선일보[이규태코너]  2004.07.16 이규태 chosu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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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修行이 먼저고 佛事는 나중이죠"
                해인사 변화 주도하는 주지 현응스님
      동판대장경 규모 축소 “얼마든지 비판하라” 토론회 통해 변신모색
  “지금 대중들이 해인사에 요구하는 것은 ‘최고의 수행도량과 수행자의 모습을 보여달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게 첫번째입니다. 해인사에 불교적 내용이 충만한 수행 기풍이 넘쳐 흐르는 것이 먼저입니다. 동판대장경이나 신행(信行)문화도량은 그 다음이지요.”    팔만대장경을 소장한 법보(法寶)사찰 해인사가 거듭나기 위한 노력에 한창이다. 변화는 지난 10월 부임한 40대 후반의 주지 현응 스님이 주도하고 있다. 현응 스님의 제의로 구성된 ‘해인총림 및 교구발전위원회’(상임공동위원장 원택 스님)는 올해 말까지 네 차례 예정으로 토론회를 개최하고 있다. 11월에 있었던 두 번의 토론회에서는 해인사와 스님들의 수행 풍토에 대한 반성과 비판 등이 가감 없이 쏟아졌다고 한다. 12월 토론회에서도 사회, 문화, 포교, 불사(佛事) 등에 대해 비판과 제언이 쏟아질 전망이다. 해인사는 강원 율원 선원과 산내 암자 등에 모두 400명 가까운 스님이 사는 한국 대표 사찰 중 한 곳. 이 때문에 해인사의 자기 반성과 변화 노력은 불교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1일 해인사에서 만난 현응 스님은 “토론회는 비판을 전제로 한 것이며 적극 수용할 것”이라며 “해인사의 현재 모습에 대한 분석과 비판, 검증을 통해 새로운 해인사의 정체성과 방향성, 비전을 찾아보려는 노력”이라고 말했다. 그는 “절을 찾는 신자들은 정신적 안정감이든 스님의 설법이든 무언가 얻고 싶어한다”며 “그들을 만족시켜주려면 우선 절과 스님들부터 수행이 충족되고 넘친다는 자신감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말했다.    같은 맥락에서 현응 스님은 그동안 불교계 안팎의 논란을 불러온 동판대장경 제작과 신행문화도량 건설에 대해서도 “산중 스님들과 좀더 상의해야 한다”면서도 분명한 견해를 밝혔다. 그는 구체적으로 “팔만대장경의 보존과 그 의미에 대한 선양이라는 원래 취지를 살리되 철저한 재검토와 수정, 보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목판 8만장을 모두 동판으로 만드는 것은 불필요하다는 입장이다. 대신 불교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경율론 등을 선별해 동판으로 제작해 전시하는 것이 좋다는 의견이다. 일반 신자들에게는 순번에 따라 8만장 중 한 장을 제작해 배포하는 것이 아니라 ‘반야심경’ ‘법화경’ ‘화엄경’ 등 5종류 중에 선택하도록 해 동판으로 제작해 탁본할 수 있는 도구도 함께 배포해 친지들에게 나눠줄 수 있도록 한다는 복안이다.    스님은 한 걸음 나아가 “세계문화유산인 대장경 목판은 일반 공개를 제한해 철저히 보존하되 해인사 박물관을 목판인쇄문화 전문으로 특화해 1000년 정보화를 선도했던 선조들의 뜻을 보여줄 생각”이라고 말했다. 신행문화도량의 경우도 그는 “연수원 시설은 필요하지만 동판대장경 판매로 재원을 마련하려는 계획은 재고해야 한
함동진 18-02-22 17:41
 
*(윗글에서 용량부족으로 짤린부분을 올립니다.)
 한다”며 “규모도 줄이고 설계도 가야산·해인사와 어울리도록 조정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1972년 해인사로 출가한 현응 스님은 뛰어난 기획력을 가진 스님으로 꼽힌다. 1994년 조계종개혁회의 기획조정실장을 지냈고, 불교환경연대 집행위원장, 불교신문 사장을 역임하며 대사회적인 문제 의식과 감각도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금 해인사의 변화를 주도하는 것도 ‘외형적·하드웨어적 성장에 걸맞은 소프트웨어 구축’이라는 고민이 깔려 있다. 현응 스님은 “그동안 종교도 양적 성장이라는 흐름을 타왔다”며 “시대와 사회의 변화의 흐름 속에서 이젠 어떻게 수행하고 포교할 것인지 한 템포 쉬면서 차분히 점검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스님은 “토론회와 여론 수렴을 거쳐 내년 초쯤 해인사가 나아갈 방향을 내놓겠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2004.12.03. 해인사 합천
함동진 18-02-22 17:49
 
언제나 모범되게 기행하시는 찬란하빛e님 부럽습니다.

1970년 3월 1일 폭설내린 해인사와 가야산 정상까지 기행을 한 일이 있는데
기행문은 안보이고 수집한 자료만 보여 주재넘게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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